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꿈의 도시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12월
평점 :
남자 주인공은 언제나 훤칠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 본인 소유의 별장과 외제차를 몇 대 가진 재벌 2세다. 여자 주인공은 가난하지만 예쁘고 매력적이다. 그래서 재벌 2세는 꽤 괜찮은 남자들과 그녀를 두고 쟁탈전을 벌인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 사랑하게 되는 순간, 동화는 시작된다.
이것은 '아름답다' '따뜻하다'고 일컬어지는 영화나 드라마들의 일반적인 내용이다. 캐릭터가 뻔하고 구조가 눈에 보여 엔딩이 예상되는 이런 장르가 끊임없이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사람들이 회색 세상에서 청명한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길 꿈꾸기 때문 아닐까? '조금만 버티면 될거야' '이번 일만 해결되면 될거야' '괜찮아질거야' '내일은, 내년엔,,,' 지금 겪는 고통의 껍질이 벗겨지면 행복의 단계가 도래할 거란 희망으로, 그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 아등바등. 유메노 시의 주인공들도 그렇다.
공무원의 삶을 지리하다. 불법 수급자들을 적발하고 생활지원금을 끊어버린다. 일상의 탈출구는 주차장에서 만나는 려인클럽이다. 업무 시간에 여자들을 미행하고 살을 섞을 사람을 찾는다. 이혼 후의 외로움도 더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처를 만나는 순간 이성을 잃고 만다. "자신 속에서 광기 비슷한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이성을 담아두던 그릇이 깨지고 감정의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582)"
여고생은 도시에서의 멋진 대학 생활을 꿈꾼다. 길 바닥에 주저 앉아 노닥거리는 이 곳의 실력없는 고등학생들이 한심할 뿐이다. 어느 순간, 외계와 소통하고 공주를 지키는 외톨이의 장농에 갇힌다. 목걸이처럼 데롱데롱 매달린 전기 충격기가 야속하기만 하다. 학교도, 친구들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슬픔에 묻힐 때 쯤 그 여고생은 소리친다. "나는요, 대학교는 도쿄로 갈 거야. 너 따위는 절대로 손도 못 댈 도회지로 갈거라고. 두고봐!(596)"
전직 폭력배 세일즈 맨의 관심은 온통 회사의 인정과 보상이다. 기준없는 가격으로 어수룩한 노인들에게 사기를 친다. 금뺏지냐 은뺏지냐를 고민하는 실적 좋은 선배가 부럽기만 하다. 그런 선배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시리다. 메마르고 서글픈 감정을 꾹꾹 참는다. '어떻게도 치고 올라갈 수가 없구나.(608)'
마트의 좀도둑을 잡는 보안요원은 도둑들의 레퍼토리에 신물이난다. 가족이 아파서요, 훔치려고 했던게 아니예요, 제가 정말 급한 사정이 있어서요,,, 어쭙잖은 변명이거든 집어넣으라는 도도한 눈빛을 보낼 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레퍼토리들이 내 입에서 나오고 있다. 엄마가 편찮으세요, 돈을 지불할께요, 훔치려고 한게 아니예요. 부끄러움과 치욕의 어딘가에 있을 즈음, 정신을 차리라는 사람들 말에 이런 생각이 든다. '내내 잊고 있던 인간의 다정함이었다.(619)'
미래가 촉망되는 재벌가 시의원은 무서울 것이 없다. 지저분한 일을 처리해 주는 형제들, 살을 부빌 젊은 애인, 바람을 묵인해주는 아내. 앞길에 걸림돌이 되는 정치인은 처단하면 그 뿐이다. 그러나 가족들과 식사한 기억은 희미하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고, 가족들과의 거리는 좁힐 수 없게되자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다. '내 판단은 하나같이 잘못된 것이었다.(629)'
'꿈의 도시' 유메노에는 바로 이런 공무원, 여고생, 세일즈맨, 보안 요원, 시의원이 있다. 한 마디로 집에는 가족이 있고, 멀쩡한 신체가 있고, 생계를 유지시켜주는 직업이 있는 '평범한 우리들'이 있다. 한 꺼풀 벗겨내면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그 꺼풀은 벗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꺼풀 위에 먼지와 쓰레기가 더해져 회색이던 하늘은 점점 더 검게 변해간다.
유메노의 일상을 훑어보는 초반에는 드라마 [전원일기]를 보는 기분이었다. 특별할 것 없지만 이상할 것도 없는 사람들의 모습, 그러나 중반을 넘어가면서 '정상적인 외형' 속에 감춰진 '음울하고 뒤틀린 내형'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꿈의 도시]는 가볍지 않다. 무겁지도 않다. 직설적이지도 우회적이지도 않다. 대신 삶이 '동화'라고 여기게하는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숨기고 싶은 진실'을 아무렇지 않게 읊조린다. 그래서 난 이 소설이 조금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