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흥미로운 것은 헌종 대의 증축이 마치 왕조의 마지막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의 종말과 함께 정전과 영녕전의 신실이 모두 채워지고 더 이상의 빈 공간이 없어졌다. 정전의 마지막 신실인 제19실에는 순종을 모셨고, 영녕전의 마지막 칸에는 영친왕을 모시면서 16개 신실이 다 찼다. 그러고는 더 모실 신위도 빈 신실도 없었으니 왕조의 종말은 거의 운명적인 것이었다.


(53-54)

종묘는 봄여름보다 가을 겨울이 더 좋다. 종묘의 단풍은 울긋불긋 요란스레 화려한 것이 아니라, 참나무 느티나무의 황갈색이 주조를 이룬 가운데 노란 은행나무와 빨간 단풍나무가 점점이 어우러져 가을날의 차분한 청취가 은은히 젖어들게 한다. 그때 종묘에 가면 아마도 인생의 황혼 녘에 찾아오는 처연한 미학을 느끼게 될 것이며, 그렇게 늙을 수만 있다면 잘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은 그런 가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뒷산 너머에 있는 창덕궁 후원의 단풍이 화이불치(華而不侈,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고 한다면 종묘의 단풍은 검이불루(儉而不陋,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라 할 만하다.


(61-62)

이렇게 오랜 세월을 거쳐 완성된 <국조오례의>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길례는 조상과 대자연에 복을 기원하는 종요, 사직, 선농(先農), 선잠(先蠶), 기우(祈雨), 산천(山川)에 지내는 제례다. 가례는 기쁨의 의식으로 명절 의식, 왕비 책봉, 왕자와 공주의 혼례, 원로대신에 베푸는 양로잔치인 기로연(耆老宴) 등이며 흉례는 장례의식으로 국장(國葬)을 비롯한 상례(喪禮). 빈례는 외교 의식으로 중국, 일본, 유구(지금의 일본 오키나와) 등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의식이고 군례는 군대 의식으로 임금이 참석하는 활쏘기, 군대의 열병(閱兵), 무술 시범식이다.


(104)

돌이켜보건대 경복궁이 창건된 것은 태조 4(1395)이고 창덕궁이 창건된 것은 태종 5(1405)이었다. 조선 개국 후 10년 사이에 전혀 다른 성격으로 지어진 두 궁궐은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비극의 소산이었지만 결국 우리 문화유산의 큰 자산이 되었다. 당시 이 엄청난 두 차례의 대역사(大役事)에 동원되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던 조상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신들의 희생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106-108)

창덕궁을 제대로 답사할 양이면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앞 월대(月臺)에서 시작해야 한다. 궁궐의 모든 주요 건물 앞에는 지표에서 높직이 올려쌓은 평편한 대가 있는데 이를 월대라 한다. 달 월() 자에 받침 대()자를 썼으니 그곳에 서면 달빛이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듯 하늘이 열린다는 뜻일 것이다. 언어의 묘미가 물씬 풍기는데 중국에서는 기차역 플랫폼을 월대라 부른다.


(138)

건축의 눈이 밝지 않은 분이라도 여기서 바라보면 한옥의 다양한 아름다움과 멋을 한눈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임금이 정무를 보는 선정전은 엄숙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희정당은 우아하면서도 화려하고, 왕세자의 공간인 성정각은 밝고 안온해 보인다. 전통 한옥의 모든 것이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163)

건축적으로 대조전은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건축 형식을 무량각(無樑閣)이라고 하는데 궁궐 건축에서만 보인다. 확실한 예기는 아니지만 임금이 머무는 대조전에 용마루가 없는 것은 임금이 곧 용이기 때문에 두 용이 부딪치지 않도록 한 것이라는 속설이 있다.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창경궁의 통명전 등 왕과 왕비의 생활과 관련된 건물이 대개 무량각인 것을 보면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그 형식이 구중궁궐 안에서도 지밀한 건물임을 도드라지게 한다는 것이다.


(218)

이에 대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랑스 건축가협회장 로랑 살로몽(파리 벨빌 건축학교 교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전통 건축물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자연이고 풍경이다. 인위적이로 세운 것이 아니라 자연 위에 그냥 얹혀 있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전통 건축은 미학적 완성도가 아주 높다고 생각한다.”


(230)

우리나라 정원에서 건물은 마치 자연이라는 거실에 배치된 가구 같아서 건물이 있음으로 해서 경관이 생기고 건물의 크고 작음에 따라 다양한 표정이 만들어진다. 부용지를 거실이라고 치면 연못은 폭넓은 화문석(花紋席) 같고, 규장각 주합루는 듬직한 반닫이와 기품 있는 의걸이장 같고, 부용정 정자는 화려한 화초장(花草欌) 같고, 영화당은 단아한 서안(書案) 같고, 비각은 곱상한 연상(硯床) 같다.


(262)

서양인은 한결같이 인간적 체취를 말한다. 가는 곳마다 지금도 사람이 살면서 사용하는 것 같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을 경험하고 온 분들은 한국의 미학이 따로 있음을 창덕궁 후원에서 비로소 느낄 수 있다며 이곳 하나를 본 것만으로 이번 방문에 만족한다고 한다. 이런 창덕궁 후원을 곁에 두고 사는 것은 진정 서울 사람의 복이자 큰 자산이다.

후원의 관람 코스는 낙선재 옆 출입구에서 시작하여 부용정, 애련정, 존덕정, 옥류천, 연경당을 두로 관람하고 규장각 위쪽 산길로 해서 출구로 돌아나가는 한 시간 반 정도의 즐거운 산책이 된다. 나의 창덕궁 후원답사기는 앞으로 찾아올 분들을 위해 이 코스대로 따라가겠다.


(299-301)

나는 물과 달을 보고서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를 깨우친 바 있다. 달은 하나뿐이고 물의 숫자는 1만 개나 되지만 물이 달빛을 받을 경우, 앞의 시내에도 달이요, 뒷 시내에도 달이어서 달과 시내의 수가 같게 되므로 시냇물이 1만 개면 달 역시 1만 개가 된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달은 물로 하나뿐이다.

내가 많은 사람을 겪어보았는데 아침에 들어왔다가 저녁에 나가고 무리 지어 쫓아다니며 가는 것인지 오는 것인지 모르는 자도 있었다. 모양이 얼굴빛과 다르고 눈이 마음과 다른 자가 있는가 하면 트인 자, 막힌 자, 강한 자, 유한 자, 바보같이 어리석은 자, 소견이 좁고 얕은 자, 용감한 자, 겹이 많은 자, 현명한 자, 교활한 자, 뜻만 높고 실행이 따르지 않는 자, 생각은 부족하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하는 자, 모난 자, 원만한 자, 활달한 자, 대범하고 무게가 있는 자, 말을 아끼는 자, 말재주를 부리는 자, 엄하고 드센 자, 멀리 밖으로만 도는 자, 명예를 좋아하는 자, 실속에만 주력하는 자 등등 그 유형을 나누자면 천 가지 백 가지일 것이다.”

처음 이 글을 읽을 때 나는 가슴에 찔리는 바가 있었다. 윗사람에게 나는 어떤 유형의 인간이었던가 생각하니 아차 싶었다. 그러나 정조는 이 모두를 끌어안는 너그러움을 말한다.

내가 처음에는 그들 모두를 내 마음으로 미루어도 보고 일부러 믿어도 보고, 또 그의 재능의 시험해보기도 하고 일을 맡겨 단련도 시켜 보고, 혹은 흥기시키고 혹은 진작시키고 규제하여 바르게도 하고, 굽은 자는 교정하여 바로잡고 곧게 하면서 그 숱한 과정에 피곤함을 느껴온 지 어언 20여 년이 되었다.

근래 와서 다행히도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고 또 사람은 각자 생김새대로 이용해야 한다는 이치도 터득했다. 그리하여 대들보감은 대들보로 기둥감은 기둥으로 쓰고, 오리는 오리대로 학은 학대로 살게 하여 그 천태만상을 나는 그에 맞추어 필요한 데 쓴 것이다. 그의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하고, 선한 점은 드러내고 나쁜 점은 숨겨주며, 잘한 것은 안착시키고 잘못한 것은 뒷전으로 하며, 규모가 큰 자는 진출시키고 협소한 자는 포용하고, 재주보다는 뜻을 더 중히 여겨 양쪽 끝을 잡고 거기에서 가운데를 택했다.”


(301~303)

이어서 정조는 신하들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에 대하여 말했다.

트인 자를 대할 때는 규모가 크면서도 주밀한 방법을 이용하고 막힌 자는 여유를 두고 너그럽게 대하며, 강한 자는 유하게 유한 자는 강하게 대하고, 바보 같은 자는 밝게 어리석은 자는 조리 있게 대하며, 소견이 좁은 자는 넓게 얕은 자는 깊게 대한다. 용감한 자에게는 방패와 도끼를 쓰고 겁이 많은 자에게는 창과 갑옷을 쓰며, 총명한 자는 차분하게 교활한 자는 강직하게 대하는 것이다.

술에 취하게 하는 것은 뜻만 높고 실행이 따르지 않는 자를 대하는 방법이고, 희석하지 않은 순주(醇酒)를 마시게 하는 것은 생각은 부족하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하는 자를 대하는 방법이며, 모난 자는 둥글게 원만한 자는 모나게 대하고, 활달한 자에게는 나의 깊이 있는 면을 보여주고 대범하게 무게가 있는 자에게는 나의 온화한 면을 보여준다. 말을 아끼는 자는 실천에 더욱 노력하도록 하고 말재주를 부리는 자는 되도록 종적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며, 엄하고 드센 자는 산과 못처럼 포용성 있게 제어하고 멀리 밖으로만 도는 자는 포근하게 감싸주며, 명예를 좋아하는 자는 내실을 기하도록 권하고 실속만 차리는 자는 달관하도록 면려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조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어 말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일이다. 비유하자면 달이 물속에 있어도 하늘에 있는 달은 그대로 밝은 것과 같다. 달은 각기 그 형태에 따라 비춰줄 뿐이다.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 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 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친다. 거기에서 나는 물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달이 비춰 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 각자의 얼굴이고 달은 태극인데 그 태극은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이 만천(萬川)의 밝은 달에 태극의 신비한 작용을 비유하여 말한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내가 머무는 처소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서 나의 호로 삼기로 한 것이다. 때는 무오면(1798) 12 3일이다.”


(306)

어디까지가 권력기관입니까?

윗분이 말씀하시는데 말을 끊는 것은 예가 아니었지만 노 대통령은 나를 불경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체 없이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국정원, 검찰청, 경찰청, 국세청, 그리고 언론기관입니다. 쉽게 말해서 전화 와서 받았는데 기분 나쁘면 다 권력기관입니다.”


(331-332)

세종은 즉위하면서 상왕으로 물러난 아버지 태종을 모시기 위해 1418년 창덕궁 곁에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이것이 창경궁의 시작이다. 그뒤 성종은 무려 세 분의 대비를 모시게 되었다. 할머니인 세조 비(정희왕후 윤씨), 작은어머니인 예종 계비(안순왕후 한씨), 생어머니인 덕종 비(소혜왕후 한씨) 등이다.

이에 성종은 수강궁을 중건하고 정전인 명정전, 정무를 보는 문정전 등을 지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고 창경궁이라 했다. 창경궁은 빛나는 경사라는 뜻이며 궁의 둘레가 4,325척이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담장을 맞대고 있어 둘을 합쳐서 동궐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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