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아트 저널리스트 김홍도 - 정조의 이상정치, 그림으로 실현하다
이재원 지음 / 살림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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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는 그림을 그리는 것에도 소질이 없고, 그림을 보는 것에도 소질이 없단다. 그림 전시회 같은 곳도 거의 다녀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야. 하지만 좋아하는 화가 한두 명은 있단다. 그 중에 한 명이 너무나 유명한 김홍도란다. 너무 유명한 사람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이다 보니 김홍도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림 볼 줄 모르는 사람이 그냥 좋아하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아빠는 김홍도가 좋더구나. 서양에 내노라는 화가들보다 더 훌륭한 그림들을 그린 화가라고 생각해. 예전에는 풍속화 대표작 몇 편과 이름만 알고 있었어. 하지만 오주석님의 <한국의 미 특강>을 비롯한 그의 책들을 통해서 김홍도의 다른 그림들을 알게 되었고, 대표작으로 분류된 작품들보다 더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리고 그림 하나하나의 작가의 의도를 숨겨 놓은 것들도 너무 좋았어. 오주석님의 책들을 통해서 김홍도의 작품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그의 삶에 대해서는 약간 알게 되었고, 아빠에게는 좋아하는 화가가 생겼단다. 그러다가 예전에 알라딘 헌책방에 갔다가 <조선의 아트 저널리스트 김홍도>라는 책을 보고 바로 구입을 했던 것이란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읽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에서 회화 편에 김홍도의 그림들이 소개되어 이 참에 <조선의 아트 저널리스트 김홍도>을 읽으면 제격이겠다 생각이 들어 책장에서 끄집어 내었단다.

지은이는 이재원이라는 분인데미술 전문가는 아니고 KBS에서 재직중인 분이라고 하는구나. , KBS의 어떤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홍도에 관한 책을 쓸 정도라니김홍도를 대단히 좋아하는 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1. 

일반적으로 김홍도는 해학 넘치는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김홍도가 그린 분야는 매우 다양했어. 아무래도 나라에 소속되어 있는 도화서에서 일하다 보니, 개인의 의지보다 나라의 의지가 그림 속에 더 들어가 있었던 것 같구나. 하지만주어진 소재 안에서 김홍도는 자신의 의지를 마음껏 펼쳤단다.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이지만그의 삶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고 했어. 지은이 이재원님은 김홍도의 흔적을 찾아 노력했고, 김홍도의 그림을 통해서 김홍도의 삶을 추리하기도 했단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체를 통해서 이야기를 끌어갔단다.

김홍도는 안산 출신인데어렸을 때 김홍도의 그림 실력을 알아본 이가 있었으니 강세황이라는 분이란다. 강세황은 나중에 벼슬을 하기도 했지만 화가로서도 유명한 사람이었어. 어린 시절 강세황으로부터 지도를 받기도 하고, 함께 어울려 그림도 그리곤 했단다. 그리고 스물한 살 때그의 노력과 그의 타고난 재능과 강세황의 지원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단다.

그림 실력이 출중했던 그의 주변에는 늘 선후배 화원들이 가까이 했어. 스승 강세황이 유명한 충신의 집안이었는데도 과거 시험을 볼 수가 없었어. 왜냐하면 강세황의 형님이 부정을 저질러서 연좌제로 가족이 모두 벼슬 진출을 할 수 없었거든.. 그런데 당시 왕이었던 영조는 강세황의 유능함을 알고 한양으로 불러들였단다. 그래서 벼슬을 하게 되었고김홍도는 스승과 해후했단다.

 

2.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김홍도는 정조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어. 정조가 즉위하고 나서 정조는 김홍도를 더 가까이 했단다. 정조는 김홍도에게 이런 저런 그림을 주문했어. 왕인 정조는 왕궁 밖을 벗어나기 쉽지 않았잖아. 그런데 한편으로는 민심을 파악해야 했단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김홍도에게 백성들의 그림을 그려오게 하는 것이었어. 그렇게 태어난 것이 바로 김홍도의 풍속화들이란다. 김홍도는 풍속도들을 책자로 만들어서 정조에게 드렸고, 정조는 그림 하나하나를 김홍도와 함께 보면서 민심을 파악했어. 그림 하나하나를 보면서 정조와 김홍도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것은 곧 김홍도의 그림에 대한 설명이기도 한 것이란다. 이렇듯 김홍도는 백성들의 삶을 직접 그림으로 그려 왕에게 보고를 하는, 눈과 귀의 역할을 했어. 그래서 지은이 이재원님은 김홍도를 ‘조선의 아트 저널리스트’라고 칭했던 것이다. 그런 민심뿐만 아니었어. 정조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금강산 구경도 하지 못했어. 그래서 이번에도 김홍도를 보내서 금강산을 그려오라고 했어. 그렇게 정조는 궁 안에서 그림을 통해서 금강산을 감상했단다.

정조에게는 마음의 짐이 하나 있단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사도세자가 늘 옳았던 것은 아니고 그가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그가 죽음까지 당해야 한 것은 당시 당파싸움의 영향도 컸단다. 사도세자가 죽고 나서 영조도 바로 후회를 했으니까 말이야. 그런 아버지가 죽는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정조. 아버지의 위상을 다시 세우고 복권하는 것이 효도이자, 정조 자신의 위치도 확고히 하는 것이었어. 여전히 조선은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시기이니까 말이야. 정조는 이런 일환으로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화성 현륭원으로 옮기기로 했어. 이때 행사를 그림으로 그리도록 했는데, 이 작업을 주도한 것이 바로 김홍도였단다. 너희들도 가 본 적이 있는융릉이 바로 현륭원이란다. 융름 옆에 정조가 묻혀 있는 건릉이 있잖아. 그래서 융건릉으로 더 유명하 그곳.. 날씨가 좋은 날 가면 참 좋은데또 가보도록 하자꾸나.

정조의 입장에서 보면 김홍도는 가장 아끼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어. 그리고 여러 공들도 많이 세우고 말이야. 그래서 김홍도에게 현감이라는 벼슬을 내리게 된단다. 충청도 지역에서 연풍 현감을 하게 되는데, 잦은 가뭄으로 민심은 그리 좋지 못했어. 2년 정도 하고 다시 한양으로 복귀를 했단다. 그리고 정조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을 함께 하기로 했단다. 정조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지만 않았다면 김홍도도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구나.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고 정순왕후가 정권을 잡으면서 정조가 중용했던 신하들은 자리 보존이 어려웠단다. 정약용처럼 목숨 부지하고 유배길을 떠나는 것을 다행으로 알 정도였어. 김홍도도 궁을 떠나 지인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지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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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김홍도의 삶과 그림에 다시 한번 알게 된 것 같아 좋았단다. 알면 알수록 매력 넘치는 사람인 것 같구나.

 

PS:

책의 첫 문장: 여러 해 동안 글과 그림을 벗 삼아 초야에 묻힌 듯 살던 강세황은 어는 날부터인가 같은 꿈을 여러 날 꾸기 시작하였다.

책의 끝 문장: 이렇게 <단원유묵첩>은 양기가 스물일곱 살 되던 1818 3, 단원이 세상을 떠난 지 열두 해 만에 세상에 나온 것이다.

네, 그리하지요. 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을음입니다. 소나무를 태워 생긴 그을음으로 만든 먹을 송연묵(松煙墨)이라 하고, 참기름, 비자기름, 오동기름 등을 태워 생긴 그을음으로 만든 먹을 유연묵(油煙墨)이라 합니다. 아궁이에 소나무를 태우게 되면 굴뚝에 그을음이 붙게 되는데 위쪽에 모이는 것일수록 좋은 먹이 될 수 있습니다. 소나무의 송진 그을음으로 만든 송연묵은 먹색이 맑고 깊습니다. 예로부터 중국 황산에서 나는 소나무로 만든 먹을 최상품으로 칩니다. 그 이유는 다른 지역보다 송진이 진하고 많아 가늘고 고운 그을음 입자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탁하지 않고 맑은 먹을 얻어야 먹색이 깊어집니다. - P24

내가 보고 싶었던 그림들이 바로 이것이다. 놀라는 얼굴 표정을 곁에서 보는 듯하고 밥 한술과 한 사발 탁주에 만족해하는 너털웃음 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것 같구나. 길거리에서 송사를 벌이는 장면에서는 어떤 판결이 내려지는지 한번 참견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이처럼 서로 부대끼며 백성들과 함께 살아가는 수령이 있으니 과인이 바라던 바다.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이토록 자세히 읽어내고 그려내다니, 마치 백성들이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 같구나. 더욱이 표암이 유려한 필치로 느낌까지 적었으니 그 강평이 날카롭게 풍자되어 읽어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기만 하다. - P154

정조가 원대한 계획을 펼쳐나가는 데 의지하고자 했던 인물은 채제공과 정약용, 그리고 김홍도였다. 외형적으로 붕당을 없애고 고루 인재를 등용하면서 노비제도를 철폐하여 위아래 없이 모두 잘사는 평등사회를 건설하면서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는 관행과 제도를 개혁하고 그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출판 사업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후대의 모범으로 남기를 바라며 문화 부흥의 꽃을 피워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한 노년에 이르러서는 화성 행궁으로 물러나 여생을 예술과 더불어 노닐고자 하는 이상을 꿈꾸고 있었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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