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사가 말하는 사회복지사 - 22명의 사회복지사들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사회복지사의 세계 부키 전문직 리포트 17
김세진 외 지음 / 부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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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사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것이 언제였을까를 생각해봤다. 20년 쯤 전? 적어도 그만큼의 세월동안은 들어온 이름 인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사회복지사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어떻게하면 될 수 있는지는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로 '사회복지사'가 지닌 가능성에 대한 것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책 사회복지사가 말하는 사회복지사는 기본적으로 그러한 궁금증과 지식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첫 인상은 그랬다.

 

 

사회복지사가 무엇인지 궁금해 '국어사전'을 찾아봤다.

 

하지만, 사회복지사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실려있지 않은지(네이버 국어사전이라 그런지도) 추천 검색어로 '사회복지'가 올라왔을 뿐 어떤 정의도 찾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사회복지'를 검색했다.

 

 

<사회> 국민의 생활 향상과 사회 보장을 위한 사회 정책과 시설을 통틀어 이르는 말. 교육, 문화, 의료, 노동 따위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관계하는 조직적인 개념으로 국민 기초 생활 보장법, 아동 복지법, 사회 복지 사업법 따위의 법률에 기초를 둔다.

 

- 네이버 국어사전

 

 

 

사회복지가 정책과 시설이니 '사회복지사'는 그런 정책을 현장에서 실천하고 실행하며, 시설을 관리하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현대에 이르러 '사회복지'의 의미가 크게 변화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알고 있다. 과거의 의미가 단순히 가난에서의 구제, 교육 기회의 균등, 소외된 계층에의 복지였다면 현대에는 모든 계층, 모든 분야에 대한 전반적인 '서비스 개념'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런 결과 정말 혜택이 필요한 이들보다 정보를 가진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경우도 많아졌고, 각각의 단체가 지닌 경쟁력에 따라 지원금액이 달라지고 희비가 갈리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게 된 것이다.

 

놀라운 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사회복지사'자격 보유자가 군인 다음으로 많은 수인 50만명을 훌쩍 넘은 숫자라는 것이었다.

 

인력의 공급과 수요 사이에 불균형이 5배 이상의 차가 존재하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 사회복지 인력의 현주소다.

 

 

언젠가 뉴스에서 사회복지 인력이 부족해 복지사 한 명당 천 명 이상의 인원이 배정되어있어 업무의 과다로 인한 처리의 어려움과, 민원 처리의 지연, 복지사의 과로와 고질적인 연장근무가 발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격은 있지만 쓰이지 못하는 인력들이 존재함에도 예산 등의 문제로 업무가 집중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다 사회복지사들이 털어놓는 애로사항도 충격적이었다.(뉴스에서)

 

복지사에게 떼를 쓰다, 폭력이나 폭언을 가하는 민원인이 있는가하면,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 청탁을 해오는 일도 적지 않다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는 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사회복지사가 대충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돌아올 혜택을 자신보다 나은 것 같은 이에게 보내기 때문에? 기대가 큰 만큼 원망도 컸다는 것이었을까?

 

 

이러한 모든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사회복지사들은 자신들의 꿈과 희망, 일하는 보람과 즐거움을 먼저 말하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다.

 

정말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이 자랑스럽고, 사람들을 돕고 돌보는 일이 행복해서 하고 있는 사람들 특유의 훈훈함이 있는 책이었다.

 

그러면 사회복지사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복지사들은 '슈퍼맨과 원더우먼'의 집단이나 다름 없이 보였다. 일단 사회복지사가 되기까지의 길이 험난하고, 그 사회복지사의 세계 속에서도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 더 많은 공익을 실천하고 봉사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회복지사였던 것이다.

 

인정에 얽매여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야 하는 굳은 심지와 끊임없이 걷고 뛰어도 지치지 않을 체력, 필요한 이들에게 적절한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한 연구, 쉽게 드러나지 않는 공로와 결과를 기다리고 인내할 줄 아는 인내심까지 모든 것이 슈퍼 히어로 급의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사회복지사가 어떤 존재인가 하면 "사람과 사회를 연결하는 다리"라고 할 수 있단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사회복지사가 없다면 사회와 사람들은 연결될 수 없다는 이야기나 다름 없다.

 

 

책상에 앉아있든 현장에서 뛰어다니든 해외에 있든 그들의 마음은 한결 같다.

 

더 많은 혜택이, 더 간절한 이들, 필요한 이들에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말이다.

 

 

과거의 소극적인 사회복지에서 이제는 창조적인 역량을 요구하는 포괄적인 사회복지로 개념이 급변하고 있다.

 

단순히 국가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의 복지도 활성화되고 있고, 국내에 국한되는 활동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한국의 사회복지의 현주소다.

 

 

불과 반 세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혜택을 받는 입장에 있었다. 우리는 수혜자였을 뿐, 수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의 위상은 달라졌다.

 

 

수혜국에서 수여국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러한 외적인 성장과 비교해 질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발전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지만 여전히 현장에서 일하며 좀 더 나은 복지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복지사들이 있으니 조금 더 믿고 기다려 볼 만 하다.

 

이 책이 담고 있는 것은 단순한 '사회복지사의 정의'도 아니고, 사회복지사의 책임이나 의무도 아니고 활동에 대한 생색내기는 더더욱 아니다.

 

진정한 의미는 바로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비젼과 현장에서 풀어내고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을 소개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사회복지사가 되는데 적합한 것일까?

 

마음씨 착하고 봉사를 좋아하는 사람일까? 그런 사람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마음이 좋은 것이 좋은 사회복지사의 자질은 아니다. 이 책에 이야기를 싣고 있는 사회복지사들은 저마다 가는 길도 다르고, 일하고 있는 분야도 다르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한결같다. 모두가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복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남을 위해 희생만 하다 결국 지쳐 나가떨어진다면 사회복지사이면서 자신의 복지를 내팽개치는 일이 되어버리니 임무에 불성실했다는 이야기가 되어버리지 않겠다.

 

 

사회복지사를 꿈꾸는 사람들,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어떤 한계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도움이 될 것 같다.

 

현재 존재하는 사회복지사의 유형과 그러한 수준에 오르기 위한 정보들 뿐 아니라 시행 중이거나 시행해야 할 정책들에 대한 의견도 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전문직 리포트라는 타이틀로 나오는 이 책들은 분명 실무자들에게 큰 의미와 함께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그저 단순히 겉만 알고 있던 일반 국민들에게도 이 책은 사회복지사의 역할과 고충을 이해시키는데 얼만큼의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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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 교양강의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10
우치야마 도시히코 지음, 석하고전연구회 옮김 / 돌베개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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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양인이지만 서양철학보다 동양철학이 더 낯설게 느껴진다. 이것은 무엇에서 기인한 결과인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이런 나를 본다면 순자는 뭐라고 말했을까?

세상의 인식에 휘둘려 과거의 유물과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헛것을 좇는다고 호통을 치지는 않았을까?

이 책은 순자가 사상사에 등장하던 시대에서 시작해 순자의 사후에 일어난 사상의 변화까지를 풀어 적고 있다.

순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 분명히 알려지지 않은 사상사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순자하면 떠올리는 것이 성악설이다. 한비자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진()나라의 재상이었던 이사와 한비자가 그의 제자라는 사실과 성악설 정도가 내가 알던 순자에 대한 전부였다. 순자가 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지인들에게 물어본 것이 두어 가지 있다. 하나는 이사와 한비자가 순자의 제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순자의 성악설이 서양의 성악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진나라 재상이었던 이사가 추진한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통치와 강력한 법치를 주장하며 법가의 사상체계를 완성했다고 일컬어지는 한비자와의 연결 고리를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건 알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한 몫 했겠지만 무엇보다 똑같이 생긴 문자로 되어있으니 의미도 같지 않겠느냐 하는 편견이 가장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순자의 성악설 뿐 아니라 맹자가 제창한 성선설 또한 서양의 성선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 원인은 물론 의 존재 유무에 있다. 동양에는 절대 신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선과 악은 상대적인 개념에 불과했으며,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었다. 예와 덕을 통해 선을 회복하려는 노력이야 말로 학문을 닦고 수양을 쌓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순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전국시대 말기로 대단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순자는 그런 혼란한 세상을 보며 현실에서 도덕규범이 지켜지지 않는 것을 악으로 규정했고, 선악은 대립하지 않는 상대적인 것이며, 시대의 질서에 부합하는 것이 선이고, 부합하지 않는 것이 악이라는 가변적인 상태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순자는 모든 이가 평등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군군신신부부자자라는 말처럼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처럼 높고 낮음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선하다고 하며, 혼란한 채 조화되지 않는 상태를 악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깊은 내용으로 들어가면 제목이 울고 말테니 순자의 사상은 이정도만 들여다보기로 하자.

저자의 말을 들어볼까?

 

저자는 순자를 단순한 유자나 제자백가의 사상가 중 하나라는 위치에서 최후의 자유인이자 제자백가의 종결자로 높이면서 공자나 맹자의 사상을 봉건제를 옹호하고 소극적 개혁에 그치려한 구태의연한 것이라 말하고 순자야말로 시대의 흐름을 바로 바라봤던 현자라 한다.

마흔도 넘은 늦은 나이에 느닷없이 사상계에 등장해 과거를 동경하고 권력을 탐하기보다 시대를 앞서 바라본 인물이 바로 순자였다. 하지만 그런 순자의 사상을 올바르게 계승, 발전시킨 제자가 없다는 건 커다란 아쉬움을 남긴다. 순자의 사후에 순자의 사상은 세파에 희석되고 시대적인 상황(진시황의 분서갱유와 같은 탄압)에 의해 점차 퇴색되어가다 본래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 결과가 공자, 맹자의 사상을 위로 보고, 순자는 가볍게 여기는 현대의 태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떠올린 의문은 제목에 대한 것이었다.

순자씩이나 읽느냐며 빈정대는 지인에게 "에이~ 제목에 교양이란 말이 들어가니 교양 수준으로 읽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라고 우스개 삼아 내뱉은 답에 전적으로 상반되는 의문을 떠올리고 말았던 거다.

분명 저자는 교양 수준이 아닌 학문적 탐구를 목적으로 적은 것이 분명해 보였고, 순자의 사상에 대한 애착과 가치에 대한 평가도 결코 작거나 낮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증거로 개정판에 최신의 정보라 할 수 있는 논문의 내용을 보태고 순자를 전적으로 옹호하는 논의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공자나 맹자와는 달리 연구자의 수나 연구의 깊이가 상대적으로 얕고, 그 결과 평가 절하된 순자의 견해와 혜안을 돌아보기에 이 책은 큰 도움이 되어준다.

단순한 예로 순자의 성악설의 본질적 주장이나 순자의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알게 되지 않았나.

이 책을 교양으로 읽던, 학문 연구의 단초로 읽던 그것은 읽는 자의 자유에 달렸다고 본다.

하지만 일단은 교양이라고 적어뒀으니 교양을 쌓는다는 느낌으로 가볍게 읽어보는 건 어떨까?

 

 

작은 불만을 토로하자면, 저자의 후기에 표지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 한국판 표지에는 실리지 않았던데, 그것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은 아쉬웠다. 무슨 상인지 궁금했기에. 성악설을 제창한 순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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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는 괴물이 산다 - 불안과 콤플렉스에서 탈출하는 자신감의 심리학
한덕현 지음 / 청림출판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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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를 보면 괴물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괴물이라 함은 괴수 같은 원래부터 괴물이었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괴물은 저주 받은 왕자라든가 하는 식으로 그려져서는 외견이 아니라 내면으로 사람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곤 하는 거다.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원죄에 구속되는 악한 근원을 가진 존재라고 믿는 서양에 비해 동양에서는 인간을 본래는 선한 존재로 보는 시각이 좀 더 보편적이다. 그래서 날 때부터 악인은 없다.”라든가 하는 말이 공감을 얻게 된다.

 

이 책은 제목부터가 괴기스럽다. 마음속에 사는 괴물이라니, 그런 게 있더라도 극구 부인하고 싶다. “난 천사라구!”하는 억지 주장이라도 펴고 싶어지는 거다. 어차피 저주받은 왕자가 아닌 걸 아는데 여기서 마음속에 괴물까지 기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하다니, 이렇게 비극적일 수가.

 

하지만 겁먹을 것 없다. 우리가 저주받은 왕자가 아니란 건 확실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산다는 괴물은 그저 저주받은 왕자였던 것으로 밝혀질 여지가 있다. 아직 여지지만 말이다.

 

어떤 책들은 그 전까지 읽었던 책, 배우고 익혔던 지식을 다른 면에서 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어떤 연쇄를 일으키면서 그 다음에 읽게 되는 책에 대한 해석도 달라지게 한다. 사고의 전환이란 생각보다 쉽게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전환이 삶의 가치를 바꾸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책 한 권 읽은 것으로 지금까지 생각하고 믿어왔던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에 의문을 제기한다. “네 믿음이 그것 밖에 안 되었는가?”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눈초리에 위축 될 필요는 없다. 좁다란 생각의 우리에 갇혀 사는 것보다 막막하더라도 넓은 생각의 초원을 헤매는 편이 낫다.

 

초원을 헤매는 관점에서 괴물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괴물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삶은 크게 그 형상을 변화시킨다.

 

이 책은 마음속에 사는 괴물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소소한 지침을 일러준다.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이런 건 어때? 하고 물어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내면심리의 영향 하에 살아가지만 그 가운데 운동선수는 좀 더 유난스런 축에 들어갈 것이다. 잘 나가던 선수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슬럼프에 빠진다던가, 어떤 팀이 징크스에 시달린다던가 하는 말은 이제 일반인에게도 무척 익숙해서 당연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의 심리, 마인드 콘트롤에 얼마나 능숙한가가 A급 선수와 B급 선수를 가르게 되는 분수령이 되기도 한단다.

 

이 책의 저자는 스포츠 정신의학 전문의다. 스포츠 정신의학은 그 효과에 비해 아직까지 인식이나 필요성이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많은 팀이 선수의 멘탈에 대한 지원을 해주지만 아직까지는 덜 체계적이고, 덜 전문적이라는 것이다.

운동선수들의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일반인이 읽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더 효과적일지 누가 아는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으니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이 책이 완전히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내용이 들어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읽었다.

하지만 요 전에 읽은 어떤 책들의 영향으로 이 책은 달리 해석될 기회를 얻었다.

생활화 하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것, 내 것이 아닌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 대략 이런 느낌의 표어를 머릿속에 넣어두고 읽어나갔다고 하면 적절할 것 같다.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지만, 이미 아는 것을 다시 적었을 뿐이라고 허투루 보지 않겠다는 나름의 결심인 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 고통의 근원은 희미하거나 확고하지 못한 정체성에 있다. 그래서 일까? 이 책은 그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부터 자신의 감정을 바로 아는 방법과 그 감정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들이 절대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점은 사실 다른 심리학 책들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다. 다른 책에서도 그러던 데가 되어버리면 세상에 달리 보일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운동선수라고 하면 피겨 여왕 김연아가 있다. 김연아는 올림픽 금메달을 딴 후 피겨의 정점에 올라 더는 오를 산이 없는 산악인 같은 모양새가 됐다. 이 이상 힘을 내도, 노력해도 더 얻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김연아는 피겨의 세계로 다시 돌아왔다. 무엇이 김연아를 움직인 걸까?

 

책에서는 김연아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깨달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부정적 감정의 되새김질에서 벗어나,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풍요, 혹은 주목이라는 외부 세계에서 부여하는 가치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에 부여한 내적 가치를 추구하게 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피겨가 좋아서, 하고 있으면 즐겁기에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어른들은 말한다. 어른들 뿐 아니라 세상은 말한다. 사람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어. 하지만 어떤가? 우리가 정말 부러워하는 사람들 가운데 정말 좋아서 기꺼이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이 적잖은 건 왜 일까?

 

우리 마음속에 산다는 괴물은 용사가 되어 무찌른다거나 배제해야 할 악이 아니다. 그 괴물 역시 또 하나의 나인 거다. 그리고 조금만 더 알면 화해의 여지는 언제나 열려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혼란스러울 때면 늘어놓곤 하는 대표적 변명들이다.

지금 모른다 해서 언제까지나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미리 결정지을 필요는 없다.

내면과의 갈등을 해결해 가다 보면, 외부와의 갈등에도 돌파구가 열리게 된다.

두렵다고 피하려 하지 말고, 지금부터 조금씩이라도 알아가는 것이 어떻겠나?

이 책의 말미에 '괴물지수'테스트가 있으니 해보시길.

"당신의 괴물은 안녕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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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 - 악의 시대, 도덕을 말하다
샘 해리스 지음, 강명신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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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앉은 자리, 의자에 따라 바라다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는 말을 한다.

 쉬운 예로 출근시간 서울의 지하철을 떠올려 보자.

 어느 날은 운이 좋아 의자에 앉아서 편안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책도 읽고, 음악도 들으며, 좁다거나 지옥같다는 생각에 휘말리지 않았다. 단지 밀고 밀리며 필사의 탈출 작전을 실행하는 하차의 순간에만 잠시 힘을 썼을 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계속된다면 '행운'이라 부르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다음 날은 서서 가게 되는 거다. 거의 같은 시간, 거의 같은 자리에 있음에도 어제의 편안하던 풍경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밀고 밀리는 보이지 않는 몸싸움에 시달려 아침부터 녹초가 되어버린다.

 

 이것이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의 정체다. 아주 사소한 일, 작은 조건의 변화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해석을 달라지게 한다.

이 책은 그러한 풍경을 '도덕'으로 옮겨 놓고 있다. 문화와 도덕, 종교와 무신론, 신과 과학 간의 풍경의 차이를 확인시켜준다.

 이해하기 어렵고,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데다, 이해하기 싫은 이야기도 나오지만 분명 흥미로운 주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만, 우리 나라는 비교적 종교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의 충돌이 적은 편이라 이 책의 서술 배경을 이해하는 데 상대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란 건 이야기해두고 시작하련다.

 

책의 원제는 The Moral Landscape(도덕의 풍경)이다. 저자는 상대적인 도덕이란 있을 수 없으며, 도덕이 더이상 비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도덕의 풍경은 하나가 아니며, 봉우리에 빗대어 표현한 것처럼 여러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창조론과 진화론을 두고 종교계와 과학계가 충돌을 일으켰다는 기사를 읽어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그만큼 종교에 관대한 것인지,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깊은 것인지, 혹은 아무래도 좋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이 얼마나 팔릴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난 마케터도 아닌데) 저절로 떠올랐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거기다 온통 시커먼 표지란 신이 없는 암흑을 뜻하는 것일지 혹은 도덕 의식이 함몰된 도덕적 해이상태(Moral hazard)를 의미하는 것인지와 무관하게 뭔가 무거워 보여 부담이 된 것도 있었고, 무거운 주제에 종이 마저 무거운 재질이라 그 무게가 더욱 늘어나버린 탓도 있었다.

 

 여러 봉우리 어디에서 봐도 이 책이 무겁게 느껴질 수 밖에 없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무거운 책이 반가울 때가 있다.

카프카가 말한 것처럼 내 안의 얼어붙은 사고를 깨뜨릴 계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무게가 무거운 만큼 그 파문 또한 큰 법이다.

 딱딱한 광물 일 수록 더 높은 경도를 가진 매개가 필요한 '과학적 원리'의 연장선인 거다.

 

저자는 '뇌과학자'다.

 심리학자도, 종교학자도, 역사학자도 철학자도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해석한다. 결국 그는 뇌과학자 답게 인간의 모든 것, 감정, 도덕, 정의, 믿음 등을 뇌의 활동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전작인 <자유의지는 없다>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는 것조차 사실은 기억과 경험에 의한 뇌의 판단에 불과하다는 주장처럼 말이다.

 

 또한 저자는 뇌과학자이면서 '신무신론자'로 불리는 그룹의 일원이다.

어쩌면 조금은 과격하게 느껴질 만큼 독단적으로 그는 종교의 허위성을 말하며, 그 허상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그는 가차 없는 비판자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가혹한 비판자로서 저자는 인간의 존엄성의 근원이라고 말하곤 하는 자유의지를 부정했고, 신의 창조물이라는 상징을 부수어 버렸으며, 도덕감정을 단순한 뇌 속에서 이루어지는 화학적 작용으로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내놓는 사례들을 모두 수긍할 수는 없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사고와 시야를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었다면 그 목적은 얼만큼은 달성했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 책을 다 읽어내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고, 몇 번이나 말도 안되는 논리라며 저자의 주장을 독단적 의견으로 치부하려 했었다. 그게 앞 쪽 100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100쪽을 넘어서면서 본격적인 논의를 풀어나가는 부분에서는 서서히 눈에 들어오고 머리에서 읽히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천만 다행이었다. 그 때도 안나왔으면, 정말 읽다 말았을지도.

 

결론적으로 이 책은 제법 귀중한 메시지를 던져준 셈이됐다.

"다툼은 같은 수준의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교훈 말이다.

 

 종교계에서는 저자를 비판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신성모독은 기본적인 죄목일테고, 독단이니 독선이니 독설이니 하는 말이 오갈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가톨릭은 타 종교에 대해 가혹하기가 보통이 아닌 모양이다.

 저자 쪽에서는 종교계의 허위와 허상, 비과학적 이론들과 억지스런 짜맞추기를 풀어놓으며 비판과 비난의 수위를 높이겠지.

 

 결국 어느쪽이나 결국 진흙탕 싸움 끝에 난장판 되듯 서로를 더럽히게 될 것이다.

 

 타협의 여지도 반론의 여지도 없는 원천 봉쇄의 오류를 전제로 전개되는 논의에 승자가 있겠는가?

 셋이 길을 가면 거기엔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했다.

바른 일을 하는 이가 있으면, 그 바른 일을 배울 수 있으니 스승이 있을 것이고,

그른 일을 하는 이가 있으면, 그 그른 일을 해서는 아니됨을 배울 수 있을테니 또한 스승이 있는 셈이다.

 

 책은 저자가 쓰고, 출판사에서 만든다. 하지만 그것으로 완성되었다고 하기엔 아직 한 가지 요소가 부족하다.

바로 독자에게 전해져, 독자에 의해 읽히고 해석되는 순간에 한 권의 책이 완성되는 것이다. 미흡하나마 이 책은 내게 왔고 내게 어떤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음은 물론, 마음에 경계를 세우게 했다.

 

 편협해지지 말 것.

 사실 도덕이 어떤 정신적인 것에서 저절로 생성된 것이든, 뇌의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의 결과물이건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이 책이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읽힐지는 알 수 없지만, 저자와 저자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 중 어느 쪽에 설까를 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자유의지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있다고 믿은 들 또 어떠한가?

 

 지금 돌아보면 의외로 재밌게 읽은 책으로 기억된다.

이것이 '기억하는 뇌'의 활동의 결과인지, '경험하는 뇌'의 결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인간의 뇌 과학과 종교를 따라다니는 논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 하겠다.

 

 아, 깜박했는데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은 "역자의 말"부터 보는 게 읽는데 도움이 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각 장의 내용의 개략적 정리를 하고 있음은 물론, 저자의 의도도 친절히 풀어주고 있거든요. 

 반대로 1장부터 읽는 건 좀 반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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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 - 악의 시대, 도덕을 말하다
샘 해리스 지음, 강명신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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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신론자에게는 `성경`이고, 유일신론자에게는 `금서`다. 무신론자를 위한 무신론자에 의한 무신론자의 저서라고 할 수 있겠다. 더 이상 종교의 허위와 위선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지식인의 반란. 인간의 자유의지는 물론 감정, 도덕성까지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뇌`라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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