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우리 온 국민이 날마다 입으로 하는 말, 읽고 쓰는 글을 누구나 잘
알 수 있는 쉬운 우리 말과 우리 글로 하도록 하여
서로
생각을 올바르게 알리고,
서로
깨끗한 마음을 주고받고,
저마다
하는 일을 바로 하게 되고,
잘못된
말로 남을 속이지 않고 남에게 속지 않으며,
어려운
말을 몰라서 세상을 불편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고,
어려운
말을 몰라서 죄를 짓게 되는 일이 없게 하고,
유식함을
자랑하거나 겉치레하는 풍조와 남의 것 부러워하여 우리 것을 멸시하는 태도를 바로잡아,
온
국민이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한 마음으로 정답게 살아가는 참된 민주 통일의 나라를 세우는 바탕을 다지는 데 목표를 둔다.
(52)
말이 어려우면 그 어려운 한자말을 쓰지 말고 쉬운 우리 말을 써야 한다. 어려운
말을 쓰기 위해 어려운 글자를 배우는 바보 같은 짓을 왜 우리가 해야 하나. 더구나 한문글자를 쓰게
되면 한문글자로 된 어려운 말을 자꾸 쓰게 될 것은 뻔한 이치다. 그래서 우리 말은 버림받고 죽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 말이 죽으면 우리 겨레 얼이 어디 깃들어 있을 수 있는가. 우리 말 우리 글을 없애고 우리 겨레를 죽여 없애려던 간악한 일본제국에서 해방이 된 지 53년, 그동안 그대로 우리 말 우리 글 문화를 이 정도라도 꽃피워왔더니. 이제 웬일로 그 옛날로 돌아가 한문글자를 쓰고 어려운 한자말을 써서 반민주의 글문화를 만들어 교육이고 학문이고
사회생활 전체를 어지럽게 하고 나라와 겨레를 망치려고 사는 사람들이 설치게 되었는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59)
정말이지 나는 내 방에 가득 차 있는 이 책들, 그 가운데서도 지식인들, 학자들이 써놓은 책들이 싫다. 우리 글로 썼다는 이 책들이 철학이고
역사고 사회고 경제고 문학이고, 문학에서 소설이고 수필이고 시고 아동문학이고 모든 책이 잘못된 한자말, 잘못된 일본말, 일본말법, 서양말법
투성이로 되어 있다. 책이 이렇고 신문이 이렇고 방송말이 이러니 우리 말 우리 얼은 자꾸 죽어간다. 그래서 대낮에 나타난 도깨비 같은 한자말을 쓰자, 한자말을 알 수
있도록 한문글자를 쓰고 가르치자고 하는 미친 소리까지 나올 판이 됐다.
(69)
이것은 우리가 온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말과 글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 말과 글을 죽이는 한문글자를 숭배해왔기 때문이고, 한문글자로
언제까지나 이득을 얻어가지고 싶어하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백성들을 바보로 만드는 최면술에 우리 모두가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이제야말로 우리는 깨어나, 우리 말과 글을 더욱 보잘 것 없이 만들고
우리 문화를 아주 싹 쓸어 없애고 우리 백성을 영원히 종살이로 묶어두려는 흉계에 맞서서 싸우기 위해 일어나야 할 때다.
(116)
그런데 우리 말과 우리 글자를 쓰자고 하는 것은 취미가 아닌가?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이것은 다르다.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의 말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고, 우리
민족의 말을 적는 글자를 쓰자고 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밥을 같이 먹고 물을 같이 마시자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 말 우리 글은 우리가 먹는 밥이고 마시는 물이고 숨쉬는 공기와 같은 것이다.
(176)
왜 문인들의 글이 잘못되었는가? 삶이 없이, 방 안에서 글만 쓰기 때문이다. 책만 일고 글을 쓰니 그 글이 살아
있는 지식으로, 책에서 읽은 이론으로, 방에 앉아 떠올리는
생각만으로 글을 쓰니 그 글이 저절로 글에서만 쓰는 말로 될 수밖에 없다. 글로만 쓰는 말은 거의 모두
우리 말이 아니다. 어려운 한자말이거나 일본말, 일본말법이거나
서양말, 서양말법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런 잘못된 문인들의
글은 시인이란 사람들이 쓰는 시와 평론가들이 쓰는 글에서 가장 심하게 나타나고, 소설이 그다음이고, 그래도 좀 낫다는 아동문학과 수필조차 아주 깨끗한 우리 말로 쓴 작품은 거의 없다.
(240)
바로 며칠 전에 어느 일간신문에서, <애국가> 노랫말을 지은 사람이 윤치호란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신문은 윤치호가 자신이 지은 <애국가>를 손수
붓으로 써서 “윤치호 작사”라 해놓은 것을 사진으로 공해했다. 이래서 지금까지 누가 지었는지 확실히 몰랐던 <애국가> 작사가가 윤치호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윤치호라면 세상이 다 아는 친일파로 우리 민족을 배반한 사람이다. 우리가
얼마나 부를 노래가 없어서 하필이면 민족을 팔아먹은 반역자가 지은 노래를 의식 때마다 불러야 하나? 지금까지는
몰라서 불렀지만, 그 사실을 안 다음에는 부를 수가 없다. 그런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내 감정과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281)
아무튼 밖에서 들어오는 말을 모조리 다 버리고 순 우리 말만 쓸 수가 없는 것은 옛날에도 그랬지만 더구나 요즘은
그러하다. 어떤 이가 무슨 말이든 다 우리 말로만 쓰기를 고집해서 어설픈 말을 만들어내거나 일반 사람들도
모르는 옛말을 쓰는데, 이런 사람은 우리 말을 살리는 일에 도움이 조금도 안 된다. 남들이 쓰지 않는 말을 나는 이렇게 쓰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고,
뒤집어보면 어려운 외국말을 써서 가지가 유식함을 자랑하는 것과 똑 같은 심리에서 그렇게 한다고 볼 수 있다. ‘도로’를 ‘길’이라 하고, ‘차로’는
‘찻길’이라 하고, ‘계곡’을 ‘골짜기’라 하는 것은
옳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앉는 ‘걸상’을, ‘의자’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비행기를 ‘날틀’이라거나 학교를 ‘배움집’이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303)
사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글쓰기로 이뤄져 있고, 글로
움직이는 글 세상이 되어 있다. 헌법을 비롯한 모든 법이 글로 되어 있고,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 글로 적혀서 그 표적을 남긴다. 관공서의
모든 일이 글로 시행되고, 모든 정보가 글이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글이다. 학문이 글이고, 문학도 바로
글이다. 모든 종교의 경전과 교리가 역시 글이다. 언론은
말인데, 말이 곧 글이다. 옛날에는 글이 말을 따랐지만 이제는
거꾸로 말이 글에 끌려나는 판이 되었다. 세상에 글 아닌 것이 없고,
글이 전부다 .그래서 글이 잘못되고 글이 병들면 모든 자리가 잘못되고 병드는 것이다. 글은 바로 쓴다는 것은 모든 자리에서 그 맡은 일은 올바르게 하는 것이 된다.
감사원에서 감사문장을 바로 쓴다는 것이 감사라는 일을 올바르게 하는 일로 되는 까닭이 이러하다. 글을
바로 쓰는 일이 나라를 바로 세우고 사회를 바로잡는 가장 으뜸가는 일, 밑뿌리가 되는 까닭이 이러하다.
(310)
방송인들이여, 책에서 말을 배우려고 하지 말라! 학생들이여, 제발 방송을 멀리하라!
책도 보기는 해야 하겠지만 그 속에 빠져버리지는 말라!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데, 내가
알기로는 책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책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글(책)이 말을 잡아먹고 사람을 집어삼키는 것이 아주 엄연한 현실이다! 말은
언제나 삶 속에, 자연과 어울린 삶 속에 있는 것이다.
쉬운 말 하는 사람은 마음도 고와요!
(386)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생각, 잣대는 결국 삶에서 얻을 수밖에 없다. 물론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 것은 참고가 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삶을 키워가는 데 참고로 삼아야
하는 것이지 그것만 따라가려 하고 거기에 기대어서는 그만 자기 것을 잃어버린다. 삶, 그것만이 사람을 사람으로 되게 하고,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 되게
하는 길이다. 이래서 삶을 가꾸는 글쓰기는 아이들을 참되게 키우는 교육에 될 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다시 더없이 소중한 것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387)
사람이나 문학을 보고 생각하는 바탕을 저울이나 잣대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람의 눈이나 생각의 잣대(저울)과 실제 어떤 물건을 재고
다는 잣대와 저울이 다른 점은, 물건을 재고 달고 하는 자나 저울은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것들이 아주
기계처럼 똑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하지만, 사람의 삶에서 나온 생각의 잣대나 저울은 사람마다 다른 체질과
삶과 세상 탐구에서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마다 다른 개성이 있고 나타내는 모양이 다르다. 그러면서 사람마다 가진 그 생각이 반드시 충돌하거나 어긋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착하고 올바른 것이면 그럴수록 서로 어울리고 서로 채워주는 것으로 되고, 그래서 모두가 공감하는 것으로
된다고 보아야 옳다. 문학에서 글쓰기 공부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착하고 올바른 좋은 생각,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잣대를 얻기 위한 삶을 가꾸는 것이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451)
이 진검승부(眞劍勝負)란
말은 일본어사건이나 일본 역사책을 찾아볼 것도 없이 그 옛날 일본의 무사(사무라이)들이 서로 원수가 되었을 때, 마치 서양사람들이 권총으로 서로 쏘아
죽이는 판을 벌이듯이 진짜 일본칼로 마주서서 사생결단을 내던 야만스런 풍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째서 이런 말이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자꾸 쓰이는지
참으로 어이가 없다.
(471)
본래 일본말에는 우리 말에서 받침에 해당되는 말소리가 없어서 부드럽고 곱기만 하지 힘찬 소리를 낼 수 없다. 그래서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힘차게 내세우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매김씨(관형사)로 만드는 토씨(조사) ‘노’(の)만을 자꾸 써서 이름씨(명사)를 줄줄이 꿰어놓자니 답답할밖에 없다 .이러던 터에 –적(的)이란 말이 나오니까
이 말소리 ‘테끼’ ‘테키’가
힘찬 받침소리가 효과가 나서 ' の’ 대신에 이 말은 너도나도
하고 다투어 쓰게 되었다. 그러니까 일본사람들이 이 ‘테키’(的)란 말이 자기들 말에서 모자란 점을 채워주는 말로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말에는 예사소리와 된소리, 열린소리와 닫힌소리, 부드러운 소리와 힘찬소리가 고루 있기 때문에 조금도 이런 말을 꾸어다가 쓸 필요가 없다. 이런 말을 쓰면 도리어 우리 말에서 닫힌소리나 거친소리가 더 많아져서 말이 사납게 되고 어설프게 되고 만다.
(513-514)
이 축제란 말은 일본말이고 일본사람들이 하는 행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사람들은
‘마쓰리’(祭り)라고
하여,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신령을 맞아들여
음식물을 차려 위로하고 비는 한편으로 노래하고 춤추면서 떠들썩한 판을 벌인다. 그래서 무엇을 축하하거나
기념하거나 선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행사를 가리킬 때도 ‘마쓰리’ ‘오마쓰리’라 하고, ‘祝祭’란 말도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일본말 사전>에도 ‘祝祭’를 “축하하고 제사하는 것” “축하는 제가”라고 풀이해 놓았다. 그런데 우리는 제사를 지낼 때 조용하고 엄숙한
마음과 태도로 지내는 것이지, 노래하고 떠들고 춤추는 일은 없다. 노래하고
떠들고 춤추는 것은 굿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하거나 춤추거나 잔치판을 벌리는 것을
일본사람들이 하는 말을 따라 축제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되었고, 얼빠진 짓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말 사전>에도 축제란 말을 올려놓고 “축하의 제전” “축하하고 제사지냄”이라
풀이해놓았으니 한심한 일이다.
(601)
‘부른다’를 입음꼴(피동형)로 만들어놓은 “불린다”란 말은 “경찰서에 불려갔다.” “어느
학생이 교무실에 불려 갔다”고 할 때 말고는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 말로 바르게 쓰는 말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글을 쓰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예사로 쓰고 있다. 다음에
들어놓은 보기글은 좀 양이 많은데, 우리 말과 글이 얼마나 많이 오염되어 있는가를 알리고 싶었고, 또 혹시 어쩌다가 ‘이런 글에서는 이대로 써야 하지 않겠나’ 싶은 경우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싶어 눈에 띄는 대로 적어놓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