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 예문 / 1995년 9월
평점 :
절판




 

 


   인문학 관련 서적들을 읽다가 머릿속이 얽혀 어지러울 때 소설책을 집어 든다. 이때 집어든  소설들은 어찌나 잘 읽히는지 마치 용평스키장의 레인보우 코스에서 스키 타는 것처럼 쉽고 재미있다. 책이 읽히는 속도 역시 완만한 경사면에서 공기의 치마폭을 가르는 것처럼 시원스럽다. 요즈음은 일본 소설들에 자주 손이 간다. 그런데 이들의 작품을 읽으면 읽는 동안은 그들의 세계에 깊이 빠지는데 소설을 다 읽고난 후에는 변별력이 생기지 않는다. 참 이상한 경험을 다 해본다 싶은데, 마루야마 겐지의 『달에 울다』는 그 형식의 독특함으로 단연 돋을새김 되는 경향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을 그린 병풍이 있다. 그 병풍 앞에서 한 남자가 병풍의 그림을 보고 있다. 봄의 풍경은 열 살, 여름은 스무 살, 가을은 서른 살, 겨울은 당연히 40년 10개월 된  그 남자다. 병풍 속에는 비파를 타는 거지법사와 달이 반드시 등장하지만, 그의 배경은 계절별로 모두 다르다. 이 병풍의 그림을 보고 있는 한 남자를 수식하는 것은 이불  뿐이다. 볏짚을 채운 요와 잉어기치를 부셔서 만든 이불, 솜이 삐져나온 요와 땀내 나는 싸구려 담요, 거위털이불과 양털요, 전기담요와 전기요 등. 그러나 생의 달력 같은 계절의 병풍을 넘길 때마다 거기에는 주인공의 삶이 고요한 슬픔처럼 펼쳐진다.

시인 이문재는 이 작품에 대해 이런 시를 남겼다.

겐지에 울다

오랜만이다, 짧은 소설 읽으며 술에서 깬다
행간을 건너뛰는 일, 아득해
『달에 울다』에 울다가 개운해진다
오랜만이다 꽃 핀 사과나무 밭이며
생선갑옷, 나의 젊은 어머니들이
유월의 마을을 이루어 내 낮꿈으로 들어온다
여러 갈래 길이 따스해져 증발하려 한다

꿈속에서 마루야마 겐지가
일본원숭이를 오른쪽 겨드랑이에 끼고
원숭이 꼬리에 아이스크림을 발라
입가에 묻히고 있다

쓰는 것보다 읽는 것의 기쁨이 더 크다는
이 사태를 인정하기가, 사과 꽃 난분분하는
과수원에 혼자 누워 있는 일만큼 모질다

주인공의 생을 기술하는데 병풍의 그림을 앞세운 마루야마 겐지의 문체는 다분히 회화적이다. 그림의 여백인 듯 혹은 시의 연 구분인 듯 단락 지어 써내려간 형식도 독특하다. 자신의 격정적인 감정을 무거운 돌에 매달아 깊은 호수 밑에 가라앉힌 듯한 문장들이 짧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리고 소설이라는 것이 이렇게 적은 말로도 가능한거야 라고 할 만큼 문장은 절제되어 있다. 아버지의 시신과 어머니의 시신을 모두 사과밭에 묻고 고향을 떠났던 야에코. 그녀가 버리고 간 사과밭을 10년 넘게 가꾸고 있는 주인공. 주인공은 소리없이 돌아와 눈속에 묻혀 있는 그녀 또한 그 사과밭에 묻는다. 그 사과밭의 사과는 유난히 달고 사과 꽃 또한 향기롭다. 카자흐스탄에서 처음 야생 사과나무로 시작되어 달콤함으로 세계를 정복한 사과향기가 책장을 덮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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