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 1 - 태조에서 세종까지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1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 민음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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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텔레비전을 잘 안보기 시작한 지 이제는 꽤 된 것 같구나. 예전에 텔레비전을 볼 때 가끔 역사 관련 교양 프로그램을 보곤 했어. KBS에서 끊이지 않고 역사 교양 프로그램을 했었던 것 같구나. 예전에 <역사스페셜>을 가끔 보곤 했는데, 그 이후에 거의 보질 않았어.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이유가, 이번에 아빠가 읽은 책이 KBS에서 했던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이라는 프로그램을 책으로 엮은 것이란다. TV로 이 프로그램을 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구나.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이 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 지금도 하나? 검색을 해보니 지금도 하는구나. 2013년부터 시작했으니 꽤 오래된 프로그램이구나. 이 프로그램을 책으로 엮어 시리즈로 꽤 되는 것 같은데, 아빠가 이번에 읽은 것은 1권이란다.

하루 24시간 다 똑 같은 날이 아니란다.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었던 날들. 그 특정한 날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TV <역사저널 그날>이고, 책의 구성도 텔레비전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말들을 그대로 적었단다.. 1권에서는 조선 태조 이성계부터 세종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워낙 유명한 사건들도 많이 있었던 시기라서, 드라마라도 많이 만들어지고,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지는 그런 시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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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번째 그날은 정도전과 이성계가 만나는 그날을 이야기하고 있단다. 이성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만큼 역사적인 날들이 참 많을 텐데, 이 책에서는 정도전과 첫만남을 가진 날을 역사적인 그날로 뽑았단다. 두 명 모두 고려의 아웃사이더였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결국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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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정도전과 이성계 둘 다 고려의 아웃사이더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던 이 둘이 만나서, 즉 붓과 칼, 사상과 무력이 만났기 때문에 이런 대업을 이룰 수 있었는데요.

저는 여기서 정도전이란 사람이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게, 자신이 갖고 있는 것과 잘하는 것(사상)을 알고 있는 것보다 자신이 못하는 것, 가지고 있지 않은 것(무력)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이런 게 정도전의 천재성 같거든요.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걸 누가 갖고 있는지 알아내서 그 사람과 힘을 합쳤다. 이게 굉장히 인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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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이성계가 고려라는 자신의 나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위화도 회군이 정당한 것인가 질문을 던지는 이도 있단다. 하지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시킨 윗사람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 그것이 옳지 않은 것이고, 잘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있는데 말이야. 아빠도 이성계의 입장이라면 많이 고민했을 것 같구나.

역사는 승자의 것.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승자의 붓으로 옳은 판단이었다고 쓰여지고 있단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을 하고 나서 고려라는 나라까지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했을까? 아빠는 어쩌면 정몽주처럼 고려라는 나라 틀 안에서 개혁을 해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 같구나. 정몽주, 정도전 이 두 사람은 이색이라는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동문이고,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같이 같고 있었지만, 방법의 차이로 남남이 된다. 심지어 정몽주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살해당하고 만난다. 이 이야기는 너희들도 앞으로 많이 접하게 될 아주 유명한 이야기라서, 이만 생략할게.

아무튼 1392 7 17일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단다. 왕위 자리를 몇 차례 사양하다가 어쩔 수 없는 맡는 식으로 왕위에 오른단다. 다 정해진 수순이었겠지만

그리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어. 신천 일대의 무악이라는 지역과 북악산 아래 한양이라는 지역을 두고 저울질하다가 교통의 요충지이고 방어하기 좋은 한양으로 정하게 되었어. 조선의 시스템은 정도전이 쓴 <조선경국전>에 기초를 했단다. 정도전이 꿈꾸던 나라는 민의를 중시하는 나라로 당시 전세계 그 어느 곳도 없었던 이상적인 나라였다고 하는구나. 책에서 약간 부풀려 이야기한 점도 없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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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세계 다른 지역의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지배층이 위민(爲民)이라는 분명한 목표와 그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점, 또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여러 제도적인 장치를 잘 만들었다는 점에서, 저는 당시에 조선 말고는 그런 것들을 성취한 나라가 없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군사적으로 강력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정말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 15세기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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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나라에 민심도 흔들리지 않고 지지하는 분위기였어. 금방 새로운 나라에 정착을 하는 것처럼 보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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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지만, 또 하나 영화와 드라마의 좋은 소재가 된 왕자의 난이라고 부르는 역사적인,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단다. 그것도 두 번이나이성계의 넷째 아들 이방원의 권력에 대한 욕심. 이성계의 실책. 아무리 새로 얻은 부인이 예쁘다고 해도, 열한 살 밖에 안된 이방석을 세자로 앉혔단 말인가. 목적을 위해서는 정몽주 같은 거물도 서슴없이 죽이는 이방원을 보고도 말인가. 자신과 가장 닮은 이방원을 세자로 후계자로 정해서 새로운 나라의 초기 정국을 안정되게 가지고 가야지 말이야.

연 이은 두 번의 왕자들 간의 칼부림에 몸서리를 친 이성계는 왕 자리를 내놓고 함흥땅으로 가버렸단다. 개국 공신 정도전도 이방원에 칼에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단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태종은 흩어진 민심을 얻고자 노력을 했단다. 백성들에게는 잘 대하려고 했지만, 권력에 눈독 들이는 이들에게는 가차 없었단다. 특히 외척에 대한 숙청은 마치 트라우마가 있는 듯 했단다. 외척들은 씨를 말릴 정도로 죽였고, 나중에 사돈지간인 세종의 장인어른 심온도 죽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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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태종은 안정적인 왕위 세습을 위해 세자도 일찌감치 가장 정당한 이로 정했어. 큰아들이자 자신과 많이 많은 양녕대군. 양녕대군의 삶 또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단다. 14년 동안 세자의 교육을 받은 양녕대군은 끝내 폐위되었단다. 폐위된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세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구나. 야사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세종을 위해 일부러 양보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고 여자 문제, 세자 공부를 소홀했던 문제 등 이유가 있었다고 하는구나. 한편으로 그것이 폐위당할 만큼 잘못한 일이었냐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단다. 양녕대군이 폐위당하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고 해도 평균 정도의 왕 역할은 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란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올랐다면 세종이라는 평균 이상 최고 만렙 수준의 왕을 만나 볼 수 없었겠지. 무슨 이유가 되었던 양녕대군의 폐위는 세종이라는 위대한 왕이 나올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단다. 세종이 왕이 되고 나서 조선이라는 나라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단다. 세종의 업적들은 너희들이 앞으로 많이 배울 것이기에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으련다.

세종이라는 왕을 생각해보면, 한 사람의 철인이 나라를 운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세종이 한 일들 중에 의외의 일이 하나 있어 소개해줄게. 바로 그 시절에 국민투표를 실시했다는 거란다. 말도 안된고 하겠지만, 당시 공법을 도입하기 위해 조선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고 하는구나. 그 놀라운 것은 의견이 모였어도 바로 실시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하는 이들의 의견도 들어보는 등 신중을 기하고, 시범지역을 적용한 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고 하는구나. 의견 조사부터 실시까지 15년이 걸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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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은 취지와 내용을 가졌더라도 모든 변화는 일단 불편하다. 제도와 규모와 중요성이 클수록 변화의 내용과 불편의 정도도 커지게 마련이다. 국가 경제의 줄기라는 측면에서 공법의 도입은 지대하고 지난한 문제였다. 이런 사정은 전근대 한국사에서 독특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 전까지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대규모의 의견 조사가 실시된 것이다. 조정은 1430 5개월 동안 전국 17만여 명에게 찬반 의견을 물었다. 그 때의 교통, 통신 같은 기술력과 행정력을 생각하면 인구 4분의 1을 대상으로 한 그야말로 방대하고 지난한 조사였다. 결과는 찬성 9 8000여 명, 반대 7 4000여 명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전라도와 경상도가 크게 찬성한 데 견주어 함길도와 평안도는 반대가 우세했다. 찬성이 더 많았지만 세종과 신하들은 공법을 서둘러 도입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루할 정도로 오래고 집요하게 제도의 장단점을 논의했다. 그런 과정을 거친 뒤에야 1441년 앞서 찬성이 우세했던 전라도와 경상도로부터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3년 뒤에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의견 조사부터 전국적 실시까지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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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정책 결정과는 판이하게 다르구나. 임기를 가지고 있는 정치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어쩔 수 없지 않냐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빠는 그런 오랜 시간의 정책들은 4년짜리 직업 정치인이 결정하면 안되고, 국민들 중에 무작위 선출로 뽑은 이들이 결정하면 가능하고 생각한단다. 아이고, 이야기가 딴 데로 샜구나.

아무튼 세종이라는 왕이 있었다는 것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양녕대군이 그대로 왕위에 올랐다면 한글이 만들어졌을까? 옆에서 세종이 부추겼을까? 한글을 만들자고? 아니면 다른 이들에 의해서 한글이 만들어졌을까? 지금 한글이 아닌 다른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해보려 하지만, .. 상상이 안 가는구나.

, 오늘은 이만 마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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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 삶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 가운데 하나는 만남이다.

책의 끝 문장 : 창덕궁과 창경궁 남쪽의 종묘까지 완벽하게 이어질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갔을 때 두 사람의 처지는 사뭇 달랐다. 이성계는 그동안 눈부신 전공을 세워 고려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자리를 굳힌 상태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반대였다. 그 또한 뛰어난 능력을 갖춘 젊은 관원으로 중앙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1375년 이인임 등이 이끈 친원배명(親元排明) 정책에 반대하다가 전라도 나주로 유배되었다. 3년 만에 풀려났지만, 그는 관직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도전은 9년이라는 짧지 않은 낙백(落魄)의 시간을 보낸 뒤 이성계를 찾아간 것이다. - P13

네, 사대문의 이름을 보면 인의예지가 다 들어가 있죠.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의 ‘인(仁)’,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의 ‘의(義)’,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예(禮)’까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智)’가 있어야 하는데, 이 숙정문(肅靖門, 북대문)의 ‘정(靖)’자에 ‘꾀한다’는 뜻도 있어서 이게 지혜 ‘지(智)’자를 대신해서 쓰인 게 아닐까 추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중앙에 보신각(普信閣, 종각)의 ‘신(信)’자까지 들어가서 ‘인의예지신’이 완성되는 거죠. - P58

정도전의 생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 이것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면 어떻게 애햐 하느냐? 모든 것을 왕에게 맡겨 둘 수는 없다. 능력 있고 깨끗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해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 이런 대원칙이 서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재상 중심의 정치(관료정치)라는 것이 <조선경국전>에 분명하게 제시되었던 것입니다. - P67

저는 이렇습니다. ‘양녕대군은 조선 최고의 전성기 세종 시대를 연출한 최고의 조연이었다.’ 결국 양녕대군의 등장이 세종을 훨씬 더 빛나게 해 줬고, 또 양녕 자신이 세종의 마음을 상당히 편안하게 해 준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양녕대군이 정치적 변란에 휩쓸렸거나 역모 사건 같은 게 일어났다면 세종도 마음껏 정치를 펼치지 못했을 것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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