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빅뱅이론을 이야기하면 반드시 나오는 질문. 첫째,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물론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공간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진짜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조차도
없었다는 말이다. 솔직히 나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마
대부분의 물리학자들도 비슷할 거다. 둘째, 우주가 팽창한다면
어디로 팽창해가나요? 우주 바깥에 빈 공간이 있다는 말인가요? 이미
이야기했듯이 우주에는 바깥이 없다. 그냥 우주 전체가 팽창하는 거다.
풍선에 바람을 불면 풍선 표면이 점점 팽창한다. 풍선 표면에는 경계가 없다. 차를 몰고 여행을 떠나보라. 어디가 지구의 끝인가? 경계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모든 지점 사시의 거리가 늘어났을
뿐이다. 우주는 이런 식으로 팽창한다.
(47-48)
이런 점에서 ‘빅 히스토리’라는
새로운 관점은 역사를 보는 신선한 틀을 제공한다. 모든 것은 빅뱅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별과 원소의 탄생, 태양계와 지구의 탄생, 생명과 인류의 탄생, 농경의 탄생,
세계의 연결, 변화의 가속, 그리고 미래이다. 여기에 민족이나 국가는 없다. 우리 모두는 빅뱅에서 이어져오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이런 관점이야말로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어 인류라는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21세기의 역사관이라 생각된다. 또한 빅 히스토리는 그 자체로 학문
간의 벽을 허무는 작업이다. 빅뱅은 우주론을, 별과 원소의
탄생은 핵물리학과 양자역학을, 태양계와 지구의 탄생은 천문학과 지구과학을, 생명과 인류의 탄생을 화학과 생물학을, 그 이후는 역사학, 고고학, 경제학, 공학
등을 필요로 한다.
(69)
우리 모두는 행복한 삶을 원한다. 제러미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행복을 위해 교육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마다 행복의 정의가 다를 수 있다. 내가 온종일 물리를 공부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동의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아이의 행복을 위해 교육한다면 이미 뭔가 잘못된 거다. 왜냐하면
그 행복이란 당신이 정의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무엇인지는 아이가 직접 결정해야 한다. 동물들이 그러하듯, 결국 인간에게도 교육의 목적은 아이의 독립이다. 행복한 삶을 정의하고 그것을 찾는 것은 부모, 교사, 사회의 몫이 아니라 바로 아이 자신의 몫이다.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것이기 때문이다.
(113)
학문은 창조를 위한 일이고, 창조하는 인생이야말로 최고의 인생이다. 학문하는 것을 공부라 한다.때로 공부가 힘들고 지루할 때가 있지만, 창조의 희망을 가지고 버티는 것이 학자들이다. 왜냐면 그것이 즐거움이니까. 수능에서 만점을 받는 사람이 공부의 신이라면 우리는 니체의 명언을 떠올려야 할 것 같다. “신은 죽었다.”
(117)
원전은 위험하지만 완벽하게 통제될 수 있으므로 안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원저의 위험은 열차 사고, 경제 위기, 전쟁의 위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후쿠시마의 예에서 보듯이, 자칫 이 땅이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불모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이 아무리 적더라도 감내할 수 없는 수준의 위험이란
말이다. 안전장치 10개가 달렸다고 해도 실탄이 장전된 총을
유치원 다니는 자기 아이에게 줄 부모는 없다. 원전의 사고 위험이 정말 무시할 만한 것이라면 왜 원전을
서울 근교에 건설하지 못하는가? 송전에 필요한 엄청난 설비를 절약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118)
다시 말하지만, 과학은 근본적으로 완벽하지 않다. 현재의 과학기술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은
자연의 법칙을 주었지만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만들어 놓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69)
물체가 하나 더 늘어 3개가 되면 이제 그 복잡함이 도를 넘어선다. 혼돈, 그러니까 카오스현상은 서로 중력으로 당기는 물체가 3개 이상 존재하면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20세기 벽두, 삼체 문제를 연구한 프랑스 수학자 푸앵카레가 얻은
결론이다. 남녀 사이의 삼각관계가 잘 풀리지 않는 과학적 이유라고나 할까. 카오스가 일어나면 운동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며 무질서한 양상까지 보이게 된다. 이런 이유로 물리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숫자를 세기도 한다. 하나, 둘, 으음… 너무 많다.
(178)
빛의 속도, 최소 전화
크기의 제곱, 진공의 투자율(자기장에 대한 특성을 나타내는
상수)를 곱하고 플랑크 상수로 나누어주면 137분의 1이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이것을 미세구조상수라 한다. 재미있게도 미세구조상수는 기본상사들의 단위가 절묘하게 서로 상쇄되어 단위가 없다. 단위라는 것은 물리량을 기술하는 기준이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기준으로 1미터라는 길이의 단위를 만들었다. 외계 생명체가 있다면 그 자신의
몸을 기준으로 단위를 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세구조상수는 단위가 없으므로 우주에 사는 어떤 외계 생명체라도
똑 같은 값을 얻게 된다. 뭔가 중요할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느느다?
(191)
잘난 체하는 물리학자를 괴롭히고 싶다면 이렇게 물어보라. “시간의 본질이 무엇인가요?” 이거 한 방이면 끝이다. 우리는 아직 시간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 근원이 무엇인지, 차원이 하나인지, 연속적으로 흘러가는지, 왜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는지, 아니 정말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혹시 시간이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것의 결과물은 아닐까?
(200)
진실은 미묘하다. 중첩 상태에 있는 전자가 정말 두 장소에 동시에
있는지 알아보려면 눈으로 보아야 한다. 양자역학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당연한 것을 이처럼 심각하게 말해야
한다. 좀 더 어려운 말로 ‘관측’을 해야 한다. 그런데 막상 관측을 하면 전자는 한 장소에서만 발견된다. 관측이 대상의 상태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측은 중첩 상태를
깨는 역할을 했다. 살다 보니 별 헛소리를 다 들어본다는 반응을 보여야 정상이다. 막상 보면 한 장소에만 있다고? 그렇다면 동시에 두 장소에 있다고
한 것이 거짓이잖아? 이거 사기네. 안타깝지만 전자는 분명
두 장소에 동시에 있었다. 관측하는 행위가 전자를 한 장소에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런 짧은 글에서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독자로서는 필자를 믿는 수밖에 없다. 필자는 양자역학으로 밥벌이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밝혀두겠다.
(229-230)
인간이 생각하는 중요한 가치는 그 자체로 상상이기에 우리의 상상으로 지켜내야 한다. 인간의 행복이라는 비과학적 대상에 대한 인문학적 고민이 없다면 인간은 불행해질 거다. 과학뿐 아니라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시대이다.
(237)
자,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측정하기 전에 물체가 사방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이해하지 못해도 수학적으로
확률을 계산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면 더 이상 고민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 확률의 의미를 따져보면 물체가 여기저기 존재할 뿐 아니라, 때로는
유령처럼 벽을 스스로 통과하기도 한다는 것이 양자역학이 말하는 바이다. 양자물리 전문가인 필자도 물체가
여기저기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해한다는 것이 내가 가진 경험적 지식과
새로운 지식이 모순 없이 관계를 맺는 것이라면 나는 양자역학을 이해 못 한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해하려고 노력할 이유는 없다.
(248)
카오스는 복잡해서 얼핏 보면 불안정해 보인다. 하지만 카오스계는 선형계보다
외부의 간섭에 대해 훨씬 안정적이다. 규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침에 1시간 지각을 하면 하루종일 엉망이 되겠지만, 대충 살아가는 사람은 2시간 지각을 해도 큰 문제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자연은
카오스와 프랙털을 통해 안정과 효율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것이다. 자연의 실제 모습은 우리가
생각한 단순한 운동이나 이데아의 도형과 사뭇 다르지만, 그래서 인간이 만든 것보다 더 아름답다.
(286)
시는 대개 최소한의 언어로 표현된다. 우주를 기술하는 물리법칙도 최소한의
수학으로 표현되는 것이 원칙이다. 건조하게 말하자면 오컴의 면도날 때문이고, 비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우주가 단순할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여기에는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는 물리학자의 미학적 관점이 깔려 있다. 최소한의 수식을 사용하기 위해 상실되는
부분이 있지만 이것은 의도적인 상실이라기보다 필연적인 상실이다. 물리법칙으로의 압축은 모든 가능한 현상을
하나의 방정식으로 줄이는 과정이 아니다. 현상의 핵심이라 믿어지는 사실을 하나의 문장으로 그냥 쓰는
것이다. 여기서는 상실될 것을 고르는 행위가 아니라 핵심만을 집어내는 감각에 창조성이 있다고 하겠다.
(319)
최근 과학과 예술의 융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1830년대에 등장한 과학자라는 명칭은 예술과 관련 있다. 지질학자
윌리엄 휴얼은 예술가(artist)와 비슷한 이름으로 과학자(scientist)라는
단어를 제안했다. 이 단어는 곧 급속히 확산되어 1840년에는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과학자가 하나의 직업으로 자리 잡아가던 시기, 그 일의 성격이 예술과 비슷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과학과 예술의
겉모습은 많이 다르지만,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 있어 이 두 분야는 통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과학과 예술의 상상력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융합보다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