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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왕자가 여우를 길들였고, 그 길들어감을 여우가 기뻐하고 행복해 했던 것처럼, 이 책의 주인공 늑대 브레닌과 롤랜즈 사이에도 닮은 모습이 눈에 띈다. 다만, 인간인 롤랜즈가 늑대 브레닌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늑대 브레닌에게 인간 롤랜즈가 길들어져 갔던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억지스러운 느낌이 이런 관계 구도는 들여다 볼수록 납득과 이해, 그리고 확신으로 변해갔다.
확실히 그들은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었다.
늑대가 멸종위기에 처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차치하고서,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늑대에 대한 선입견 혹은 편견을 이야기하라면 '늑대는 집요하다', '늑대는 위험한 맹수다', '늑대는 보호받아야 한다', '인간은 늑대와 공존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식이 될 것이다. 덧붙이자면 '늑대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결국 인간보다 열등한 짐승에 불과하다', '인간이 이룩한 문명 앞에서 늑대는 초라하게 사라져 갈 뿐이다'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은 변하기 나름이다. 그리고 그 계기는 늘 우연히 그리고 갑자기 찾아드는 법이다.
바다는 강보다 크기에 세상 모든 강물을 받아들여도 넘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낮은 곳에 자리하기를 꺼리지 않고 모든 것을 끌어 안아준다. 그런 바다를 보고 "바다는 우리 인간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우리가 버리는 모든 것을 당연히 받아 들여야 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 고쳐먹기를.)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위에 어떤 위협도 없던 때, 아직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인간이라 믿던 날들에는 인간 이외의 모든 것은 그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이용가치'에 따라 그 중요성이 결정되는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삶의 수준이 올라갈 수록 자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정말 인간은 늑대와 소통을 통한 공존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인가?
늑대와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사랑과 애정으로 끈끈히 이어질 수 있는가?
늑대를 '사육'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함께하는 것이 가능한가?
무엇보다 사람이 늑대를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늑대에게 길들어져 가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간단히 네 개 정도의 물음을 떠올려 봤지만, 더 많은 물음이 떠올랐대도 결국 한 마디로 줄일 수 있다.
「지성과 야성이 생애 최고의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인 마크 롤랜즈는 이 책에 적혀있는 이야기들이 자신의 자서전이자, 형제였던 늑대 브레닌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결코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지성의 상징인 철학 교수와 야성의 상징인 늑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답을 찾아가 보자.
우리는 살면서 수 없이 많은 편견과 부딪힌다. 어린왕자를 읽으며 어린왕자와 여우의 길들임에서 느꼈을 감동이 어떻게해서 단순한 허구적 감상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일까?
늑대는 우리가 흔히 흉내내는 것처럼 단순히 "아오~"하고 울지 않는다. 늑대의 울음 소리를 단순화하는 것처럼 인간은 열등함과 우월함 또한 단순히 경계짓는다. 동물은 고도의 사고능력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훈련을 통해서만이 공존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본성을 억누르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특히 맹수와 같이 강한 힘을 지닌 동물의 경우에는 사로 잡아 우리에 가두어 놓거나, '사살'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동물들은 '훈련'이라는 과정을 통해 본성을 억누르고, '굴복'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정말 그 방법, 그 길 밖에 없는 걸까?
저자는 이 책, 철학자와 늑대를 통해 사람들의 편견, 고정관념으로 박혀있는 늑대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바로 브레닌과 함께하며 브레닌을 통해 배우고, 깨닫고, 이해할 수 있게된 철학적 화두들에 해석을 보태는 것이다.
늑대와 같은 동물과 어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핑계에 불과할 뿐 정말 이야기 하려던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인간은 자신이 규정한 모습을 믿는 동물이다"라는 전제하에 "인간만이 이성을 지니고 있고, 그렇기에 우월하며 다른 동물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의 태만함 또한 같은 이유에서 허락될 수 있다."는 흔한 생각에 태클을 거는 것은 물론, 인간이 문명화, 최고의 상태와 최악의 상태, 사회 계약과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른 인간의 '행복중독증상', 미래를 꿈꾸고 언제나 미래를 목표로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집착, 마지막에는 인간의 존재 증명에 이르는 수 많은 철학적 화두를 짚어가는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간단히 감상을 적어야지하고 시작했던 것이 이렇게 부풀고 늘어나서는 뭐가 뭔지도 모를 모양이 되어버렸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하면 눈물을 머금고 억지를 부려서라도 세 가지는 꼽고 싶다.
하나는 "인간이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미 죽어 세상에 없는 존재, 다시는 볼 수 없는 존재의 존재를 증명하고 증거할 수 있는 방법은 그가 미친 영향을 통해 내가 갖게 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외에는 없다. 온 힘을 다해 나의 삶으로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말고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둘은 "사랑한다면 그 존재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설사 그가 나를 진정 미워하고 원망하게 되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존재의 죽음 앞에서 나라면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언젠가 모든 것에게는 죽음이 찾아오기 마련이야. 인간의 힘으로는 거부할 수도 비켜갈 수도 없는 필연적인 일인거야. 그에게 고통을 주면서, 나의 행동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그가 받을 배신감과 불신, 미움과 사랑의 상실을 감수하는 것보다 그냥 편하게 보내주는게 낫지 않겠어?" 하고 말이다.
정말 사랑하는 존재의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면서도, 그 사랑을 잃는 것보다 준비없이 존재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 모습이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그 공백은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을테니 말이다.
마지막 셋은 "세상 속에서 '나'를 규정하고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결국 내가 아닌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최초에 어떤 과정을 통해 사회를 만들고, 공존을 위한 합의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 인간은 무척 불안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달리 불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에대한 답, 즉 '실존의 증명'에 대한 불안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타인과 어울릴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얻는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처럼 보이는지 자꾸만 묻는 것이고, 더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리라.
결국 인간은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타인이 자신을 기억해줌으로써 자신을 기억할 수 있게 된다.
개인적 의견으로 처음부터 이 책을 '철학'이라는 주제로 읽어나가지는 말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분명 경험을 통해 얻은 깊이가 남다른 통찰이 담겨있는 것 또한 사실이고, 철학적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덤벼들면 이 책의 진짜 묘미를 놓치고 말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먼저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살짝 이야기하자면 (주인공)브레닌은 결코 서둘러 덮치거나 하지 않았다. 언제나 사람보다 더 현명하게 또 믿음직스럽게 행동했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시간을 살아가고 늑대는 순간을 살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인간이 느끼는 불행과, 늑대가 느끼는 행복을 결정짓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고 한다.
순간을 살아가라는 말은 우리도 익히 들어온 "카르페디엠"이라는 말 덕분에 무척 익숙하리라.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순간에 집중하고 그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걸까? 단순히 매 순간 순간이 아니라 인생의 결정적인 그 한 순간에서 조차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고 불행과 씨름하고 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이 느끼는 행복의 절대량은 절대자인 신이 미리 정해둔 것도 아닐 뿐더러, 세상이 정해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 아닐까?
이 책은, 일단은 늑대 브레닌과 철학자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마크 롤랜즈의 삶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으로 시작하길 추천하고 싶다.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함께 그려보고, 늑대 브레닌이 정말 행복했을지, 행복했다면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했을지, 조금 더 나아가자면 무엇이 아쉬운지 찬찬히 그들의 11년의 이야기를 들여다 봐주었으면 싶다.
많이 웃었고, 울 뻔했고, 또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그 기쁨과 슬픔과 생각을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안에 있는 고대의 늑대가 나의 행복을 이끌어주길 바라며 횡설수설 뿐인 감상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