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우리가 살고 있는 하나의 우주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과학자들이
우리의 피 같은 세금을 써가며 당장 써먹을 수도 없는 수많은 우주를 연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중 우주론이 오늘날의 과학이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문턱을 넘을 아이디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중
우주론은 막다른 길에 봉착한 현대 물리학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예를 들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통합 문제, 우주상수와 미세 조정의 문제, 양자
얽힘의 문제, 인플레이션 문제, 끈이론과 M이론 등 인간의 이성 안에서 모순을 일으키는 문제들을 설명하기 위한 큰 그림을 제공해준다.
(75)
0차원.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좌표축의 개수가 0인 세계. 여기에는 가로, 세로, 높이가
없고 시간의 차원도 없다. 이 세계는 시간과 무관한 그저 ‘점’의 세계다. 점의 수학적 정의는 ‘크기를
갖지 않는 최소의 단위’다. 이 모순되어 보이는 정의처럼, 0차원은 공간을 점유하지 않고 크기도 갖지 않지만 존재하는 세계다. 시간, 공간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만약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어떤 존재일까? 그는 아마도 세계 그 자체일 것이고, 그가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세계는
나다. 나는 세계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세계는 세계이고, 나는 나다.’
그는 세계와 자신을 분리하는 것에 무척이나 어색함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존재와 부재는 구분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78-79)
만약 지금의 수치와 달리 아주 작은 차이만 있었더라도 우리 우주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와 중성자는 그 질량이 이미 정확하게 밝혀져 있는데, 중성자가 양성자보다 조금 더 무겁다. 하지만, 그 차이는 매우 미세해서 고작 전자 2개 정도의 질량에 불과하다. 이 정도의 차이는 사실 너무도 미미하다. 그런데 이 미세한 차이가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차이를 만들었다. 더 무거운 중성자가 붕괴하며 양성자가 되는 방식으로 우리 우주의
모든 물질을 구성한 것이다. 만약 반대였다면 양성자가 약간 더 무거웠다면 양성자가 붕괴하여 중성자가
되는 방식으로 원자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종류의 물질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은하계와 태양계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며, 우주의 구조도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생명과 인간의 탄생이 불가능한 건 말할 것도 없다.
(103)
0부터 10^-43초. 10^-43이라는 숫자가 친숙하지 않으니 분수로 표현하면 위와 같다. 1 뒤에 0이 43개 붙는다. 왜
하필 이 시간을 우주의 첫 번째 시기로 말하는지 궁금할 수 있겠다. 이 시간은 플랑크 시간이라고 하는데, 물리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최소의 시간 단위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극단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우주가 탄생한 이후 플랑크 시대라고 한다. 사실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이 시기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우주의 네 가지 임인 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이 모두 통합되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류가 언제가 모든
것의 이론을 갖게 된다면, 아마도 이 시기에 대해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우주 크기는 10^-33cm 정도였다. 모든 것이 이 한 점에 뜨겁게 압축되어 있었다. 여기에 당신도, 나도, 이 책도, 의자도, 나무도, 그랜드캐니언도, 우주정거장도, 인간의 사유와 언어와 문화와 역사도 모두 함께 뭉쳐 있었따.
(111)
우주의 크기를 들여다볼 때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지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초월적 거대함 앞에서 내 일상의 사소함은 너무도 하찮게 느껴진다. 현대의
이르러서도 인류가 ‘신’을 놓지 못하는 철학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가치 때문이다. 이 거대한 세계를 창조한 신이 인간의
기원일 것이라는 상상의 나의 존재론적 하찮음을 해소해준다.
(229)
그렇다면 신이란 무엇인가? 크리슈나는 신의 본성에 대해 설명한다.
“나는 그대에게 자아의 신성(神聖)에 대해 설명하겠다. 나라는 존재는 고정된 틀을 갖지 않는다. 자아는 모든 것의 시작이고 중간이며 끝이다. 자아는 모든 존재의
탄생이고 시작이며, 끝이자 죽음이다. 자아는 영원하니 결코
태어난 적이 없고 결코 죽은 적이 없다. 자아는 모든 곳과 모든 사물 속에 존재하고 자기 속에 모든
만물이 존재한다. 자아 없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이란 움직이는 것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 그 어떤 것도
없다.”
(274)
노자는 이렇게 정리한다. 덕이 없는 사회에서는 인이 강조되고, 인이 없는 사회에서는 의가 강조되며, 의마저도 없는 사회에서는 예만
강조된다. 쉽게 말하면, 자기 내면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인자함이 중요시되고, 인자함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의리가 중요해지며, 의리가 사라진 사회에는 예절이 강요된다는 것이다.
(383)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무아설에 있다. 자아의
실체를 부정하는 세계관은 지금까지의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개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포함하는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는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을 상정하고, 고대 그리스부터 근대 합리주의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도 사유하는 존재로서 자아의 자기동일성을 강조하며, 특정 종교나 사상을 떠나서도 보통의 사람들에게 매우 상징적이고 친숙한 사고방식이 ‘내가 있다’는 전제이니 말이다.
(430)
플라톤은 우리의 머릿속에 혹은 영혼 속에 절대적이고 완벽한 이성적 개념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에 이렇게 이데아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영혼은 원래 이데아의 세계에 있었지만 육체를 갖고 이를 망각한 상태로 지상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를 상기론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지식은 현실의 경험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에 남아 있는 기억을 떠올림으로써 얻게 된다.
(479)
흔히 서양 사상은 두 가지 토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다. 헬레니즘은 그리스*로마의 정신을, 헤브라이즘은 <구약>성서의
세계관을 말한다. 헬레니즘은 서양 철학의 기원이 되었고, 헤브라이즘은
기독교의 기원이 되었다. 이것은 언뜻 대립하는 사상처럼 보인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적 철학과 절대자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신본주의적 종교, 하지만 대립하는
두 사상은 근원에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 그것은 이원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