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경험을 통해 스스로 가짜와 진짜를 알아보는 눈을 갖는 일은 어떤 조언보다 값지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자신의 판단력을 갖게 된 사람은 남을 의심하거나 절망하느라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 길에 이르는
과정을 섣부른 충고나 설익은 지혜로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 경험하지 않고 얻은 해답은 펼쳐지지 않은
날개와 같다. 삶의 문제는 삶으로 풀어야 한다.
(24-25)
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은 우리 안의
불순물을 태워 버린다. 만약 그 친구가 필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면 랑탕 트레킹은 내 혼에 그토록
깊이 각인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때 그 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믿는다. 경험자들의 조언에 내달려 살아가려는 나를 직접 불확실성과 껴안게 하려고. 미지의
영역에 들어설 때 안내가 아니라 눈앞의 실체와 만나게 하려고. 결국 삶은 답을 알려줄 것이므로. ‘새는 날아서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도 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30)
지금 내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생각의 눈송이들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는가. 생각만큼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없다. 마음은 한 개의 해답을 찾으면 금방 천 개의 문제를 만들어 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작가이다. 마음이
자기와 전쟁을 벌이지 않을 때 완전히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31)
행복한 일이든 불행한 일이든 이것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큰일로 만들지 말라.’
물론 이런 조언은 함부로 흉내 내선 안 된다. 만약 큰 성공으로 행복해하거나
불의의 상실로 고통받거나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이에게 ‘그것을 그렇게 큰일로 만들지 말라’고 조언했다간 당신은 당장 쫓겨나거나 절교를 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
조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할 때 의미가 있다.
(36)
마음속에서 하는 말을 조심하라는 격언이 있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해도
자기 자신이 듣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단어는 무의식 속에서 정신을 부패시키고, 어떤 단어는 기도처럼 마음의 이랑에 떨어져 희망과 의지를 발효시킨다. 부패와
발효는 똑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어떤 미생물이 작용하는가에 따라 해로운 변질과
이로운 변화로 나뉜다.
(40-41)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에
대해 페라이어는 가슴 시린 해석을 내린다.
“많은 학자들이 <월광
소나타>는 달빛과는 상관없다고,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경매에서 이 곡을 작곡하기 직전 베토벤이 쓴 ‘에올리언 하프를 사야겠다’는 메모가 발견되었다. 바람이 하프의 현에 닿아 소리를 만들면, 바람의 신 아이올리스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에올리언 하프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젊은 연인이 세상을 떠나면
달빛만 있는 행성에 간다는 전설이 있다. 이들이 사는 고독한 섬과 같은 슬픔이 에올리언 하프를 울려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생각을 베토벤은 <월광 소나타>에
담은 것이다.’
(47)
영적 교사 페마 초드론은 말한다.
“안전하고 확실한 것에만 투자하는 데 관심이 있다면 당신은 행성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59)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삶의 여정에서 막힌 길은 하나의 계시이다. 길이 막히는 것은 내면에서 그 길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존재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곤 한다. 삶이 때로 우리의 계획과는 다른 길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길이 우리 가슴이 원하는 길이다.
파도는 그냥 치지 않는다. 어떤 파도는 축복이다. 머리로는
이 방식을 이해할 수 없으니 가슴은 안다.
(97)
다만 ‘매장’과 ‘파
종’의 차이는 있다고 나는 믿는다.
생의 한때에 자신이 캄캄한 암흑 속에 매장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어둠 속을 전력질주해도
빛이 보이지 않을 때가. 그러나 사실 그때 우리는 어둠의 층에 매장된 것이 아니라 파종된 것이다. 청각과 후각을 키우고 저 밑바닥으로 뿌리를 내려 계절이 되었을 때 꽃을 피우고 삶에 열릴 수 있도록. 세상이 자신을 매장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파종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매장이 아닌 파종을 받아들인다면 불행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105)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는 썼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과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는 잊지 않는다.”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는 감추거나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드러내며, 내가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 준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가장 진실된 나의 모습에 가깝다.
(116)
고정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명칭은 역할에 따른 약속 명사일 뿐이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할 때만 의사이며, 교수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만
교수이다. 밖에 나오면 그 역시 승객이고, 길 가는 행인이며, 관광객이고, 손님일 뿐이다. 만약
그가 의사, 교수라는 명사로 자신을 고정시킨다면 그는 자기 규정에 갇혀 존재가 가진 수많은 가능성과
역동성을 잃는다.
(121)
‘나’에게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면 허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역동성에 눈뜨게 된다. 그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열심히 놀이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다른 놀이로 옮겨 간다.
(124-125)
“아, 이 나무는 걱정을
걸어 두는 나무입니다. 일하면서 문제가 없을 수 없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그 문제들을 집 안의 아내와 아이들에게까지 데리고 들어갈 순 없습니다. 그래서 저녁때 집에 오면 이
나무에 문제들을 걸어 두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침에 다시 그 문제들을 가지고 일터로 갑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면 문제들이 밤사이 바람에 날아갔는지 많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176)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이유가
있어서 만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으며, 누구도 우리의 삶에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 삶에 왔다가
금방 떠나고 누군가는 오래 곁에 머물지만, 그들 모두 내 가슴에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겨 나는 어느덧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179-180)
소설가 보르헤스는 썼다.
“우리 삶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은 각각 특별한 존재이다. 누구든 항상 그의 무언가를 남기고, 또 우리의 무언가를 가져간다. 많은 것을 남긴 사람도 적은 것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무엇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누구든 단순한 우연에 의해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205)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것이 아니라 구덩이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다. 티베트 속담은 말한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209)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얼마만큼 아는 것을 의미할까? ‘안다’처럼 정반대의 말과 같은 의미인 단어가 또 있을까? 가까운 관계라
해도 어떤 사람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에 가깝다. 섣부른 판단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잃어 간다. 관계가 공허해지는 것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이 향하는 방향만 볼 뿐, 그가 어떤 지하수를 길어 올리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 진실한 관계를 맞는다는
것은 자신의 편견을 깨고 그와 함께 계단 끝까지 내려가는 숙제를 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