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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 - 악의 시대, 도덕을 말하다
샘 해리스 지음, 강명신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평점 :
우리는 흔히 앉은 자리, 의자에 따라 바라다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는 말을 한다.
쉬운 예로 출근시간 서울의 지하철을 떠올려 보자.
어느 날은 운이 좋아 의자에 앉아서 편안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책도 읽고, 음악도 들으며, 좁다거나 지옥같다는 생각에 휘말리지 않았다. 단지 밀고 밀리며 필사의 탈출 작전을 실행하는 하차의 순간에만 잠시 힘을 썼을 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계속된다면 '행운'이라 부르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다음 날은 서서 가게 되는 거다. 거의 같은 시간, 거의 같은 자리에 있음에도 어제의 편안하던 풍경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밀고 밀리는 보이지 않는 몸싸움에 시달려 아침부터 녹초가 되어버린다.
이것이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의 정체다. 아주 사소한 일, 작은 조건의 변화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해석을 달라지게 한다.
이 책은 그러한 풍경을 '도덕'으로 옮겨 놓고 있다. 문화와 도덕, 종교와 무신론, 신과 과학 간의 풍경의 차이를 확인시켜준다.
이해하기 어렵고,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데다, 이해하기 싫은 이야기도 나오지만 분명 흥미로운 주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만, 우리 나라는 비교적 종교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의 충돌이 적은 편이라 이 책의 서술 배경을 이해하는 데 상대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란 건 이야기해두고 시작하련다.
책의 원제는 The Moral Landscape(도덕의 풍경)이다. 저자는 상대적인 도덕이란 있을 수 없으며, 도덕이 더이상 비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도덕의 풍경은 하나가 아니며, 봉우리에 빗대어 표현한 것처럼 여러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창조론과 진화론을 두고 종교계와 과학계가 충돌을 일으켰다는 기사를 읽어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그만큼 종교에 관대한 것인지,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깊은 것인지, 혹은 아무래도 좋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이 얼마나 팔릴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난 마케터도 아닌데) 저절로 떠올랐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거기다 온통 시커먼 표지란 신이 없는 암흑을 뜻하는 것일지 혹은 도덕 의식이 함몰된 도덕적 해이상태(Moral hazard)를 의미하는 것인지와 무관하게 뭔가 무거워 보여 부담이 된 것도 있었고, 무거운 주제에 종이 마저 무거운 재질이라 그 무게가 더욱 늘어나버린 탓도 있었다.
여러 봉우리 어디에서 봐도 이 책이 무겁게 느껴질 수 밖에 없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무거운 책이 반가울 때가 있다.
카프카가 말한 것처럼 내 안의 얼어붙은 사고를 깨뜨릴 계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무게가 무거운 만큼 그 파문 또한 큰 법이다.
딱딱한 광물 일 수록 더 높은 경도를 가진 매개가 필요한 '과학적 원리'의 연장선인 거다.
저자는 '뇌과학자'다.
심리학자도, 종교학자도, 역사학자도 철학자도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해석한다. 결국 그는 뇌과학자 답게 인간의 모든 것, 감정, 도덕, 정의, 믿음 등을 뇌의 활동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전작인 <자유의지는 없다>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는 것조차 사실은 기억과 경험에 의한 뇌의 판단에 불과하다는 주장처럼 말이다.
또한 저자는 뇌과학자이면서 '신무신론자'로 불리는 그룹의 일원이다.
어쩌면 조금은 과격하게 느껴질 만큼 독단적으로 그는 종교의 허위성을 말하며, 그 허상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그는 가차 없는 비판자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가혹한 비판자로서 저자는 인간의 존엄성의 근원이라고 말하곤 하는 자유의지를 부정했고, 신의 창조물이라는 상징을 부수어 버렸으며, 도덕감정을 단순한 뇌 속에서 이루어지는 화학적 작용으로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내놓는 사례들을 모두 수긍할 수는 없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사고와 시야를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었다면 그 목적은 얼만큼은 달성했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 책을 다 읽어내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고, 몇 번이나 말도 안되는 논리라며 저자의 주장을 독단적 의견으로 치부하려 했었다. 그게 앞 쪽 100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100쪽을 넘어서면서 본격적인 논의를 풀어나가는 부분에서는 서서히 눈에 들어오고 머리에서 읽히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천만 다행이었다. 그 때도 안나왔으면, 정말 읽다 말았을지도.
결론적으로 이 책은 제법 귀중한 메시지를 던져준 셈이됐다.
"다툼은 같은 수준의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교훈 말이다.
종교계에서는 저자를 비판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신성모독은 기본적인 죄목일테고, 독단이니 독선이니 독설이니 하는 말이 오갈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가톨릭은 타 종교에 대해 가혹하기가 보통이 아닌 모양이다.
저자 쪽에서는 종교계의 허위와 허상, 비과학적 이론들과 억지스런 짜맞추기를 풀어놓으며 비판과 비난의 수위를 높이겠지.
결국 어느쪽이나 결국 진흙탕 싸움 끝에 난장판 되듯 서로를 더럽히게 될 것이다.
타협의 여지도 반론의 여지도 없는 원천 봉쇄의 오류를 전제로 전개되는 논의에 승자가 있겠는가?
셋이 길을 가면 거기엔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했다.
바른 일을 하는 이가 있으면, 그 바른 일을 배울 수 있으니 스승이 있을 것이고,
그른 일을 하는 이가 있으면, 그 그른 일을 해서는 아니됨을 배울 수 있을테니 또한 스승이 있는 셈이다.
책은 저자가 쓰고, 출판사에서 만든다. 하지만 그것으로 완성되었다고 하기엔 아직 한 가지 요소가 부족하다.
바로 독자에게 전해져, 독자에 의해 읽히고 해석되는 순간에 한 권의 책이 완성되는 것이다. 미흡하나마 이 책은 내게 왔고 내게 어떤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음은 물론, 마음에 경계를 세우게 했다.
편협해지지 말 것.
사실 도덕이 어떤 정신적인 것에서 저절로 생성된 것이든, 뇌의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의 결과물이건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이 책이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읽힐지는 알 수 없지만, 저자와 저자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 중 어느 쪽에 설까를 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자유의지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있다고 믿은 들 또 어떠한가?
지금 돌아보면 의외로 재밌게 읽은 책으로 기억된다.
이것이 '기억하는 뇌'의 활동의 결과인지, '경험하는 뇌'의 결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인간의 뇌 과학과 종교를 따라다니는 논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 하겠다.
아, 깜박했는데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은 "역자의 말"부터 보는 게 읽는데 도움이 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각 장의 내용의 개략적 정리를 하고 있음은 물론, 저자의 의도도 친절히 풀어주고 있거든요.
반대로 1장부터 읽는 건 좀 반댈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