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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 인간 이봉창 이야기
배경식 지음 / 너머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궁금해하는 독립 운동가 중에 이봉창이라는 분이 있단다. 천황을 노리고 폭탄을 던졌지만, 불발로 그쳐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했던
이. 그가 했던 일은 그것 하나뿐이었단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 궁금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여러 책에서 단편적으로 보았던 그의 호방한 모습 때문이었어. 특히 김구의 백범일지에 적혀 있는 김구와 이봉창의 일화는 가슴 뭉클하게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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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먹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데 그 청년이 이런 소리를 하였다.
"당신네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안 죽이오?"
이 말에 어떤 민단 사무원이,
"일개 문관이나 무관 하나도 죽이기가 어려운데 천황을
어떻게 죽이오?"
한즉, 그 청년은,
"내가 작년에 천황이 능행을 하는 것을 길가에 엎드려서 보았는데,
그때에는 나는 지금 내 손에 폭발탄 1개만 있었으면
천황을 죽이겠다고
생각하였소"
하였다.
나는 그날 밤에 이봉창을 그 여관으로 찾았다.
그는 상해에 온 뜻을 이렇게 말하였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늙겠으니까요.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은
대강 맛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 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씨의 이 말에 내 눈에는 눈물이 찼다.
- 김구 <백범일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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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이봉창에 대한 책을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 이봉창에 관한 책 두 권을
사두었다가 이번에 그 중에 한 권을 읽었단다.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부제 <인간
이봉창 이야기>를 보지 않고, 제목만 보았다면 어떤
일본인이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야기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왜 지은이는 제목을
그렇게 지을 수 밖에 없었을까. 그 이야기를 해줄게
1.
독립운동가들의 전기를 보다 보면, 가끔 독립운동가를 미화하여 영웅시하는 경우가 있곤 한단다. 잘 한 것에 대해 좀 과장되게 이야기하는 것을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은이 배경식님은 좀더 정확한 사실에 입각해서 써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셨어. 이 책을 출간하기 전까지 나온 이봉창의 전기들이 이봉창에 대해 좀 미화를 한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시면서, 좀더 사실에 근거해서 쓰셨다고 했어. 그렇다고 이봉창의 업적을 깎으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인간 이봉창에 대해 솔직하게 써서 이봉창에 대해 더 정확히 알리고 그의 인간적인 고뇌도
함께 느끼게 해주려는 것은 아니었나 싶구나.
여러 책들을 참고를 했는데, 이봉창의 옥중수기 <상신서>도 참고했다고 했어. 이 책의 뒷부분에 이봉창의 옥중수기 <상신서>도 실려 있어서 같이 읽어서 좋았단다. 그런데 문득 아빠는 그런 생각을 했단다. 일본 경찰들이 강제로 수기를
거짓으로, 그러니까 이봉창의 삶을 안 좋게 쓰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말이야.
책제목에 나와 있는 ‘기노시타 쇼조’는 이봉창의
일본식 이름이란다. 왜 그는 일본식 이름을 썼을까.
…
1900년 용산에 태어난 이봉창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하여 부유하게 살기도 했지만, 이봉창의 아버지는 일본인들에게 사기를 당하고 집을
나갔어. 그래서 남은 가족들은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했어. 이봉창은
돈 벌 궁리를 하면서도 모던보이를 꿈꾸었던 사람이었어. 식민지를 사는 스무 살의 젊은이라면, 독립 운동에 관심을 가질 만도 하지만, 이봉창은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대. 그가
관심 있는 것은 돈이었어.
이봉창은 인구센서스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는데, 이 직업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 조선총독부로부터 신분을 보장 받은 이들만 할 수 있는 직업이었던 것이지. 하지만 조선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는 차별을 받았어. 승진이나 임금
모두 차별을 받았지. 누군가로부터 일본에 가면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일본으로 향했단다.
2.
일본에 건너간 그는 기노시타 쇼조라는 이름으로 일했어. 정말 임금을 많이 주었어. 그런데, 두 번째 임금은 처음보다 적게 주는 것이었어. 알고 보니, 처음에는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많은 돈을
주었다는 거야. 일본에서도 차별을 받았어. 일본에서 5년 동안 살았는데, 그 5년
동안의 생활에서 그가 얻은 것은 그에게도 뜨거운 심장이 있다는 사실. 조선 독립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조선이 독립을 되면 차별 받지 않는 세상에서 능력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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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그때의 심정을 이봉창은 <상신서>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때부터 나도 직장일이나 생활이 점점 타락으로 치달아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상도 저절로 변해 어떤 사상 운동에 몸과 마음을 던지기로 마음먹고
기회를 엿봤으나 좋은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때의 사상은 특별히 정한 사상은 없었다. 무엇이든 좋다. 누군가 끌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갈 기분이었다. 그후 다시금 생각하게 돼 나는 조선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선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우리 2천만 동포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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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어.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일본을
떠나 중국 상해로 갔단다. 그곳에서 김구를 만났고, 의거의
뜻을 전했단다. 김구도 임시정부의 영향력이 쇠퇴하여 반전의 카드를 도모하고 있던 시기에, 이봉창과 같은 이를 만나 기뻐했단다. 이봉창은 김구의 비밀 조직
한인애국단에 가입을 하고 김구는 의거의 성공을 위해 이봉창의 계획을 비밀로 했어. 그렇다 보니, 임시정부의 다른 요인들은 이봉창을 무시하고 ‘왜영감’이라는 모욕적인 별명까지 붙였어. 그렇게 일년을 준비하고, 드디어 일본을 다시 향했단다.
3.
지은이는, 이봉창이 상해를 떠나 도쿄에 도착해서 거사를 치르기까지 20일간의 이야기를 상세히 이야기해주었단다. 그 사이에 술도 마시고
유곽에서 유흥을 즐긴 이야기도 해주었어. 이봉창의 감정이입을 해보기로 했어. 이 의거가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을
거야. 의거에 대한 준비도 혼자 준비해야 했어. 상해에서
김구가 돈을 지원해 주었지만, 적지에서는 혼자 준비해야 했어. 아, 외롭지 않았을까?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의지가 흔들리지 않았을까.
그는 모던보이를 꿈꾸던 이답게 모던보이의 생활을 하면서 의거를 준비했다고 보면 돼. 일본 경찰들은
그런 이봉창의 겉모습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까 싶구나. 지은이는 이봉창이 폭탄 관리에 부주의해서 불발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아빠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단다.
이봉창 그도 걱정을 했을 거야. 폭탄이 불발이라도 되면 어쩔까 하고… 그 걱정은 현실이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업적을 과소평가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변절이 난무하고 친일파로 전향을 밥 먹듯 하던 그 시절에…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질 수 있는 강하고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있던 이봉창.
누가 그와 같은 삶을 살겠는가. 그는 결국 1932년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단다. 우리나라 나이로 쳐도 고작
33살.
….
그와 함께 한인애국단 소속이었던 윤봉길도 잇달아 의거를 일으켰어. 다행히 윤봉길의 의거는 성공했단다. 일본은 이봉창과 윤봉길의 배후가 누구인지 처음에는 파악하지 못했어. 김구가
스스로 자신이 배후라고 밝혔고, 쇠퇴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다시 한번 온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단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힘도 다시 갖추는 계기가 되었단다.
…
이봉창. 이 책을 통해 그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그의 짧은 삶을 함께 산 느낌이었단다. 그의 영화 같은 삶을 잘 연출해서 영화로 만들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러면
그에 대해 더 많은 이들이 알게 되지 않을까 싶구나. 이름만 알고 있는 그에 대해서 말이야…
PS:
책의 첫 문장 : 지금 우리는 두 장의 사진을 보고 있다.
책의 끝 문장 : 이옹의 말처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어머니와 동생 태준을 한 해에 한 번씩이라도 서로 만나봐야 죽은 다음에 만날 봉창에게도 이야깃거리가 있을 터인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봉창은 자신이 결코 일본인이 될 수 없는 조선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조선인임을 깨닫는 그 순간 이봉창은 일본인이 되어 어떻게 하든지 식민지 백성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나는 조선인이라는 것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조선에는 편지도 보내지 않았으며 또한 본명도 밝히지 않고 언제나 항상 일본이름을 쓰면서 어디에 가든 진짜 일본인 행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본명을 사용해서는 이 세상을 편안하고 태평스럽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언짢은 마음 참을 길이 없었고, 당당하게 본명을 쓰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 P109
그날 저녁 김구는 이봉창이 묵고 있는 여관을 찾아와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제 나이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하여도 과거 반생 동안 방랑생활에서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로 왔습니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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