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버려라 - 잃어버린 삶의 복원을 위하여
제리 맨더 지음, 최창섭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텔레비전은 1920년에 발명되었고, 2차대전 이후 실용화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텔레비전의 나이가 88? 텔레비전은 발명이래 진화를 거듭해와서 영상의 시대인 현대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것 같다. 이런시대에 '텔레비전을 버려라'는 선정적인 문구를 단 이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제리맨더가 말하는 텔레비전의 폐해는 다양하다. 텔레비젼은 수백만의 가정에 단번에 침투할 수 있다. 이런 매체의 특성을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 광고이고 이 광고는 곧 독재의 본질과도 연결된다. 또 텔레비전은 인간의 오감 중 특히 시각에 집중한다. 이런 특성은 내용보다 형식에 우선하며 사람의 눈을 화면에 붙잡아두기 위해 갖은 인위적 조작들을 행한다. 

텔레비전이 인위적으로 화면을 조작한다는 것은 쉽게 확인해볼 수 있다. 지금 당장 텔레비젼을 켜고 아무 프로그램이나 보는 것이다. 텔레비젼의 화면은 수시로 바뀌는데 한 화면의 유지 시간을 재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확인해본 결과 거의 매초 단위로 화면조작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경험이었다. 우리의 눈을 붙잡아두는 것이 이런 화면조작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았다.

화면에 눈이 붙잡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자연과 유리되고 자연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진다.  거꾸로 멀어진 시간만큼 우리의 경험은 텔레비전을 통해 미디어화되고 획일화된다.  끝내 우리는 경험도 텔레비전이나 기타 영상매체를 통해 구매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하여 인간을 집안으로 끌어들였고 텔레비젼은 자연과의 빛을 차단하고 인공적인 빛으로 우리와 눈을 맞추고 있다. 

텔레비전은 매체의 특성상 정적인 것보다는  동적인 것이, 사랑보다는 폭력이, 식물보다는 동물이, 살아있는 것보다는 죽은것이 더 더울리는 속성을 지녔다고 한다. 따라서 요가보다는 권투경기가, 온화함이나 따스한 마음보다는 분노와 폭력이, 움질일 수 없는 식물보다는 크고 거친 동물이, 살아 움직이는 인간보다는 죽어있는 시체가 더 텔레비전을 보고있는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된다.

이런 매체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관계자들은 이런 것을 역이용하기도 한다. 섹스, 스포츠와 더불어 스크린이 우민화정책의 하나로 꼽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텔레비전이 어떤 좋지않은 영향을 미치는지 제리맨더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의 견해를 인용, 참조한다. 메이저급 광고회사의 사장이었던 그의 이력탓인지 특히 광고가 주는 폐해의 부분이 설득력을 지닌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인위적인 빛의 폐해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조합하지만 그에 대한 연구의 부족으로 충분한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텔레비전, 핸드폰, 컴퓨터, 플레이스테이션 등을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공공의 적으로 규정했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것들을 안쓰는 불편함을 어떻게 감수해야하나 하는 걱정이 먼저 앞선다. 이런 내 마음을 그는 이미 짐작이라도 한듯이 "그렇지만 텔레비젼을 제거하기 위한 첫걸음은 텔레비전을 제거할 수 없다는 생각을 마음으로부터 버리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고 잘라 말한다.

 그의 용기있는 까발림과 정성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개면서 뉴스를 들어야할 것같다. 또 일주일에 두번 방송하는 사극 한편쯤은 보아야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