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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부터 겸허한 마음으로 소설 [도가니]에 대해 적어보겠습니다. 소설, 영화, 법 개정, 인화학교 패쇄 등등 이미 도가니 관련 사안이 너무 많이 다뤄지고 있으므로 그런 전후관계는 차치하고 그저 제가 느낀 그대로를 담아보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이 네 개 입니다. 왜 별 하나 뺐냐, 네가 감히 공지영 작가를! 이라고 나무라지 마십시오. 너무 아팠기 때문에 별을 하나 뺐습니다. 영화 [도가니]에서는 민수가 맞을 땐 눈이라도 질끈 감아버리면 됐는데 소설에서는 예상치못하게 자꾸 튀어나오는 활자들의 무차별 공격에 그저 멍하니 가격당했기 때문입니다. 전 책을 읽는 내내 너무 아팠습니다.
폐부를 찌르는 문장들이 가득한 지면을 적으며 시작하겠습니다. 256페이지에 있는 글입니다.
교장이 성폭행한 거, 농아들 유린한 거 모를 것 같아요? 천만에! 황변호사도 고민했을 거고, 그 나름의 사회정의를 위해 농아들 몇을 희생시키는 게 이 고장의 발전을 위해, 말하자면 대의를 위해 옳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판사? 그 사람들 서로서로 대학동기, 선후배, 고시동기, 처삼촌, 고등학교 동창이 사돈, 사위의 은사예요. 이번 사건 맡은 검사? 무진에서 임기 육개월 남았어요. 이번 사건 물고늘어지다가 행여 누군가의 심기라도 건드리면 이번에는 서울로 가서 부인과 아이들과 합칠 계획을 망치겠죠. 그 사람들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점수, 점수, 점수, 경쟁, 경쟁, 경쟁 속에서 남을 떨어뜨리고 여기까지 왔어요. 일점 때문에 친구는 낭인이 되고 자신은 판검사가 되었단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정신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아들 몇명 때문에 처삼촌과 대학동창 사돈과 사위의 은사와 장인의 후배와 얼굴을 붉혀가며 그 정의라는 거, 진실이라는 거 되찾아줄 것 같아요? 그 사람들에게 진정 학원 이상장과 장애아의 인권이 같을 줄 알아요?
그렇습니다. 영화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초점 나간 눈빛으로 아이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을 묵인한다면 소설에서는 서유진이 말합니다. 그들이 왜 아이들의 고통을 그저 마데카솔 바르면 낫는 줄 아는 그런 상처쯤으로 치부해버리는지. 결론은 정의보다 강하게 살아 숨쉬는 대한민국의 삐뚤어진 '우리' 개념과 '내 밥그릇' 때문입니다.
소설 속 서유진은 무척 고달프게 살아갑니다. 남편이 없고 아이들을 홀로 키우고 있고 막내는 병에 시달리며 또 이러하고 저러해서 그래서 안개가 자욱해 앞길조차 보이지 않는 무진에 '숨어들었다'고 책은 말합니다. 또 강인호와 함께 피튀기는 전투를 하면서 행실 좋지 못한 여자가 되기도하죠. 언제나 비극 속에는 절대 비극이 도사리 듯 그녀의 친구는 외로움과 고독 뿐입니다.
그렇다면 강인호는 어떨까요. 영화 속 강인호는 자애학교에 내려온 미술선생님 입니다. 그리고 아픈 딸이 있고 그가 강경한 전투 태세를 갖추기까지 어머니라는 장애물도 잠시 겪게 되죠. 소설 속 강인호는 더 복잡하고 입체적입니다. 가장 충격적인 건 아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가 전투를 주춤하게 만들었던 그의 어머니는 아내로 나타납니다. 더 충격적인 건 그 아내로 인해 강인호는 마지막 새벽 전투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서울로 돌아가버립니다. 물대포를 맞고 바닥에 얼굴이 짓이겨지는 강인호는 영화 속 강인호였던 것입니다. 전 이게 마치 아이들의 보호막이, 그나마도 있던 보호막이 불살라진 듯해서 무척 슬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소설은 극히 일부분을 담았을 뿐이며, 영화는 더욱 좁은 범위만 표현했을 뿐이라고요. 영화를 보면서는 온몸이 아팠는데 소설을 읽고난 후에는 몇일을 앓아야 했습니다. 실제 아이들은 어땠을까요. CCTV에 찍힌 행정실장의 짐승같은 눈빛이 공기 속에 퍼져있는 느낌입니다. 하,,,
정신을 차리고 매듭을 짓겠습니다. 소설은 영화보다 더 잔혹합니다. 더 서슬퍼런 사실들이 매 장마다 칼날로 날아들고 코 앞에 떨어진 수류탄처럼 깊은 구덩이를 만듭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 많이, 더 심하게, 아파했을 거라는 걸 암시합니다. 서유진도, 강인호도요. 그래서 제 결론은 그렇습니다. 영화보다, 소설보다, 더 심하게 찢치고 다쳤을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치유되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또 인화학교 관계자들은 얼른 빨리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인화학교 원장은 대학석좌교수라던데, 그 대학은 도대체 어떤 대학인지, 그 사람이 교수가 어떻게 된건지 또 사뭇 궁금해지네요.
영화를 보고, 소설을 다시 읽고, 내린 결론입니다.
사지가 뜯기고 피가 낭자한,
트라우마를 남기는 참혹한 장면은 현실에 있을 뿐이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
백색의 가면들 같았다. 29p
그는 가슴 한켠이 독한 파스를 붙인것처럼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34p
그가 바라는 바였지만 또한 그가 전혀 바라지 않는 바이기도 했다. 55p
적어도 강 이쪽에 서서 에잇~ 퉤,하고 침을 뱉을 수 있는 거리가 허용되었다. 거기에 제 밥 그릇이 걸려있지는 않았으니까. 62p
인생의 한 국면에서 삶이 이렇듯 사정없이 한 인간을 몰아칠 때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다고 유진은 오래전부터 생각하곤 했다. 98p
그게 말이야. 우는 일이라는 게 그게 장엄하게 시작해도 꼭 코푸는 일로 끝나더라고. 135p
세상같은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날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257p
내가 불쌍하고불행한 적이 있다면 그건 나도 가끔은 뻔히 아니라는걸 알면서 그것과 타협하고 싶어질 때야. 266p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때문에 날 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16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