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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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가 여우를 길들였고, 그 길들어감을 여우가 기뻐하고 행복해 했던 것처럼, 이 책의 주인공 늑대 브레닌과 롤랜즈 사이에도 닮은 모습이 눈에 띈다. 다만, 인간인 롤랜즈가 늑대 브레닌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늑대 브레닌에게 인간 롤랜즈가 길들어져 갔던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억지스러운 느낌이 이런 관계 구도는 들여다 볼수록 납득과 이해, 그리고 확신으로 변해갔다.

확실히 그들은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었다.

 

늑대가 멸종위기에 처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차치하고서,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늑대에 대한 선입견 혹은 편견을 이야기하라면 '늑대는 집요하다', '늑대는 위험한 맹수다', '늑대는 보호받아야 한다', '인간은 늑대와 공존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식이 될 것이다. 덧붙이자면 '늑대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결국 인간보다 열등한 짐승에 불과하다', '인간이 이룩한 문명 앞에서 늑대는 초라하게 사라져 갈 뿐이다'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은 변하기 나름이다. 그리고 그 계기는 늘 우연히 그리고 갑자기 찾아드는 법이다.

 

바다는 강보다 크기에 세상 모든 강물을 받아들여도 넘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낮은 곳에 자리하기를 꺼리지 않고 모든 것을 끌어 안아준다. 그런 바다를 보고 "바다는 우리 인간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우리가 버리는 모든 것을 당연히 받아 들여야 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 고쳐먹기를.)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위에 어떤 위협도 없던 때, 아직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인간이라 믿던 날들에는 인간 이외의 모든 것은 그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이용가치'에 따라 그 중요성이 결정되는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삶의 수준이 올라갈 수록 자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정말 인간은 늑대와 소통을 통한 공존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인가?

늑대와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사랑과 애정으로 끈끈히 이어질 수 있는가?

늑대를 '사육'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함께하는 것이 가능한가?

무엇보다 사람이 늑대를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늑대에게 길들어져 가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간단히 네 개 정도의 물음을 떠올려 봤지만, 더 많은 물음이 떠올랐대도 결국 한 마디로 줄일 수 있다.

「지성과 야성이 생애 최고의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인 마크 롤랜즈는 이 책에 적혀있는 이야기들이 자신의 자서전이자, 형제였던 늑대 브레닌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결코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지성의 상징인 철학 교수와 야성의 상징인 늑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답을 찾아가 보자.

 

우리는 살면서 수 없이 많은 편견과 부딪힌다. 어린왕자를 읽으며 어린왕자와 여우의 길들임에서 느꼈을 감동이 어떻게해서 단순한 허구적 감상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일까?

늑대는 우리가 흔히 흉내내는 것처럼 단순히 "아오~"하고 울지 않는다. 늑대의 울음 소리를 단순화하는 것처럼 인간은 열등함과 우월함 또한 단순히 경계짓는다. 동물은 고도의 사고능력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훈련을 통해서만이 공존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본성을 억누르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특히 맹수와 같이 강한 힘을 지닌 동물의 경우에는 사로 잡아 우리에 가두어 놓거나, '사살'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동물들은 '훈련'이라는 과정을 통해 본성을 억누르고, '굴복'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정말 그 방법, 그 길 밖에 없는 걸까?

 

저자는 이 책, 철학자와 늑대를 통해 사람들의 편견, 고정관념으로 박혀있는 늑대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바로 브레닌과 함께하며 브레닌을 통해 배우고, 깨닫고, 이해할 수 있게된 철학적 화두들에 해석을 보태는 것이다.

늑대와 같은 동물과 어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핑계에 불과할 뿐 정말 이야기 하려던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인간은 자신이 규정한 모습을 믿는 동물이다"라는 전제하에 "인간만이 이성을 지니고 있고, 그렇기에 우월하며 다른 동물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의 태만함 또한 같은 이유에서 허락될 수 있다."는 흔한 생각에 태클을 거는 것은 물론, 인간이 문명화, 최고의 상태와 최악의 상태, 사회 계약과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른 인간의 '행복중독증상', 미래를 꿈꾸고 언제나 미래를 목표로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집착, 마지막에는 인간의 존재 증명에 이르는 수 많은 철학적 화두를 짚어가는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간단히 감상을 적어야지하고 시작했던 것이 이렇게 부풀고 늘어나서는 뭐가 뭔지도 모를 모양이 되어버렸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하면 눈물을 머금고 억지를 부려서라도 세 가지는 꼽고 싶다.

 

하나"인간이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미 죽어 세상에 없는 존재, 다시는 볼 수 없는 존재의 존재를 증명하고 증거할 수 있는 방법은 그가 미친 영향을 통해 내가 갖게 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외에는 없다. 온 힘을 다해 나의 삶으로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말고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면 그 존재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설사 그가 나를 진정 미워하고 원망하게 되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존재의 죽음 앞에서 나라면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언젠가 모든 것에게는 죽음이 찾아오기 마련이야. 인간의 힘으로는 거부할 수도 비켜갈 수도 없는 필연적인 일인거야. 그에게 고통을 주면서, 나의 행동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그가 받을 배신감과 불신, 미움과 사랑의 상실을 감수하는 것보다 그냥 편하게 보내주는게 낫지 않겠어?" 하고 말이다.

정말 사랑하는 존재의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면서도, 그 사랑을 잃는 것보다 준비없이 존재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 모습이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그 공백은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을테니 말이다.

 

마지막 셋"세상 속에서 '나'를 규정하고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결국 내가 아닌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최초에 어떤 과정을 통해 사회를 만들고, 공존을 위한 합의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 인간은 무척 불안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달리 불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에대한 답, 즉 '실존의 증명'에 대한 불안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타인과 어울릴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얻는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처럼 보이는지 자꾸만 묻는 것이고, 더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리라.

결국 인간은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타인이 자신을 기억해줌으로써 자신을 기억할 수 있게 된다.

 

개인적 의견으로 처음부터 이 책을 '철학'이라는 주제로 읽어나가지는 말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분명 경험을 통해 얻은 깊이가 남다른 통찰이 담겨있는 것 또한 사실이고, 철학적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덤벼들면 이 책의 진짜 묘미를 놓치고 말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먼저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살짝 이야기하자면 (주인공)브레닌은 결코 서둘러 덮치거나 하지 않았다. 언제나 사람보다 더 현명하게 또 믿음직스럽게 행동했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시간을 살아가고 늑대는 순간을 살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인간이 느끼는 불행과, 늑대가 느끼는 행복을 결정짓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고 한다.

순간을 살아가라는 말은 우리도 익히 들어온 "카르페디엠"이라는 말 덕분에 무척 익숙하리라.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순간에 집중하고 그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걸까? 단순히 매 순간 순간이 아니라 인생의 결정적인 그 한 순간에서 조차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고 불행과 씨름하고 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이 느끼는 행복의 절대량은 절대자인 신이 미리 정해둔 것도 아닐 뿐더러, 세상이 정해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 아닐까?

 

이 책은, 일단은 늑대 브레닌과 철학자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마크 롤랜즈의 삶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으로 시작하길 추천하고 싶다.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함께 그려보고, 늑대 브레닌이 정말 행복했을지, 행복했다면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했을지, 조금 더 나아가자면 무엇이 아쉬운지 찬찬히 그들의 11년의 이야기를 들여다 봐주었으면 싶다.

 

많이 웃었고, 울 뻔했고, 또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그 기쁨과 슬픔과 생각을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안에 있는 고대의 늑대가 나의 행복을 이끌어주길 바라며 횡설수설 뿐인 감상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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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배신 - 화이트칼라의 꿈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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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뒷통수 맞았다느니, 배신 당했다느니 하는 말을 쓰고 있지 않나? 흐흠, 그런데 배신이란 무엇인가?

背信이라 쓰고 배신이라 읽는 이 말에는 우리가 당했다고 말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 존재한다. 바로 믿음이나 의리를 전제 할 것이바로 그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 전제를 염두에 두고 잠시 들여다 보기로 하자.

희망의 배신을 읽기 위해 전에 「긍정의 배신」과 「노동의 배신」을 먼저 읽어봤다. 그리고 조금 더 전에 읽었던 「오! 당신들의 나라」도 그 내용을 되새겨 봤다.

바버라 여사는 입담이 참 좋은데(책 속에서만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만)(나쁜 말로는 거친데), 지금까지 읽었던 바여사의 책 중에서 가장 순화되고 다듬어진 느낌이 드는 책이라 어딘가 어색하기도 했다.

 

이 책은 미국에서 2005년 가을에 출간 되었다고 한다. 수비학적으로 7이라는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7년이 지난 올해 가을 우리나라에 이 책이 출간된 것은 어떤 인연의 발로였을까? (하는 시덥잖은 생각도 해가며 읽었다)

바여사는 회의론자이자 지극히 냉정한 현실론자이고 궁금한 것은 직접 시도함으로 알아내려는 적극성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학자(생물학자)라기보다 왠지 사회와 현실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는(그래서 저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것일테지만) 문제 제기자로서의 역할에 사명감을 느끼고 있는 운동가의 느낌이 더 강하다.

 

왠지 서설이 길어지고 말았는데, 앞서 말한 '배신'이란 누가 누구에게 당한 것을 말하는 것인가? 이 책에서 말하는 '배신'은 좁게는 '업계'를 말하고 조금 넓게 보면 '미국'을 말하고 더 확장해서 보자면 자본주의를 채택한 거의 모든 국가를 말한다.

 

그럼 그들은 '배신당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그들을 신뢰했을까? 이 질문은 참 어리석게 들리겠지만, 읽는 내내 뇌리를 맴돌았던 물음이었기에 묻지 않고 넘어갈 수 없었다. 답을 바라고 적어 놓은 것도 아니다. 그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을 뿐.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 그리고 노동 현장(지적, 육체적 노동)에서 열심히 능력을 발휘하고 계시는 분들이 품는 일반적인 목표는 '화이트 칼라' 진입일 것이다. 온몸에 오물이나 기름때를 묻히며, 땡볕 혹은 지하에서 육체를 혹사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되도록이면 편하면서 더 높은 소득을 바라는 것은 솔직한 태도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경향이다.

하나같이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리는 것도, 타인보다 조금이라도 돋보이려 하는 것도, 가끔 불법을 저지르더라도 나은 성적표(학업 성적 뿐 아니라 사회에서 매기는 거의 모든 형태의 결과에 대한 평가)를 받기위해 악을 쓰다시피 하는 것도 다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그런 온갖 노력(어쨌든 노력은 노력이니까)을 통해 진입한 '화이트 칼라' 안에서도 결코 안심할 수 없게 된 것이 현실이 되었다. 아니, 오히려 능력이 높은 것이 추락을 부추기기도 한다니 이젠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알 수 없게 된 셈이다. 그야말로 세상은 혼돈,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고, 믿을 것도, 믿을 사람도 없이 늘 경계하고 의심하고 죽을 힘을 다해야 할 때와 적당히 해야 할 때를 살펴야만 하는 그런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자, 이제 무엇을 믿겠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이 책 속에서 자신의 이력서로 화이트 칼라의 직업 세계에 진입하기 위한 여러 방면의 노력을 직접 보여준다. 코치를 받고, '네트워킹'이라는 인적 자원의 구축에 힘쓰며, 수 백 군에 이력서를 보내고, 자신의 경력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온갖 노력하며, 마지막에는 부지런히 취업 박람회 장도 찾아 다닌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녀가 취업을 시도했던 10개월 동안 얻은 것이라고는 수 천 달러에 이르는 온갖 비용을 지불했다는 사실과 그 결과 몇 군데에서(서너 군데) 취업 제의를 받았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비정규직에 사회보장제도가 전혀 지원되지 않는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취업 상태였을 뿐이다. 더하자면 수 개월에서 수 년에 걸쳐 취업을 위해 발버둥치는 '실업자'들의 몸부림을 목격했고 말이다.

 

미국의 이야기, 그것도 2005년의 미국의 이야기라고 하면 좀처럼 "팍!"하고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실업문제는 큰 이슈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언제나 대선의 공약에 '일자리 창출'이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최근에는 그 취업 문제 뿐 아니라 '워킹푸어'라 불리는 일하면서도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회적 문제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이자, 나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 책의 한계는 현상의 보고와 문제의 제기에 그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사실 그보다 더 많은 걸 바라는 것은 못할 짓이기도 하다. 당장에 바버라 여사가 운영하는 사이트에 쫓아가서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라며 따진다해도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희망의 배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도 있다.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해준다는 이 효과는 대단히 중요하다. 충격에 대비한 사람들은 대부분 좀 더 유연히 그 충격을 이겨낸다. 어설프게 준비하고 있다가 예상보다 커다란 충격에 당황하지 않도록 굳은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도 얼마만큼의 절망을 맛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버라 여사의 책은 치료제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예방주사는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현재까지 감기에는 완벽한 치료제가 없다. 왜냐하면 감기에 걸리는 원인이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감기약은 바이러스를 제압해서 증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가 일으킨 증상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래서 감기는 예방이 최고라고 말하며 겨울, 느닷없이 찾아들 '독감'에 대한 '내성'을 키우기 위해 예방접종을 하는 것이다.

 

경제활동, 혹은 사회활동 가운데 발생하는 실업이나 퇴직은 원천적인 봉쇄가 불가능하며 통제하기도 어렵고, 갑작스레 들이닥치곤 하는 참 곤란하고 또 고약한 문제다. 모두가 당할 수 있는 경우라면 어떤 사람이 더 유연하고 차분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바로 꾸준히 준비해 온 사람일 수 밖에 없다. 지금 내가 끄적이는 말들이 허울뿐인 이상론, 혹은 실천이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한 이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회를 바꿀 수 없다면, 그럼에도 그 사회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내가 바뀌는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은 「희망의 배신」이지만,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아직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혼자서는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임을 알기에 더 많은 조력자, 협력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도 못미덥겠지만, 배신 당할 줄 알면서도 믿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 아닐까?

속는 셈 치고,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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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연습 - 마음의 덫에서 벗어나는 셀프 테라피
박용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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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쩌면 정말 드물게 보이는 서평의 일면을 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든다. 하지만 그것 또한 두고 볼 일이다.

 

이 책의 첫 장(the first chapter)을 읽으며 느낀 것은 저자 스스로도 이 책 속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지나치게 뜬구름잡기식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닐까하는 점을 경계하고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쪽 부류의 책은 보통사람들이 읽는 만큼은 읽었노라고 생각하기에 사소한 흐름 하나가 책 전체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결국 완성도를 낮추는 결과를 불러오는 것을 특별히 주의해서 만들어야했을 것이다라는 점에 생각이 닿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평점을 말하자면 특별히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특별히 나쁜 책이라고 말하지도 않을 '보통' 정도 수준이었다. 조금은 거슬려 신경이 쓰이는 점도 몇 가지 있었고, 조금은 색다른 개념이 들어있어 새롭게 느낀 점도 있었으니 장단점을 상쇄한 보통이 되는거다.

 

이 책의 표지는 뭐랄까 '프로이트의 의자'를 떠올리게 한다. 탁자 밑에 놓여있으면서 가방 속에 담겨 가려진 것이 아니라 드러나 있는 가면 또한 심층자아, 즉 "이제부터 무의식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거기에 마주한 두 개의 의자는 '자신과의 대면'을 상징하는 것이리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모든 책을 겉표지부터 읽어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의 표지는 살짝 읽어보고 넘어가고 싶었다.

 

많은 책이 이야기하듯, 이 책 역시 인간의 감정과 행동은 무의식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그 무의식이 형성되는데 제공된 원인이 과거의 어떤 경험 속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원인과 마주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과거에서 현재로, 유아기의 이야기에서 성인기의 이야기로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감정을 지닐 수 있는 방법을 전하고 있다고 하면 될까.

 

저자의 경계심은 생각보다 빨리 흐트러진 것 같다. 절반쯤 읽었을 때 저자는 '프로이트적인 해석'을 통해 '환자'를 상담하고 지도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계기는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다. 저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누구나 거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이 견해는 지지자도 많지만 거부하는 학자들도 많은 이야기로 한 권의 책에서 일반화 시키는 것은 독자에게 '배타적 증폭(의견이 같은 사람들의 말만 들음으로써 판단착오를 강화시키는 것)'을 부추기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자면, 이런 전제를 보며 아들러는 분명 울었을 것이다.)

 

첫번 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면 두번 째는 결국 자신의 문제이기에 자신이 극복해야만 한다는 견해다.

긍정심리학이 세상에 등장하고 난 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경향이 "결국 모든 것은 스스로의 책임, 그러므로 극복해야 하는 것도 자신이다"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의사이고 많은 환자들을 상담하며 경험하고 느꼈겠지만, 어떤 일들은 혼자서는 도저히 치유하거나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기에 의사가 있고, 상담 전문가가 있는 것이 아니던가?

자기 계발의 관점에서 보면 크게 두 가지 견해가 두드러지는데, 하나가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개인의 책임일 뿐 아니라 개인을 둘러싼 환경과 사회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다. 감정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지만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이 책 속에서도 그 환경 이야기를 거듭거듭 언급하기는 하지만 결국 극복해야 하는 과제는 개인에게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이야기는 이 책의 장점이면서도 단점이기도 하다고 느껴지는 견해(?)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은 '마음의 덫'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 표현을 빌어쓰자면 '분류의 덫'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빠뜨렸다는 점이다.

내가 과문하고 비전문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스스로를 '규정짓기 좋아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비슷하게 쓰고 싶은 다른 표현을 적어보자면 '동일화 혹은 동일시의 욕구'랄까?

이 책은 마음이나 감정을 위협하는 덫이나 욕구를 여러 기준을 사용해서 분류해 놓았다. 그것은 분명 치료와 치유, 진단에는 유리할 것이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환자(이 표현은 아들러가 그랬듯 '용기를 잃은 사람'이라고 바꾸고 싶지만)가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게 하는데 편할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를 떠올려 볼 때, 뭔가 나와 비슷하게 느껴지거나, 그렇기를 바라는 것에 점점 가까워지려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 조금 다른 이야기라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많은 심리학 책에서 이야기하는 '낙인' 혹은 '스티그마 효과(부정적인 낙인이 찍히면 행태가 나쁜 쪽으로 변해 가는 현상)'에 대한 우려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 뿐 아니라 심리를 다루고 있는 한 권의 책을 읽은 독자가 자신에 대한 부정적 표상을 새길 수 있을 것이란 가능성에 대한 염려인 셈이다.(개인적 견해를 적자면, 심리나 무의식 마음을 다루는 책들에는 그 책과 상반되는 의견이 담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하는 문구가 들어갔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주저리주저리 불만만 툴툴 늘어놓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책이 싫지 않다. 오히려 사랑스럽고, 고맙게 여기고 있다는 말이 솔직한 고백이리라. 왜냐하면 이런 책들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이 책의 제목인 <감정연습>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일까 지금은 참 많은 의미에서 좋은 사람,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고 또 믿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말을 반복해서 적고 있는데, 그 말에는 조금의 거짓도, 가식도 없을 것이다.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기에 누구의 도움도 도움이 될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그래서 더 안타깝고 답답하게 여겼을 일도 많았으리라. 오죽했으면 책으로 내놓았을까.

 

저자의 말처럼 감정 또한 연습하면 조절할 수 있다. 그 산증인이 바로 나이기도 하다. 사실 저자가 말하는 과거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많은 부분에서 "나도 그랬던 때가 있었지."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에도 의견을 같이 했다. 감정의 문제는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 개선하고 나아지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필수적이다. 저자를 찾은 사람들 같은 경우엔 그나마 나은 경우고 아마 마음의 문제, 감정의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 끌어안고 절망하기를 반복하고 있으리라.

 

양초학설이라는 재밌는 학설을 접한 것은 이 책에서 얻은 작은 소득이다. 마음의 갈등, 화는 감정이 녹아서 만들어진 얼룩이고 그 얼룩을 지워내기 위해서는 한 번 더 녹일 필요가 있다. 참 멋스러운 방법이지 싶다. 또 이치에도 맞고 말이다.

결국 인간은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데, 합리화의 방법과 지점만 다를 뿐 다들 부단히 자신의 행동과 생각, 일어난 사건과 결과를 합리화하는데 참 부지런하지 않던가. 그저 한걸음 물러나 합리화에 급급해할 것인가, 더 나은 자신을 찾아 나설 것인가의 선택은 결국 개인의 손에 달려있다.

갈등이 있다면 화해를 해야하고 풀어야하는 것이 이치다. 자신과도 타인과도 사회, 세상과도 화해가 필요하다. 그런 화해를 위해 이 책은 좋은 연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실전 참고서처럼 '실습편'이 있으니 따라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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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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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간사하게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자마자 준비했다는 듯 쏟아져 나오는 '모옌'의 책을 덥썩덥썩 사버렸다. 11월 7일로 출간이 미뤄진 <열세 걸음>은 예약 주문을 이미 2주쯤 전에 마쳤고, <개구리>가 또 좋다고 하기에 귀가 솔깃해진 참이다.

음, 정말 안타까운 것은 중국의 근현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 책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의 재미를 정말 깊이 맛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점이다. 읽으면서 "여기는 어떤 사건, 누군가를 풍자한 부분이 아닐까?" 라거나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라거나 하는 일이 잦다보니 '이런 무책임하고 미숙한 독자라 미안하구려'라며 거듭 사과를 하며 읽어야했다.

하지만 이 말은 과장된 말이고 과장된 만큼 거짓된 말이기도 하다. 중국의 혁명기에 벌어진 과장과 거짓을 은근히 보이되, 그 은근함이 오히려 적나라함이 되는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모옌은 필명으로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입이 아닌 글로, 글 가운데서도 직설적인 말이 아닌 이야기를 통해 저절로 느낄 수 있게 만들겠다는 포부랄지, 목표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중국을 보면 놀랄만큼 빠르게 발전하고 또 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중국이 소수민족과의 갈등 해결에서 보이는 태도와 중국에 투자했던 기업과 국가들의 실패담을 보면 정말 중국은 변화했는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귀결이다.

 

모옌이 이 책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에 담은 세 편의 이야기에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이루어진 지식인과 사회의 부유층들이 겪었던 시련과 고난 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혁명이라 믿었던 '약자들'의 고난 또한 생생히 담겨 있다.

민주화가 한창이던 우리나라 60년 70년대 그리고 80년대 초까지만해도 걸핏하면 '빨갱이'로 몰려 사회에서 추방에 가까운 멸시와 고난을 당해야 했고, 어떤 정당한 검증이나 공정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듯, 중국 역시 지배층의 사정에 따라 몰수하고, 모욕하고, 징계와 고난을 내리고, 박탈하고, 기만하는 일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모옌은 정말 노골적이지 않게, 번드르한 껍데기를 벗기고, 그럴듯한 거죽을 들춰 보여준다. 그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이게 그런 뜻은 아닐까?라고 생각해도 되는건가 싶을 만큼 어떤 의미로는 '능청스럽다'. 역설적 찬양, 반어적 추종은 감초처럼 작용한다.

 

이 책에 담긴 세 이야기의 주인공, 딩사부와, 샤오뤄한, 주충런은 제각각 계급과 직업이 다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분명 공통점이 있었다. 그 공통점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읽는 재미가 될 것이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근현대에 중국이 어떤 혼란과 시련을 거쳤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들을 읽다보면 중국이 어떻게 현재에 이르렀는가하는 것에 대한 한가지 견해를 얻을 수 있다. 중국인이 본, 중국이라고 하면 될까?

 

흔히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주석도, 총리도 아닌 '공산당'이라고 한다. 공산당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면서 실체가 있는 모든 것의 위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지배하에 놓여있다. 하지만 결국 공산당을 만드는 것도 유지하고 이끌어 가는 것도 사람일 것이고, 마치 새나 물고기 곤충이 거대한 집단을 이루어 자신들의 생존을 강화하기 위해 '집단지능'을 갖고 '무리지능'에 이끌리는 것처럼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세상에 대해 불합리하게 보일지라도 우선시되는 것이 아닐까.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 사회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일부 이양받아 국민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권력을 지니고, 국민은 그 힘이 규정하는 바를 자신이 정한 것처럼 지킬 의무를 부여받는다. 과격한 의미에서 그 의무를 실행하지 않겠노라고 한다면 자신이 그 나라를 떠나는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왠지 이야기가 묘하게 돌아온 것 같지만 '사회'와 '국가'가 지니는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는 기회였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작가에 대해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 그 생각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조금 더 모옌과 중국을 알고 난 후 한번 더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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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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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시대와 인종, 지역을 뛰어넘어 과거 역사 속에서 그리고 현재 세계 속에서 실패한 나라와 성공한 나라를 구분하고 그 성공과 실패에 숨겨진 뒷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세계의 역사와 경제에 숨은 이야기들을 듣는 동안 저절로 이런 의문이 뇌리에 멤돌게 된다.

 

"무엇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가?"

"정말 문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 이루어낸 성공인가하는 것이며, 그것이 지속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아닌가?"

 

사실 이 의문들에 대한 답은 이 책 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또 강조되어 되풀이 된다.

과거와 현재에서 우리가 보아왔고, 또 보고있는 거의 모든 국가의 성패가 닮은 꼴을 갖고 있다면 그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단편적으로 보이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국가의 성공과 실패는 경제적 번영이라는 형태에 대해서다. 하지만 사회와 경제, 그리고 정치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떠올려보면 오히려 종합적인 이야기가 된다.

우리와 정말 가까이 있으며, 무척 닮았으면서도 상반된 길을 가는 나라 '북한'의 이야기도 자주 등장하니 관심을 가져볼만 하지 않겠는가?

 

정치제도가 사회제도를 결정짓는다.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하는 사회, 창조적 파괴가 수반되지 않는 성장은 심각한 좌절을 겪게 된다.

다양한 구성원이 함께 동참하는 포용적 제도가 성장의 동력이 된다.

 

700쪽이 넘는 책 속에 담긴 이야기를 몇 줄로 줄여보면 위에 적은 세 줄 정도로 줄여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몇몇 특이한 경우(우리나라 등)가 있기는 하지만 세계를 주도하는 성공한 국가와 빈곤과 분쟁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패한 국가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치 경제적으로 착취적 성향을 띤다는 것이다. 기득권은 지속적인 착취를 위해 사회의 기반 시설, 교육, 제도 개선에 투자를 하지 않는다. 설사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과두제의 철칙'에 의해 또 다른 세력이 기득권이 되어 착취를 지속해간다.

결국 비극의 연쇄를 끊지 못하고 쇠퇴와 실패를 반복한다.

 

견해의 차이가 국가의 정치제도의 방향을 가르고, 그것이 경제제도에 영향을 미치며 국가의 성패를 결정짓는 주요인이 된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역사는 두 번 되풀이 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과두제의 철칙이다.

이 철칙을 부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특정 계층의 힘이나 개인의 지식, 급진적인 혁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과정에는 오랜 노력과 점진적인 개혁이 요구되며, 다양한 계층의 다수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한 때 성공과 번영을 구가하던 나라가 쇠퇴를 거듭하는 것과, 한 없이 낙후되어있던 국가가 급격한 발전을 이루어내는 것. 그 모든 것에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정치제도적 요인과 경제제도적 요인이 숨어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변화와 개혁을 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 또한 역사는 보여준다.

 

미국과 영국의 성장, 아프리카 등 식민지를 거친 국가가 겪고 있는 쇠퇴의 연쇄, 일본의 발전과 중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

그들 사이의 희비를 갈랐던 것이 바로 정치를 주도하는 기득권이 성향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흔히 사회가 계약에 의해 생겨났다고 알고 있다. 그렇기에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원해서 사회가 생겨난 것일까? 이러한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내놓는 견해는 조금 다르다. 사회는 자연적으로 생겨났으며, 우리는 그 사회에 속한 부속품과 다르지 않다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작지 않은 커다란 차이를 낳는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관심과 앎이다. 우리 나라는 비교적 운이 좋았다고 할 수 밖에 없을만큼 급격한 발전과 성공을 이루어왔다. 하지만 최근의 사회 이곳 저곳에서 불거지는 문제들은 우리의 발전과 성공의 그늘에 숨어있는, 포용적이지 못하고, 착취적인 요소들의 부작용을 꼬집어 내고 있는 듯 보인다.

무엇이 진정한 성공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인지, 이 성공을 지속적인 것으로 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해 볼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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