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푸페이룽 지음, 한정선 옮김 / 지와사랑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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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노자의 매력을 새삼 깨달았다랄까요?

노자를 다 읽고 나면 장자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도교라고 하면 노장사상.

장자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으니까요.

저자의 이야기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바로 '노자'라고 합니다.

도가라는 심오한 사상을 5000여자로 적어낸 노자의 저서가 바로 '노자'입니다.

어지간히 압축하고 함축해 놓았군요.

그래서 우리에겐 장자가 필요합니다.

장자는 압축된 노자의 사상을 우화와 역설을 통해 풀어줍니다.

평생을 벼슬에 나가지 않고(잠깐 나갔다가 그만두었답니다.) 자신의 사상을 관철하며, 궁핍한 가운데서도 '안빈낙도'하는 진정한 자연인의 삶을 살다간 장자입니다.

2000년 가까운 시기를 뛰어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또 여전히 우리에게 감동과 감화를 전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은 역시 삶 가운데서 직접 실천으로 보여준 그들의 실제적 사상이라는 점인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는 '노자'에 실린 본문을 게재한다거나 해석한다거나 하는 세부적인 부분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말하자면 '개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본래 '노자'는 81장으로 이루어져 있던 것 같습니다.(정확한지 확인이 필요하지만요)

그리고 각 장들은 몇 가지 그룹으로 묶일 수 있다는 판단하에 그러한 사상에서 도출되고 전해지는 가르침들, 그 가르침을 장자의 우화를 통한 해석으로 풀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책은 쉽고, 이해하기 편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노자와 장자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흥미를 돋우는 '에피타이저'로 삼아 읽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지만 말하자면 본격적이지 않은 '에피타이저'일 뿐인 것이지 실제 내용이 허술하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흥미와 이해를 돋워 주었다는 장점을 뒤로하고 아쉬웠던 점도 적어보고자 합니다.

이 책이 결국은 '노자'의 현대적 의미의 해석에 치우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제대로' 노자를 읽은 적이 없어 잘 모르기에 자신은 없지만 노자나 장자가 꼭 그러한 의미로 가르쳤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점은 잘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하겠습니다.

결국 현대의 상황에 맞추어 현대인이 해석하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겠지만, 잊지 않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적어보았습니다.

인문 고전의 가치가 강조되고 있으면서도 정작 나부터도 '제대로' 인문 고전을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좋은 계기의 하나가 되어 주었음에 감사합니다.

[이 감상은 북카페의 서평이벤트를 통해 해당 출판사에서 제공된 책을 읽고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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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
차동엽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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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빴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아쉬웠다"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다.

1 장은 비교적 폭넓은 독자에게서 공감을 끌어낼 수 있겠다고 느꼈다.

살아가면서 '고통'을 온전히 피해가는 사람은 없기에 그 고통을 위로하며 힘을 더하는 이야기가 좋았다.

2 장부터 책 제목처럼 처음의 질문이 '잊혀진 질문'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본업이 목사이다보니 종교적 견해에서 해석을 더해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읽는 내내 교회 좌석에 앉아 설교를 듣는 기분을 느껴야했던 것은 곤욕스러웠다.

비교적 종교적 견해와 발언에 너그러운 편이라고 자부하는 내가 마음 한 구석에서 계속해서 그러한 곤욕을 느꼈다면 일부 사람들에겐 거부감 혹은 낭패감으로 다가갔으리라.

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었다면 조금 더 보편적이고 포괄적이면서 포용적으로 이야기 했어야 했을 것 같다.

이병철 회장이 종교적 개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질문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단정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추측해보자면 좀 더 근본적인 인간의 '생'에 대한 해답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뭐, 종교인 그것도 목사에게 가장 근본적인 주제가 '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저자에겐 최선이자 최고의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4 장에서는 종교색이 짙어진 이야기를 조금은 수습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처음의 질문이 '잊혀진 질문'으로 남은채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게 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이제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겠다.

초반에 이 책은 '고통에 집중하고 있는 고통스런 책'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의 이야기에서 이 생각은 맞았다고도 생각되고 전혀 틀렸다고도 생각되었지만 인간의 부정적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분명하다.

저자의 지혜랄까 믿음이 빛나 보였던 부분은 74쪽의 "그 무엇도 '내 허락' 없이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는 문장이었다.

이 문장은 눈에 익다.

비슷한 문장, 혹은 비슷한 의미의 문장을 어디선가 읽었던 것이리라.

화를 내는 것, 고통을 느끼는 것, 불행해지는 것 이 모든 것이 반드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고과정을 거친 후 내 것이 된다는 사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존재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 행복과 불행을 선택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타고 났던 것이다.

다만 그 능력을 우리가 잊고 있을 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잊혀진 질문》이란 제목에서 내가 늘 되뇌었으면서 최근엔 잊고 있던 내 안에서 잊혀진 질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왜 나를 사랑할 수 없나?"

이것이 늘 나를 괴롭히고 불행하게 만들었던 질문이었다.

그 때,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나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늘 느끼던 그 날들의 기억.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었던 슬픈 기억.

하지만 그러한 과거도 필요했던 과정의 하나였던 것 같다.

지금의 난 그 질문을 잊고 살만큼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고 있으니 말이다.

누구나 그 마음 하나하나에 '잊혀진 질문' 하나 두개 쯤은 품고 있으리라.

그 질문이 이제는 해결되어 잊혀졌을 수도 있고, 너무 지쳐서 포기해버려 잊혀졌을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질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깨어있는 상태'를 증거한다.

간절하고 중요한 질문일 수록 자주 되뇌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그의 삶 속의 결정적 단서, 혹은 열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잔잔한 위로와 오래 잊고 지냈던 질문을 떠올리며 현재에 대한 만족과 또 다른 바램을 강하게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이 책과의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고통은 우리가 그것을 고통으로 인지할 때 비로소 고통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고통을 허락하지 말자.

기쁨과 사랑, 행복을 허락하기에도 우리의 선택지는 부족하지 않던가?

오랜 질문은 잊혀지게 해도 사람이 스스로 불행해 질 수도 행복해 질 수도 있는 선택의 기회를 지닌 특별한 존재임은 잊히게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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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습관 - 운명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결정적 차이
연준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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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임이 분명함에도 습관이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은 참 신기하다.

좋은 습관 하나가 인생을 좌우한다는 사실은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이미 익히 알고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새삼스레 놀라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책 속에는 수 많은 명사, 위인들의 인생을 있게해준 결정적 습관들이 실려있다.

그들 중 누군가의 삶을 목표로 한다면 그의 습관을 몸에 익혀두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습관이라는 것이 오늘 당장 "이것을 내 습관으로 하겠어."라고 이야기 한다고 해서 자신의 것이 되고, "오늘부터 이 습관 관둘래."라고 한다고 해서 당장 그 습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는 사실도 물론 잘 알고 있으리라.

이 책에는 이미 완성되어있는 습관들이 담겨있다.

그들이 그 습관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까지 과정을 간략히 담아두기도 했지만 자세한 지침이나 방법은 결국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빛과 그림자의 이야기를 잠시 해야겠다.

사람의 인격에도 빛과 그림자가 존재하듯 습관의 효과에도 빛과 그림자는 존재한다.

이 책은 책 속에 등장하는 위인, 혹은 명사들의 빛의 일면을 조명하고 있다.

빛을 바라고 향하되 그림자의 존재를 잊지는 말며 경계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화려하고 환하게 빛나는 모습에 넋을 잃고 그저 단순히 동경하게 되고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너무 긍정적인 사실만 입맛대로 골라 적어둔 이야기들을 보면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못난 습관이다.

이 책에 담긴 습관 중 눈에 띄는 세가지를 뽑아봤다.

처음은 역시 독서다.

사람이 직접 해볼 수 있는 경험에는 무척 큰 제한이 따라다닌다.

단 하나 뿐인 존재라는 사실부터 시간, 공간, 능력까지 하나같이 경험의 폭이 제한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만이 아니더라도 책은 저자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다양하고 폭 넓게 보여준다.

앉은 자리에서도 세계의 오지의 상황을 알 수 있고, 수 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시대와 그들의 생활 지혜를 볼 수 있는 것도 책이다.

책을 읽고 생각함으로써 사고의 폭과 사유의 깊이도 늘어난다.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습관임에 반론의 여지가 없다.

두번째는 많이 쓰는 습관이다.

단지 읽기만하고 지나쳐버리면 쉽사리 잊어버린다.

내 경우만 해도 어지간히 감명깊은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곧 망각의 저편으로 흘려보내고 만다.

그래서 첫번째 쓰기는 메모다.

두번째 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적어가는 것이다.

일상, 감상, 혹은 비평 무엇을 쓰든 자신의 생각을 적는 일은 올바른 결정을 위해서도 사고의 과정으로도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늘 부족함을 느끼고 한계를 느끼기에 나 역시 되도록 많이 자주 가리지 않고 적고 정리하려 노력하고 있다.

세번째는 공감하는 습관이다.

난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과 공감하고 싶다.

내 책 읽기와 글쓰기의 목적의 하나가 소통과 공감이다.

소통의 부재, 공감의 단절은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왔기에 그 힘겨움과 괴로움을 익히 알고 있다.

나의 상황, 나의 마음과 생각에 공감해주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고마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공감하는 습관이 형성되어있지 않으면 쉽사리 공감하지 못하게 된다.

공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세상엔 수 많은 좋은 습관이 존재한다.

그 모든 습관을 한 사람의 몸에 모두 지닐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지만 아마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습관이라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나'의 모습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습관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내 꿈에 맞는, 내 몸과 성격에 맞는 습관을 계발해야 할 것이다.

조합할 수도 있고 단순화 할 수도 있으며 창조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꿈'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아는 것이 아닐까?

아직 가야할 길은 멀기만 하다.

해야 할 것도 여전히 산더미같아 막막할 때도 있다.

하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새긴 좋은 습관이 나에게 무엇보다 좋은 내일을 가져다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쌓아 올린 결과가 좋은 습관이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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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핑키 2012-03-07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ㅋㅋㅋ 대장물방울님^_^ㅋ
알라딘에서 뵈니까 왜이리 반가운지요!!!!!!!!!! ㅋ
우연히 ㅋㅋ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작가님 책 검색하다가보니까. 물방울님 리뷰가 보였어요!!!
혹시나 제가 알고 있는 물방울님이 아니실까봐 ㅋㅋㅋ
블로그랑 비교 대조 ㅋㅋ 해보았습니다!!! ㅋㅋ 틀림없군요!!! ㅋㅋ

대장물방울 2012-03-13 01:11   좋아요 0 | URL
아, 핑키님 안녕하세요. 큿큿큿.
그러게요 알라딘엔 그냥 복사 붙이기 중예요. 푸훗;

대장물방울이란 닉네임을 쓰는 사람은 없더라구요 저말고. 크크;
틀림없네요!! ^^
 
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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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색체가 무척 짙게 드러나는 책이다.

체질적으로 '종교'에 질색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하나님은 믿는 자 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 죄지은 자, 거스르는 자들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를 써놓으면 'You are a christian?" 이라고 묻는 이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난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어떤 신만을 믿는 사람도 아니다.

지금껏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길었던 책이 Bible 즉 성경이었다.

일독하는데 무려 2개월이나 걸렸을 만큼 길고 길었다.

독자가 읽는 책을 읽는데 장르나 성향이 문제가 되는 시기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버렸다.

그저 읽고 싶으면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 개방화된 사회의 장점이 아니겠는가?

이 소설은 소녀만을 노린 연쇄살인범에게 딸 '미시'를 잃고 난 후 수년이 지나도록 상처와 고통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던 한 남자가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는 계기가 되는 한 장의 쪽지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쪽지의 발신인은 '파파'로, 그의 부인이 '하나님'을 칭하는 애칭이기도 하다.

부인과 아이들에겐 비밀로 하고 찾아간 '상처'의 근원지인 그 오두막에서 보낸 주말 동안 그는 자신의 과거와 극적으로 화해하고 용서함으로써 오래 간직해온 상처를 치유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남자'라는 존재의 성역할과 표면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강인함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남성화' 한다.

하지만 정말 그가 남자인 것인가? 라는 물음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섣부른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에서는 '하나님'을 요리를 즐기는 사려깊은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한 종교적 판단이나 기준은 사실 내겐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다.

내가 주목한 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간 주인공 '맥'이 느끼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상처, 자신의 딸을 살인자로부터 지켜내지 못한 아버지라는 '자책'에서 오는 죄의식, 그리고 살인자에게 느끼는 살의에 가까운 분노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무능력하면서 자식에게 괴로움을 부여하는 남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한다.

그 결과로 스스로를 상처 입힐 뿐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가족들마저 상처입히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 속에 갇혀 자신의 상처의 괴로움과 고통에만 집중했기에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한 결과를 피하고자 하는 의도가 되려 그러한 결과를 증폭시키는 역효과를 일으키고 마는 것이다.

자력으로 홀로 힘으로 그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며 작가는 삼위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과 성령님과 예수님을 등장시킨다.

그들 '하나님'은 단순히 위로함으로써 그의 상처를 치유하는 안일한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상처를 후비고 파내어 드러내고 난 후 그 상처와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치유를 시작하는 것이다.

난 겁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두려움도 많다.

걱정함으로써 내 키가 늘지도, 올 것이 오지 않을 것도 아님을 확실하고 너무 분명하게 알지만 그럼에도 걱정하는 것을 그치지 못했던 남자다.

이제는 제법 교정이 이루어져 태평하기 그지없는 인간으로 상당히 개조되었지만 여전히 느닷없이 찾아오는 두려움과 불안 앞에서는 무엇도 못하고 굳어버리고 만다.

내가 극복하지 못한 것들은 아직까지 내가 마주하기를 두려워해 피하고 있음을 의미함을 안다.

책은 내게 그 '마주함'의 단서가 된다.

그들의 갈등과 깨달음 회복과 치유는 나를 위로하고 안심시킨다.

그 효과는 때로 스스로 놀랄만큼 엄청나다.

마주해야만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먼저 나 자신부터도 스스로의 나약함과 마주하지 않으면 그 나약함이 불러왔던 과거의 과오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게 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에게 있어 가장 두렵고 슬픈 기억을 남긴 장소에서 자신과 그의 상처와 마주하고 치유에 이른다.

난 용기가 없는 남자다.

그래서 내가 의지할 곳은 책 속. 그곳 뿐이다.

그럼에도 난 나를 치유하고 용서해 나갈 수 있으리라.

인간에게 계기란 무척 중요하다.

그리고 계기가 찾아들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마주할 수 있는 용기는 간절함에서 온다.

간절히 바라고 원해보자.

나를 품고 나의 사랑하는 이들을 품고 나의 원수마저 품을 수 있게.

나의 상처의 고통으로인해 타인마저 고통스럽게하거나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나 돌아볼 기회다.

289쪽. "그러니까, 진주 말이에요.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죽음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보석이죠."

386쪽. "맥, 어느 하나라도 중요하다는 건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는 뜻이죠. 당신이 중요하기 때문에 당신이 하는 모든 일도 중요해요. 당신이 용서할 때마다 이 지구는 변해요. 당신이 팔을 뻗어서 누군가의 마음이나 삶을 어루만질 때마다 이 세계는 변해요. 눈에 드러나건 아니건 모든 친절과 목사를 통해 내 목적은 이루어지고 어느 것도 예전 같지 않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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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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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마음에 샀지만, 알고 싶진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이다.

작가와 독자간의 거리. 사실 쓸데 없는 고민거리다. 전혀.

그럼에도 독자는 무엇으로 작가를 이해하고 알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의외로 자주 불거진다.

정말은. 이야기에 대한 어떤 인상도 새겨지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읽어나가고 싶다.

아무도 밟지 않은 이른 새벽의 눈길을 걷고 싶은 마음처럼.

읽고나면 어리둥절하고 어안이 벙벙해서 이게 무슨 소리일까? 도대체 알 수 없어 고민하게 되는 일들도 사실은 마주하고나면 반가운 감회가 된다.

그런 까닭에 난 작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배경에서, 무슨 상황을, 누구의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내려 했는가? 그것은 온전히 이야기 속에서 발견해내야 할 것 들이다.

늘 새롭게 읽고 싶고, 신비와 베일에 싸여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랄까?

이런 이유에서 이 책은 구성에서부터 내 바람과는 많이 어긋나고 있다.

그럼에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은 어떤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글을 써냈기에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나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작가가 쓴 이야기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역시 모순되는 것일까?

노벨문학상이 수상자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일지 조금 알 수 있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유쾌하게 다가오는 상큼한 기분이 아닌 눅눅하고 씁쓸한 기분이란 것이 아쉽지만.

'반란자들'이라고 명명된 16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이 마치 심사위원(그들)이 선택하고 허용한 '반란자'의 이미지에 갇혀버린 것 같아 그들이 지녔을 순수함이 훼손된 것이 아닐까하는 느낌이 들었다고하면 역시 성급하고 가벼우며 다분히 오해하고 있는 판단이 될까?

그렇다해도 내겐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 것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느낌과는 별개로 수상자들 개개인과 글을 쓰는 일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작가와 달리 그들의 활동엔 제한 된 영역이 없었다.

그들은 글을 쓰는 일을 하는 작가지만 글만 쓰는 작가는 아니었다.

문학상을 수상한 사람들이 글만 쓰는 사람들이 아니었음은 어딘가 낯설다.

책 속에서 몇 몇의 수상자들은 '이데아'를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을 의미하는 '이데아'와는 조금 다른 것 같은 인상의 그들의 '이데아'.

편집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집어 넣었는지 작가들 스스로 그렇게 말을 한 것인지 짜 맞춘듯 여러 사람의 이야기에 등장하니 '조작'이 아닐까하는 불순한 마음, '의심'이 싹텄다.

그들의 말은 힘이 있다.

그들이 경계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부정적 '이데아'.

그 부정적 현상이 만연해 있는 사회에 대한 경고, 혹은 각성의 촉구를 위한 의도는 아니었을까?

인종청소나 홀로코스트, 천안문 사태가 다시 등장한다.

작가들의 이야기다.

최근들어 발간되는 신간에 왠지 자주 보이는 주제어들이 이곳에서까지 눈에 띄니 요즘 세상의 어느 한 구석에 경계해야 할 일들이 서서히 저변을 넓혀가고 있어서 그것에 대한 경고는 아닌가하는 뭔가 허황되게까지 느껴지는 생각도 해본다.

그들의 실상은 어쩌면 비참하게도 다가왔다.

강력한 힘을 지닌 상을 수상함으로써 경계의 대상이 되고 그 이유로 배척되거나, 이용당하기도 하는 일.

스스로 바라는 바였던 사람도 있지만 전혀 원치 않던 결과로 괴로워해야 했던 사람도 있었음을 알게 된 것 또한 서글펐다.

그들은 신처럼,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고래처럼 크고 위대하며 신비롭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저런 감상을 전부 뒤로하고서 이야기하자면 역시 난 알고 읽기보다는 모르고 읽기가 좋다.

앞으로도 작가에게 관심갖는 일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들은 그렇게 멀리 강 건너에 있는 것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알듯 말듯한 그런 상태로 있어주길 바란다.

반란자들이라고 했지만 그들 가운데는 '투사'가 있는가하면 '도망자'가 있고 또한 '중재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는 그들의 작품을 통해 재회 하리라.

거기서 그들이 투사였는지 도망자였는지 아니면 중재자였는지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정해가리라.

293쪽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말' : "모든 사물은 적어도 여섯개의 시각, 다시 말해 네 방향과 위아래 두 방향에서 볼 수 있잖아요."

난 나의 방향에서, 넌 너의 방향에서, 그들은 그들의 방향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면 되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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