(12~3)
미국과 영국에서 1990년대 말 이후 꾸준히 성장해온 이른바 현대화폐이론(MMT) 학파는 이러한 사고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화폐와 국가재정의
본질에 대한 독일 역사학파와 미국 제도주의 학파의 접근의 전통 위에 서서, 자국 화폐를 발행하는 주권국가라면
그 세금징수 능력 이외에는 재정지출에 재한을 가해야 할 아무런 제약조건 따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균형재정론이란 이제 없어져야 할 미신에 불과하며, 오히려 민간부문의 경제를 위축시키고
심지어 파산에 이르게 하는 위험한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재정의 운용은 매년 ‘균형재정’을 달성한다는 족쇄에서 풀려나 경기순환의 심한 등락과 그것이
경제와 사회에 가져오는 충격을 완화하는 것에 가장 우선적인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7)
가계에서는 부채가 부채일 뿐이다. 가급적이면 줄일수록 좋고 결코 방만하게
늘려서는 안된다. 하지만 국가는 영원토록 그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영속 기업’이며, 국가의
부채란 발행할 때에 비로소 본원통화를 위시한 각종의 금융자산이 생겨나고 금융시스템 전체가 작동하게 된다. 따라서
국가가 부채를 발행하지 않으면 본원통화도 줄어들고 민간의 금융자산도 줄어드는 일이 벌어진다는 전혀 뜻밖의 결과가 나오게 된다.
(25)
예를 들면, 지금 한국에서 행해지는 조치들이 민주적 모델이라고 봅니다. 한국은 선거로 집권한 정부가 긴급사태 권한을 행사하지 않고도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정확한 진단검사, 사회적
거리두기, 격리, 감영자 동선 추적 등등이 그러한 조치들이죠. 그것들은 이 순간 꼭 실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필수적인 조치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무기는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백신도, 치료제도 없으니까요. 나는 지금 우리가 위기에 대응하려면 독재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8)
지구화 시대인 우리 사회가 반영하고 있는 또하나의 취약성, 그것은
범지구적인 불평등입니다. 미국과 같은 부유한 나라에서도 이 질병은 누구든 감염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불균형적으로 가장 잘
감염됩니다. 지구화 시대인 우리 시대에는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세계 도처의 모든 사람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코로나바이러스라는 거울에서 보는 우리 모습입니다만, 별로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죠.
(64~5)
미국 질병통제예방 센터(CDC)가
2019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7년 태어난 흑인 아기의 기대수명은 같은 해에 태어난
백인 아기의 기대수명보다 3.5년 짧다. 만약 현재 수준의
인종적 불평등이 지속된다면, 이 흑인 아기는 백인 아기에 비해 가난하게 살 가능성이 약 2.5배,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기 전에 학교를 그만둘 가능성이 약
2배, 감옥에 갈 확률이 백인보다 6배 이상 높을 것으로 예측됐다.
(117)
스마트폰 한 개에는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트랜지스터가 수백만 개 들어 있다. 순도 98%의 야금학적 등급의 실리콘을 얻기 위해 우선 석영, 순수한 탄소, 천천히 타는 목재가 약 1,600 ℃로 유지되는 용광로로 이송된단다. 그렇게 만들어진 야금학적 등급의 실리콘은 증착(蒸着) 공정을 위해 다시 약 1,000 ℃로 유지되는 정제공장으로 운송된다. 1ppb 불순도의 전자 등급 실리콘을 만들어내자면 여기서 또 에너지 집약적인 과정을 몇 단계 더 거쳐야 한다.
(128~9)
코로나19 사태는 자연을 외면하고 생태계와 절연한 인간의 삶이 빚어낸
예고된 참사이다. 지구생태계의 유기체적 구성원임을 부정하고 끊임없이 자연과 불화한 결과다. 근대 이후 인간은 개발과 성장이란 미명 아래 자연을 학살하고 자원을 약탈하는 야만을 일상화했다. 인간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과 교감하고 공존할 수 있는 영성과 감성, 치유력이나
면역력까지 앗아갔다. 자연과의 유기적 관계가 깨진 상태에서 자연의 일부인 바이러스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코로나 사태를 극복하고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서 백신과 치료제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생태계의 일원으로 돌아가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무차별적인
개발로 만신창이가 된 지구생태계를 온몸으로 감싸 안으며 소생을 돕고, 더는 훼손하거나 고갈시키지 않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19 사태는 기후위기에
맞닿아 있다.
(153)
그러니까 기독교의 이름으로 사이비가 창궐하는 것은, 이러한 기독교의
자체의 비논리성에 주요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 비논리성이 바로 기독교의 위대함의 원천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컨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굳이 좋은 일을 하고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아니 뭔가 공적을 쌓아서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 자체가 죄악이다, 구원의
길은 은총에 있다, 라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과 사상가들의 한결 같은 메시지도 결국 그 비논리성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하고 착한 인간이 되겠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자기애라는 관념의 씨앗에서 발아한 생각임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은총’이라는 것은 가장 근원적인 자유와 인간해방을 겨냥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156)
역병이 예기치 못한 사태를 촉발시킨 사례 중 이주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1차 세계대전 종결 때 이야기. 당시 연합국 수뇌들 사이에 독일의
전쟁책임을 둘러싸고 의견 대립이 있었는데,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독일에 대해 과도한 배상금을 부과하는데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는 회담 기간 중에 스페인 독감에 걸렸고, 그 바람에 기력이 쇠잔해져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지 못하고 양보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은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그 때문에 국가경제가
완전히 붕괴하고 미증유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초래하면서 마침내 히틀러가 등장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극악한 만행을 저지른 나치즘의 출현의 배경에 스페인독감이라는 역병이 있었다는, 기막힌 이야기다.
(160)
최근에 세계적인 지적 총아로 등극한 유발 하라리, 이 젊은이는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모르지만, 마치 세계의 미래에 관해서는 자기가 자장 잘 안다는 듯이 ‘예언자’ 행세를 거침없이 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지배할 세계에 대한 경고를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라고, 간혹 선의로 해석하는
논자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유발 하라리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그 어두운 예언을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점을 가장 용서할 수 없지만, 실은 이것은
소위 지식인이라는 자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도 하다.
(162)
며칠 전부터 몸이 이상하다. 누워 있으면 좀 견딜 만하기는 해도 그리 편치는 않다. 왜 이럴까. 안 그래도 코로나 때문에 심란한 터에 몸이 이러니, 자연히 기분이 처진다. 소위 ‘코로나블루’가 내게도 이런 식으로 오는가.
(206)
심지어 코로나바이러스에서도 흑인의 비율은 압도적이다. 보도를 종합하면, 시카고 확진자의 50%, 전체 사망자의 70% 이상이 흑인이었다. 그러나 시카고 주민 중 흑인의 비율은 30%에 불과하다. 위스콘신주는 전체 인구 중 흑인의 비율이 고작 6%이지만 사망률에선 거의 40%를 차지했다. 미시간주의 경우 사망자 중 흑인 비율은 40%에 이르렀지만 주 전체
인구 중 흑인의 비율은 고작 14%이다.
(226~7)
아파트를 짓기 위해서는 일단 기존 건축물을 부수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30년 이상 되면 노후 건축물이라 말하고 40년 이상
되면 철거해야 할 건물로 인식한다. 수백 년 된 유럽의 건축물을 부러워하면서도 오늘날 우리의 도시는
플라스틱의 짧은 생애처럼 30년이 지나면 폐기 대상이 된다. 이렇게
철거되는 건축폐기물은 대부분 수도권 매립지로 가고 서울, 경기도, 인천이
사용하는 제3수도권 매립지의 폐기물의 42%는 서울에서 온다. 문제는 반입되는 폐기물의 절반이 건설폐기물이고 30%는 사업장 폐기물이란
사실이다. 생활폐기물은 18%정도이다. 재개발과 재건축이 늘어날수록 매립지의 수명은 단축될 것이고 현재 수도권 매립지의 수명은 5년이 채 남지 않았다. 2025년 이후에는 서울시의 폐기물을 받지
않겠다는 인천시의 공언에도 불구하고 조성까지 7~10년 걸리는 대체 부지는 여전히 없는 상황이다. 쓰레기 대란이 몇 년 내에 현실화된다는 말이다. 서울시가 열심히
원전 1기 줄이기 운동을 통해 에너지 사용을 줄이더라도 아파트 단지 재건축하면 말짱 도루묵인 것처럼, 아무리 생활쓰레기를 줄이는 노력을 해도 건축폐기물이 이렇게 많이 쏟아진다면 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