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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 2 - 문종에서 연산군까지 ㅣ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2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 민음사 / 2015년 1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역사저널 그날 2권을 읽었단다. 1권과 마찬가지로
쉽게 재미있게 역사를 이야기해주었단다.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을 검색해보니, 그냥 역사저널 그날 2권이 아니라,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2권으로 조회가 되더구나. 책의
표지에는 조선편이라는 말이 적혀 있지 않은데 말이야. 책의 제목이 바뀐 이유는 바로 역사저널 고려편도
출간되었기 때문이더구나. 그래서 구분하기 위해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이라고 제목이 바뀐 것 같구나. 조선편은 총 여덟 권으로 마무리가 되었더구나.
천천히 읽어봐야겠구나. 아주 깊거나 자세히는 아니지만, 조선의
역사를 꿰뚫어볼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번에 읽은 2권에서는
문종부터 연산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단다. 그 시절에는 역사의 흐름을 갈랐던 역사적인 날들은 어떤
날이 있었는지 한번 이야기해줄게.
1.
조선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시대의 가장 큰 사건은 세조가 조카를 몰아내고
왕자리를 빼앗은 사건이라는 것을 알 거야. 그 전에 문종부터 이야기해보자꾸나. 세종의 아들로 조선 왕조에서 첫 번째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왕. 그의
재위기간이 짧아서 그를 거의 지나지듯 기록을 하곤 하는데, 그가 세자 자리에 있을 때 많은 공을 세웠다고
하는구나. 문종의 재위기간은 짧았지만, 세자로서의 기간은 29년으로 무척 길었어. 그 중에
8년은 섭정을 했다고 하는구나. 세종의 재임 후반기의 공적들의 많은 부분이 문종의 공이라고
하더구나. 모든 면에서 우수해서 세종의 뒤를 이은 성군이 될 자질이 충분했기에 그의 짧은 삶은 조선에게
큰 손해가 아닐 수 없구나. 아내 복도 없었는지 두 번의 세자빈 폐위가 있었고, 세 번째 세자빈은 아이를 낳고 다음날 그만 죽고 말았단다. 그 아이가
바로 단종이란다.
세종이 죽고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3개월, 그의 나이 39세에 그만 죽고 말았단다. 문종은 어머니 소헌왕후와 아버지 세종이 잇달아 죽으면서, 삼년상을
연달아 치르게 된단다. 그러면서 몸이 많이 쇠약해지고, 종기가
나서 죽고 말았대. 옛날에는 종기로도 사람이 죽을 수 있었다고 하는구나. 문종은 죽으면서 신하들에게 12살 단종을 부탁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하는구나. 세 번째 세자빈이 죽고 나서 부인을 새로 들였다면, 그
부인이 수렴청정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문종은 세 번째 세자빈이 죽은 이후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구나.
12살 단종은 고아가 된 거야. 그 고아를 신하에게 부탁을 하고 눈을 감은 거야. 그 신하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김종서였어. 아,,, 신하가 아닌 동생한테
부탁을 했어야지. 아니면 아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왕을 동생에게 주었어야지. 동생 수양대군이 호랑이 발톱을 숨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수양대군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가족에도 칼부림을 한다는 이유로, 태종을 닮았다고 하는 이들이 많단다. 수양대군이 처음에는 단종을 도와주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어. 그것이
진심인지, 연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런데 김종서와
갈등을 겪게 되고… 결국은 1453년 10월 10일 칼을 꺼내 들었단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난’이라는 글자가 있어서 수양대군이 일으킨 난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난’는 난리의 ‘난(亂)’아니고 어려움을 나타내는 난(難)이란다. 그러니까 계유정난이라는 것은 계유년에 어려움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고 하잖아. 수양대군이 승자가 되었으니, 그의 입장에서 그날을 기록한 것이야. 그냥 수양대군은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단다. 단종이 왕위에 오른 지 20개월째였지. 말이 양위지,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이 왕이 되었단다. 세조.
단종은 영월의 청룡도로 유배를 보냈단다. 아빠도 청룡도를 가본 적이 있는데, 한쪽은 절벽이고 나머지 세면은 물로 둘러 쌓여 있었단다. 하루 이틀
여행지로는 좋은 곳이지만 그곳은 영락없이 감옥이었어. 유교의 교리를 거스르는 세조의 이런 왕위 찬탈
사건을 곱게 보지 않는 시선도 많았단다. 그래서 단종복위운동이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었어. 집현전 학자로 유명한 성상문, 박팽년, 유응부 등이 주도했어. 그러나 내부 밀고로 인해 그들의 계획은 실패하고
죽고 말았단다. 사육신.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박팽년, 김문기. 단종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단다. 죽이고 싶었겠지. 건수가 없었는데
잘 됐다 싶었겠지. 세조는 조카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단다. 단종은
자살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세조가 죽인 것이야. 단종
복위 운동에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 금성대군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고 하는구나. 이
또한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란다.
….
이렇게 무서운 과정을 거친 후 왕위에 오른 세조. 분발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세조는 왕노릇은 잘했다고 하는구나. 우선 왕권 강화를 힘썼대. 신하들의 힘의 기반이었던 집현전을 폐쇄했어. 호패제도를 정비해서
세수를 확보하기도 했어. 그리고 조선시대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했어. 비록 그의 재위기간에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큰 업적이었어. 세조가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명분이 없는 왕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기에 신하들에게 잘 보여야 했어. 그러기
위해서 공신 책봉을 연이어서 했다는 구나. 참모였던 한명회와 배신의 아이콘 신숙주는 4번이나 공신에 책봉되었대. 한명회가 시를 쓰고 그것을 패러디한 김시습의
글이 책에 실려 있었는데, 생육신 김시습의 면목을 볼 수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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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노년에 한명회가 이런
시를 남긴다고요.
청춘에는 사직을 붙들고, (靑春扶社稷)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白首臥江湖)
이게 압구정에서 지은
시예요.
한명회가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는 건데, 김시습이 이걸 보고 재치있게 패러디를 해요.
청춘에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靑春亡社稷)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 (白首汚江湖)
중간에 글자 하나를 바꿔서
한명회를 비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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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세종은 공신들을 백 퍼센트 믿을 수는 없었어. 이시애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이야기에 한명회와
신숙주를 하옥시키기도 했어. 이시애의 난은 남이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 공으로 남이 장군은 20대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가 되었어. 세조가 계속 왕위에 있었다면 남이 장군은 승승장구를 했을지 모르겠지만, 남이
장군은 병조판서가 된지 15일만에 세조는 죽고 말았단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 유자광이라는 간신의 고변에 속아서 남이 장군을 좌천시키고, 누명을 씌워 죽였단다. 역사는 이렇게 비극적인 사건들이 참 많구나.
2.
세조의 이야기가 길어졌구나. 사실 단종과 세조의 이야기는 아빠가 예전에 다른 책들을 읽고 나서
쓴 독서편지나 독서일기에서도 두어 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단다. 세조 이후 이어지는 성종과 연산군의
이야기도 전에 여러 번 이야기를 했었어. 그래서 아주 짧게 하고 마치려고 한단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즉위 14개월만에 죽고, 13살
성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단다. 또다시 어린 왕의 즉위. 또다시
왕위 찬탈 사건이 일어나는 것인가. 하지만 성종에게는 할머니 정희왕후가 있었단다. 그리고 인수대비로 유명한 어머니 소혜왕후도 있었단다. 잠깐 가족
소개를 해보겠다. 세조와 정비인 정희왕후의 첫째 아들은 의경세자였고,
의경세자의 아내가 세자빈 수빈 한씨였단다. 그런데 의경세자가 아들 둘을 남기고 일찍 죽고
말았고, 의경세자 동생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란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만에
죽고 말았어. 다시 빈 왕의 자리…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잘산군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성종이란다. 성종이 왕에 오르자, 사가로
물러났던 수빈 한씨가 왕의 어머니로 궁궐로 돌아왔고 인수대비가 된 거야. 복잡하구나.
성종이 오랜 재위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경국대전을 완성하는 등 여러 업적이 있었지만, 그것보다
여자 문제로 더 유명하고 드라마에도 많이 나온단다. 첫 왕비였던 공혜왕후가 죽고 후궁이었던 숙의 윤씨를
왕비로 간택하지만, 나중에 질투와 여러 문제를 일으키면서 폐비가 되고 결국 사약까지 받아 죽고 말았지. 그리고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드라마는 비극으로
이어진단다. 연산군의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고, 아빠가 전에도
한 적이 있어서 오늘은 생략할게. 무엇보다 너무 피곤하구나. 양해
바람.
…
아참, 그것만 하나 더 이야기할게. 이 책에 왕릉
특집으로 왕릉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어. 세종이 여주라는 곳에 있거든.
영릉이라고… 그런데 원래는 서울에 있었다고 하더구나. 세종의
릉자리 때문에 장남들이 일찍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여주로 옮긴 거이라고 하는구나. 재미있는
일화인 것 같아 적어두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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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1450년, 세종이 승하했다.
맏아들 문종은 유언에
따라 왕릉 조성에 들어간다.
세종 생존에 마련해 두었던
장지는 태종이 잠들어 있는
헌릉 근처, 그런데 그 터를 두고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장남을 잃을 땅이라는
것이다.
최양선이 수릉의 혈 자리가 좋지 못해
‘손이 끊어지고 맏아들을 잃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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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25년 2월 2일
풍수가들의 예언은 세종의
장남 문종의 죽음을
시작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문종의 외아들이었던 단종마저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고 단종을 밀어내고
왕이 된 세조 역시
맏아들 의경세자를 잃고
마는데……
왕실의 대를 이을 장남들의
잇따른 죽음,
결국 세종의 영릉은 여주
지역으로 옮겨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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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 문종은 조선왕조가 시작된 뒤 적장자로 왕위를 이은 첫 국왕이다.
책의 끝 문장 :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조선 왕릉, 오늘 이 시간 함께 하셨다면
좀 더 넓어진 시각으로 근처에 있는 조선 왕릉 한 번 찾아보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명회 하면 과거에도 계속 떨어지고, 칠삭둥이에 못생긴 이미지가 보편적이잖아요. 사실 한명회는 명문가의 후손입니다. 청주 한씨 집안의 귀공자였죠. 그래서 어릴 때부터 명문가 자제들하고 놀죠. 가장 친한 친구인 권람은 안동 권씨고, 친구들이 전부 대표적인 개국공신 집안 출신이에요. 한명회는 이렇게 집안 배경도 좋고, 머리도 좋은데 과거시험만 봤다 하면 자꾸 떨어졌대요. 아마 필기시험에 약한 타입이었나 봐요.
…
그때 또 재미난 일화가 있어요. 한명회가 개성에서 경덕궁지기를 할 적에, 명절이라 개성부 관원들이 만월대에서 연회를 하다가 개성으로 파견된 서울 출신 관원들끼리 계를 만들자는 얘기가 나와요. 이때 한명회가 자기가 끼워 달라고 하는데, 궁궐지기는 좀 미천하니까 무시한 거죠. 그런데 계유정난 후에 한명회가 일등 공신에 책봉되고 계속 출세하니까 이 사람들은 아쉬운 거예요. 그때부터 하찮은 지위나 세력을 믿고 남한테 오만하게 구는 사람들을 송도계원이라고 불렀대요. - P118
어우동이 여러 사람과 간통한 혐의가 있기는 했지만, 간통죄로 사형시키는 건 법규에 없어요. 그런데 성종의 강력한 의지로 어우동을 교형에 처하죠. 이때가 바로 인수대비가 <내훈>을 쓰고 성리학적인 이데올로기로 나라를 만들어가던 바로 그때입니다. 따라서 어우동처럼 방탕한 여성은 죽음으로 일벌백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절묘하게도 어우동이 처형당한 게 1480년이고, 폐비 윤씨가 사약 받은 게 1482년이에요. 시기가 맞물려 있습니다. 결국 성리학 이념이 강화되고 여성다운 여성의 기준을 세우는 과정에서 왕실에서 희생된 사람이 폐비 윤씨였다면, 민간의 희생양은 어우동이었다는 거죠. - P187
그 사초의 작성자가 김일손이고,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게 <조의제문>이에요. 이 부분에서 많이들 실수하는데 조, 의제문 이렇게 띄어 읽어야 해요. 어쨌거나 의제는 부하 항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사람이에요. 세조를 대놓고 비판하지는 못하니까 주군을 죽인 항우 사례를 빗대서 단종을 죽인 세조를 은근히 비판한 거죠. 그게 <조의제문>인데 김일손이 이 글을 사초에 실은 거예요. 세조에 대한 강한 반감의 표시였죠. 결국 이게 공개되고 연산군이 이를 왕에 대한 모독이라고 받아들이면서 사초 작성자인 김일손 비롯한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됩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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