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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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두가 재테크에 열을 올린다. 친한 친구가 적립식 펀드로 몇 배의 수익을 냈다는 말을 들으면 차곡차곡 모아뒀던 적금이 흔들린다. 혹은 누군가 Daum 주식을 2만원에 2천만원 사뒀다가 8만원에 팔아 벤츠 컨버터블을 샀다는 말을 들으면 오랜 시간 면벽수련을 해오던 무욕자들의 등줄기도 찌릿찌릿 소름이 돋는다.

20년전, 송강호는 김상경에게 드롭킥을 날리며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고 물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아무도 우리 시대에 대해 묻지 않는다. 모두가 '돈의 왕국'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골의사는 부자의 기준을 '더 이상 부를 늘릴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부자가 되고 못되고는 자신이 가진 절대적 부를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 가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재테크 강의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면 아마도 헛웃음을 듣거나 오랜 시간 속세를 떠나있어 세상 물정을 모르는 도인쯤으로 취급 받을 것이다. 사람들이 투자에 대해 알고 싶은 건 단 하나다. 주식이라면 어떤 종목이 오를 것이냐, 부동산이라면 어느 아파트가 오를 것이냐 하는 것 말이다.

혹시 재테크를 하는 이유가 조금 이라도 쉽게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닌가? 만약에 그렇다면 당신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황금이 숨겨져있는 정글은 수 십년간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과 금융 공학을 전공한 특급 인재들 그리고 초대형 투자사와 은행이 경합을 벌이는 사냥꾼들의 섬이다.

사냥꾼들은 정글을 살찌울 유동선 자산을 아주 손 쉽게 얻는데 그건 바로 안전한 대륙에서 배를 타고 도착하는 욕망에 눈 먼 사람들, 바로 당신의 주머니를 털어 얻어진 것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엘도라도의 꿈은 멈추지 않는다. 저마다 합당한 논리를 가슴에 품고 저 머나먼 바다로부터 끝도 없이 밀려든다. 

 

 

 

시골의사는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 보다는 부자가 더 큰 부자가 되는 게 훨씬 쉽다고 했다. 예를 들어 당신이 100억원 상당의 원유가 매장되어 있는 해저층을 알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위치를 정확히 아는건 아니고 한 10번 정도 바다를 쑤시면 나온다고 하자. 바다를 한 번 탐색할 때 드는 비용은 1억이다. 만약 당신이 10억원의 현금을 보유한 사람이라면 이 탐사는 매력적인 투자다. 그러나 1억원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건 분명히 도박이다.

리스크란 부자일 수록 품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겐 반드시 피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 현상이 벌어진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리스크를 적극적으로 껴안으려 한다. 이 정도 돈은 없어져도 그만이라 생각, 내가 던지면 언제나 모가 나올 거라 생각하는 심리, 그리고 이제는 알만큼 알았다는 자만심이 당신을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가난의 지옥으로 빠뜨린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부자가 되려면 먼저 부자가 되야한다. 그럴려면 사돈의 팔촌이 땅을 사도 점잖게 있을 줄 알며 돼지 저금통을 깨서 한 주식투자가 수십 억이 됐다는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작지만 꾸준히 이익을 내고 약간의 금리 차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하며 ATM기의 수수료를 아까워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승리하는 사람'이 되야 한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부자가 되는 길은 자신의 현재 수입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수입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방법은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을 재테크의 세상으로 인도하는 수 많은 시정잡배들은 노후 자금 10억 만들기과 국민 연금의 고갈 등을 운운하며 공포감을 조성할 뿐이다. 그들은 적당히 게임의 법칙을 설명해 준 뒤 이제는 게임을 시작해야 될 때라고 속삭인다. 눈 앞에 다가온 재앙이 당신의 모든 것을 쓸어 담을 자루를 들고 서 있는데도 조바심이 난 당신은 지갑을 열고 적금을 깨고 아이가 모은 돼지 저금통까지 그러쥐며 대박의 흥분에 취해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눈치챘을 땐, 이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뒤일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이 책은 투자 입문서라기 보단 경제학 책에 가깝다. 저자는 부동산이란 무엇이며 주식이란 어떤 것이고 어디에 얼마를 투자해야 노후자금 '10억'을 벌 수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대신 가격이란 무엇이고 금리란 어떤 것이며 가격과 금리의 변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변동하는 원리는 무엇인지를 경제학의 차원에서 설명한다. 따라서 이 책은 시중의 어떤 그 투자 입문서보다 부의 본질에 근접해 있다.

돈을 벌어 보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런 강의를 해주는건 웬만한 배짱과 철학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시골의사 박경철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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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웃에는 데이빗 린치, 데이빗 크로넨버그, 데이빗 핀처, 아주 넓게 봐줘서 데이빗 보위까지 네 명의 데이빗이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를 연출한 것은 데이빗 린치고 컬트 영화 크래쉬(1996)를 만든 것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이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데이빗 보위다. 그리고 데이빗 핀처는 소셜네트워크(2010)를 만들었다.

데이빗 핀처의 소셜네트워크가 공개 됐을 때 알만한 사람들은 기대와 흥분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1995년에 세븐, 1999년에 파이트 클럽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물론 에일리언 3(1992)를 연출한 것도 바로 이 사람이에요 라고 말해 찬물을 끼얹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데이빗 핀처는 세븐과 파이트 클럽을 만든 사람이고 최근에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까지 거꾸로 보내버린 감독이다. 기대를 안할 수가 없었다. 



 
 

 

소셜 네트워크는 하버드 컴공생 마크 주커버그가 페이스북을 만들고, 성공하고 돈 냄새를 맡은 인간들과 괴로운 소송을 벌이는 내용이다. 휘황찬란한 성공기가 아니다. 욕망과 성공에 눈이 먼 인간들을 관조하며 그 본성을 속살까지 드러내는 잔인한 영화다.

그래서 영화의 조명은 어둡다. 살인범의 이야기인 세븐과 정신분열자의 이야기인 파이트 클럽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이 무거운 조명이다. 카메라는 이 어둠 속에 들어 앉아 인간의 악한 본성을 포착한다.

소셜 네트워크가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가 밋밋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는 성공과 실패와 그리고 분쟁을 극적으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산발적으로 이야기를 내뱉는다. 그래서 감정은 고조되지 않는다. 힘들게 올라간 롤러 코스터가 내리막길 직전에 멈춰 버린 느낌. 아니, 아예 오르막길까지 가는 평평한 레일 위를 달리다 만 것 같은 이 느낌은 그대로 관객의 마음 속에 남아 욕구 불만을 일으킨다. '이런걸 볼려고 8,000원이나 낸건 아니지' 하는 한탄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런식의 전개가 이뤄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실제 페이스북의 성공이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마크 주커버그의 대사처럼 '아직 이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페이스북은 세계 최고의 소셜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그들은 어디까지 클 줄 모르는 폭발적 성장기의 어린아이였으나 사람들은 자꾸만 잡아다 키를 재려 했다.

엔젤 투자자들이나 넵스터의 숀 파커는 칼을 든 도축업자였고 페이스북을 통제 가능한 울타리에 가둬 놓은채 이 돼지에 칼을 꽂아 한 몫 벌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내는 짧았고 결국 도살 명령은 내려졌다. 피냄새를 맡은 파리떼들이 초대받지 못한 파티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이야기 중간중간 끼어드는 소송 장면들은 이런 상황을 은유하는 듯 하다. 그것은 도축업자의 칼날이 살갗을 찍는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 여지없이 관객의 환상을 깨뜨린다. 데이빗 핀처는 그들의 성공이 아니라 사라져버린 꿈과 깨져버린 우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수해야만하는 주커버그의 심리에 집중하라고 강요한다. 

 

 

 

그런데 주커버그가 페이스북의 순결성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페이스북의 원래 아이디어를 윙클보스 형제로부터 제공 받은 것이 명백함에도 그는 '소스 코드는 온전히 나의 것'이며 페이스북을 만드는 일은 '자신에게 소송을 건 그 누구도 갖지 못한 지적이고 창의적인 능력을 요구한다'고 거드름을 핀다. 이런 태도는 소송 과정을 엉망으로 만들고 그것을 지루하게 연장시키며 주변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원흉이 된다. 

그러나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떠벌이려는 욕망은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심각한 컴플렉스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학창 시절 지지리도 공부를 못했던 친구가 오랜만에 동창회에 나와 땅 팔아 부자가 된 사연을 주구장창 늘어 놓는 것 처럼 말이다.

사실 마크 주커버그는 컴플렉스 덩어리다. 영화 초반 주커버그가 에리카에게 - 에리카 올브라이트, 여자친구 - 쉴새 없이 떠드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자기 지능을 과시하고 싶어하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피닉스 클럽'의 부름을 받지 못한 Geek일 뿐이다.

그가 절친 에두아르도를(피닉스 클럽) 버리고 숀 파커를 따르기 시작한 것도 컴플렉스 때문이다. 주커버그는 숀 파커가 냅스터를 만들었고, 그 사실이 자신을 무시하는 세상을 엿먹이는 열쇠라고 믿는다. 실제로 숀 파커는 주변 사람과 상황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페이스북을 만든 자신 또한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들었다.

이렇게 페이스북은 주커버그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사회적 보호망이 된다.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주커버그로 불리는 한 그는 더 이상 별볼일 없는 Geek으로 취급받지 않아도 된다. 뿐만아니라 Facebook의 명함 뒤어 숨어 이렇게 상스러운 말을 지껄여도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 볼 뿐이다. I'm CEO, bitch!라고 말이다.

이 영화가 시종일관 침울하고 어두컴컴한 이유는 페이스북을 둘러싼 소송과 갈등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페이스북 자체가 인간의 어두운 마음에서 태어났다는 것 즉, 사랑받지 못한 자의 뒤틀린 욕망을 먹이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의 성공같은,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보장된, 이토록 흥분되는 소재에 아무 거리낌 없이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건 데이빗 핀처 밖에 없다. 그가 헐리웃 자본으로 일하는 상업 영화 감독이라는 점은 이런 사실을 더더욱 놀랍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이번에는 데이빗 핀처도 별거 없었어'하고 단정할지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소셜 네트워크를 계기로 데이빗 핀처의 다음 영화를 선택하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것이 데이빗 핀처를 작가로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는 시류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확고한 스타일과 철학이 있는 남자라면 다음 영화 아니 다다음 영화 아니 다다다음 아니아니 영원히 그의 영화를 기대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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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디자인
하라 켄야 지음, 민병걸 옮김 / 안그라픽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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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하라 켄야를 수식하는 단어는 많이 있겠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디자인의 디자인'의 저자라는 말로 이 남자를 설명하고 싶다.

특정 분야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실무자가 자신의 업(業)을 설명하고 이론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유는 많겠지만 대개는 첫째,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둘째, 대부분의 크리에이터들에게 정리는 창조보다 귀찮은 일에 속하기 때문이며 셋째, 자신조차 자기가 발휘하고 있는 창조의 근원을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셋 중 첫째를 핑계로 둘째를 디자이너 개개인의 성실도의 문제로 간주하더라도 마지막 세번째 이유, '자기 자신조차 창조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것에는 실제 본인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막막함이 담겨 있다. 
 

 

 

그런데,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디자이너란 설명하고 주장하는 일보다 직접 만들고 보여주는 것이 훨씬 쉽고 또 그것을 재미있어하는 사람들이다. 덧붙여 이론없이도 훌륭한 작업물을 내놓는게 바로 디자이너의 위대함인데, 뭣때문에 힘들여 이것저것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말이다. 물론 이 말에도 일리는 있다. 행동보다 말이 많은 이 세상에서 실무와 실용, 보이는것과 만질 수 있는 것에 대한 가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만약 우리 세대의 디자인을 우리 세대만으로 끝낼 것이라면 이런 생각에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그러나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는게 목적이라면 얘기는 다르다. 그것은 반드시 이론으로 정리되야 할 필요성이 있다. 경험이라는 것은 흐르는 강물과 같아 누군가 멈춰서서 음미하지 않으면 결코 축적되지 않는다. 축적된 경험은 후대의 이해와 손질을 거쳐 지혜로 탈바꿈하고 이렇게 숙성된 지혜가 바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는 것이 이른바 인간 역사의 진보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세상도 사실은 우리 전세대들이 축적해 놓은 유구한 전통이 발판이 된 것이다. 그때도 누군가는 이론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속세의 강줄기에서 유유히 사유의 헤엄을 쳐왔던 사람들 덕분에 우리의 역사는 여전히 다음 세대의 진보를 잉태하고 있다.
 

 

 

'디자인의 디자인'에 소개된 많은 디자인 작업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꼽으라면 단연 '리디자인 프로젝트'다. '리디자인 프로젝트'란 하라 켄야가 주도한 프로젝트로 건축, 제품 디자인, 시각 디자인, 의상 디자인 등 다양한 업계에서 실력을 인정 받은 디자이너들에게 '일상의 제품'들을 새롭게 디자인하라는 과제를 주고 그 결과물을 프로토타입으로 제작하는 작업이었다.

사실 일상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물건들을 다시 디자인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디자인이란 그 무엇보다 합목적성을 전제로 하는 작업이다. 만약 키보드, 성냥, 물컵 등이 다 비슷한 모양으로 디자인 되어 있다면 그것에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것은 어느 순간 누군가의 우발적인 영감에 의해 창조된 것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 그것들에는 수십, 수백 아니 수천년 동안 쌓여온 일상의 경험이 반영되어 오늘날의 형태를 띄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온 지혜와 경험의 결과물을 한 순간에 전복시키는 일은 쉽지 않을 뿐더러 자칫 잘못했다간 우리의 선배들과 역사를 기만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제를 받은 디자이너들은 마치 이런 우려를 비웃듯 엄청난 디자인을 선보였다.
 

 

 

 위 사진은 반 시게루의 네모난 휴지심이다. 얼핏보면 변기를 제출해 놓고 '샘'이라 이름 붙인 뒤샹의 조크와도 닮은 듯하다. 그러나 동그라미가 네모로 바뀌면서 휴지는 적재가 용이해 진다. 뿐만아니라 적재시 발생하는 수납 공간의 손실도 상대적으로 줄일 수 있다. 이렇게 높아진 적재 효율성은 당연히 운송의 효율성으로도 이어진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대가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네모난 휴지심이 전해오는 메시지다.

상상해 보자. 보통의 동그란 휴지심이라면 휴지를 풀 때 아무런 저항이 전해지지 않는다. 잡아당기는 만큼 술술 풀려 원하는대로 쓸 수 있다. 그러나 네모난 휴지심은 풀릴 때 마다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낸다. 바로 이 저항이 휴지를 낭비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작은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처럼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환경 보호가 일상의 행위와 밀접히 관련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이것이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됨으로써 휴지를 아끼는 습관으로까지 발전 된다.

두 번째는 후가사와 나오토의 티백이다. 아래 사진을 보자. 
 

 

 

티백에 고리가 달려 있다. 그런데 이 고리의 빛깔은 홍차가 제일 맛있어지는 시점의 색채와 비슷하다. 이게 바로 포인트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 색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홍차의 맛을 음미하는 과정에서 점차 그 둘간의 관계를 인식해 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고리보다 진한 편이 좋다거나, 혹은 오늘은 엷게 타서 마시자는 식으로' 색채의 의미를 스스로 구성해 나갈 수도 있다. 단순한 고리 하나가 무의식적으로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 낸 것이다.

다음은 멘데 카오루의 성냥 디자인이다.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끝에 발화제를 입혔다. 이것은 '땅에 떨어진 나무가지에게 지구로 환원되기 전에 마지막 일을 시켜보자'는 발상이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멋있는 생각이다. 게다가 나뭇가지 하나하나의 면면 또한 매우 아름답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물조차 섬세한 감성으로 낚아내는 것이 디자이너의 의무인 것일까?

멘데 카오루의 성냥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미(美)를 디자인이라는 수단으로 세련되게 발굴해 냈다. 이로써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삶에 하나의 느낌표가 새겨진다. 

   

마지막으로 리디자인 프로젝트는 아니지만 하라 켄야의 '산부인과 사인(간판) 작업'의 결과물을 살펴 보자. 보통 사인, 간판이라고 하면 아크릴이나 플라스틱을 떠올리게 된다. 그 안에 전구가 하나 들어있고 밤에는 불을 내뿜는다.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방이나 벌레 따위가 잔뜩 들어가 있는 것을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장점은 이 플라스틱을 유일무이한 간판의 소재로 떠오르게 만든다. 그런데 하라 켄야는 이 사인에 백색 면(綿)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백색 천이란 그런거다. 마땅히 손을 대지 않아도 하루하루 쌓이는 먼지에 의해 자연적으로 때가 탄다. 검은 색이라면 쉽게 가려질 수 있겠지만 흰색 천은 먼지의 흔적을 숨길줄 모른다. 그렇다고 이 천을 더럽히는 게 자연 오염인 것만은 아니다. 아이들은 '이제 막 초콜릿을 먹은 손'으로 이 간판을 만질 것이다. 아니면 벽을 짚고 이동하는 산모가 땀에 절은 손으로 이 간판을 움켜 쥘 수도 있다. 이 때마다 흰색 천에는 오염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난다. 도대체 이렇게 귀찮은 짓을 왜 한 걸까? 


 

 

 

그러나 쉽게 더러워진다는 특성 자체가 바로 이 작업의 핵심이다. 병원이란 그 무엇보다 위생과 청결이 최우선 되는 특수한 장소다. 그런데 만약 흰색 천으로 만들어진, 쉽게 더러워질 수 밖에 없는 이 사인들이 언제나 청결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만큼 병원이 청결과 위생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건 아닐까? 

 

 

 

이 책은 얼핏 디자인 전공자들이 읽는 관련 전문서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읽어 보면 디자인이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할 뿐 사실은 이 책이 인간과 사물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라 켄야의 디자인 철학은 일상의 사물들과 멀리 떨어져 대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뜬구름을 잡는 사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제품으로 다가온다. 바로 이것이 마치 타고난 센스, 탁월할 미의식 따위를 갖춰야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디자인의 세계를 아주 친숙하고 쉽게 정리해 준다.

마지막으로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라 켄야의 답을 듣는 것으로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사물을 보고 느끼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그 수 없이 많은 보고 느끼는 방법을 일상의 물건이나 커뮤니케이션에 의식적으로 반영해 가는 것이 바로 디자인이다.'

어쩌면 대가와 풋내기의 차이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정확히 정의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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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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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 이야기에 꿀이 빠질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이야기에는 돈이 빠질 수 없는 노릇이다.'

얼마가 있어야 부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10억? 20억? 대기업 회장들에게는 스마트폰 인터넷 뱅킹으로 송금할 수 있는 최저 금액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임금 노동자들에게 '억'은 결코 만만한 액수가 아니다. 그렇다고 20억을 가진 사람을 부자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그럼 8,700만 달러는 어떤가? 이만하면 부자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시골의사는 부자의 기준을 '더 이상 부를 늘려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설의 주인공 엘리엇 로즈워터는 분명 부자다. 8,700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로즈워터 재단의 이사장.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하루에 10,000 달러가 생기지만 의용 소방대원으로 일하며 알콜 중독자, 매춘부, 10대 미혼모 등을 보살피는 로즈워터군의 천사. 이 남자라면 시골의사가 말한 부자의 기준을 충족하고도 남을 것이다.

만약 이런 부자들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는 사회라면 앨리엇 로즈워터는 결코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지구는 탐욕이 휘몰아치는 욕망의 바다 그 한 복판에 떠 있는 작은 배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하여 커트 보네거트는 이런 소설을 쓰게 됐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커트 보네거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여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성의 문제'를 '블랙 코미디'의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로즈워터가의 재산 8,700만 달러는 앨리엇의 증조부인 노어 로즈워터가 남북 전쟁의 혼란기와 전후 미합중국의 허점을 간파하여 축적한 부의 결과물이다. 이 돈은 앨리엇의 아버지인 리스터 에임스 로즈워터에 이르러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는데, 그는 '도덕'을 가르치는 재단을 만들어 이 돈을 모두 귀속시켰다.

재단의 이사장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후손이 대대로 맡는다는 강령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아들인 앨리엇 로즈워터가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알콜 중독자에 정신병자가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신 분열의 이유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대략 2차 세계 대전 참전 당시 무고한 소방대원을 죽인 트라우마가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창문으로 수류탄을 던지고 건물에 침투해 들어가 막고 차고 찌르고, 정신을 차려 보니 소방 마스크를 쓴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한 명은 아직 어린애였다. 죽음이 삶보다 관대한 전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인을 별 것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앨리엇의 영혼은 이 일로 송두리째 파괴 되었다. 신경 쇠약에 걸린 앨릴엇은 곧바로 제대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출처: Flickr.com, dunechaser>

 

전장에서 돌아온 앨리엇이 처음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건 아니다. 우선 술을 먹기 시작했다. 많이 마셨다. 그러더니 헛소리를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파티 장소에서 더 심했다. 손에 든걸 목격당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싸구려 SF 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의 작품들에 심취했고 모두의 앞에서 그것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출을 시도했다. 미국 전역의 의용 소방대를 전전하며 미친 소방대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의 고향, 인디애나 주 로즈워터로 돌아왔다. 로즈워터 의용 소방대에 최고급 소방차를 기증한 앨리엇은 드디어 정식으로 소방대원이 되었다.

소방서에 두 대의 전화를 놓았는데 한 대는 화재 신고를 받는 전화였고 한 대는 '무엇이든 도와주는 로즈워터 재단'의 상담 전화였다. 이 전화로 의부의 아이를 임신한 열 다섯살 짜리 소녀와 매춘부와 노숙자들을 상담했고 그들에게 상당한 돈을 보내줬으며 로즈워터 군의 신생아들에게는 전부 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IBM)의 주식을 한 주 씩 선물했다.

앨리엇 로즈워터가 기행을 일삼고 이혼 소송을 진행하며 동시에 정신과 치료를 받는 동안 로즈워터 재단의 기금 운용 변호사 무샤리는 로즈워터 재단의 서류 더미 속에서, 심각한 정신 질환이 있는 경우 이사장직에서 해임할 수 있다는 재단 규정을 찾아냈다. 인간이 돈 냄새를 맡았다.

무샤리는 앨리엇 로즈워터를 대신할 상속자를 찾아냈고 그를 앞세워 소송을 걸었다. 상원의원은(앨리엇의 아버지) 아들의 정신을 되찾고 나아가 재단의 돈을 지킬 태스크 포스 팀을 꾸렸다. 앨리엇은 뉴욕으로 송환됐다.

그가 다시는 로즈워터군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시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앨리엇을 전송했다. 앨리엇이 떠난지 얼마 후 로즈워터 군의 매춘부와 미혼모들은 자기 아이의 아버지가 사실은 앨리엇 로즈워터였음을 주장했다. 그들은 모두 앨리엇이 돌봐준 사람들이었다. 그 속에는 의부의 아이를 임신한 열 다섯살짜리 소녀도 끼어 있었다. 

 

 

 

이 소설에서 미친것으로 분류되는 사람은 앨리엇 로즈워터와 그의 아내 실비아 뿐이다. 그러나 지극히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미친 사람으로 묘사하는 소설의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커트 보네거트는 로즈워터 부부의 정신병적 선행과 지극히 똑똑한 사람들이 펼치는 탐욕의 세계를 대비시킴으로써 돈에 미쳐 인간의 본성을 잃어 버린 세상에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제 5 도살장'으로 대변되는 커트 보네거트의 후기작들에 비해 이 책은 가볍고 단순하다. 문득 문득 Jesus Christ를 연상케하는 앨리엇 로즈워터의 기행들은 그 이면에 난해한 상징이 숨어 있다기 보단, 등장 인물의 희화화를 통해 조롱의 강도를 증폭시키려는 의도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난해한 상징 따위 없어도 소설은 충분히 훌륭하다. 이 점은 소설의 끝부분, 테니스 라켓을 머리 위로 치켜든 앨리엇 로즈워터가 우리 모두를 향해 '생육하고 번식하라'고 외치는 장면에 이르러 분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294페이지의 양장본 소설을 읽느라 소비된 당신의 노고는 멈추지 않는 웃음과 함께,

모두 보상 받을 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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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커빌가의 개 열린책들 세계문학 102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조영학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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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탐정은 셜록 홈즈다. 아서 코난 도일의 만들어낸 이후로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19세기의 영국인들이 그렇게 믿었고 그 자손들이 믿음을 이어 나갔다. 시간이 흐르자 믿음은 전설이 됐다. 셜록 홈즈를 번역한 나라가 이 전설에 동참했다. 번역한 나라의 자손들이 그 말을 이어나갔다. 번역의 불길은 황무지와 살인, 런던과 대저택, 스릴러와 추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극동 아시아의 남조선에까지 번져 급기야 열린책들 '세계 문학'의 102번째 시리즈로 '바스커빌가의 개'가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런던 베이커가 221번지 B호에 작은 사무실을 갖고 있던 셜록 홈즈는 이렇게 전세계적인 탐정 신화를 완성해 냈다.  

 

 

 

고전의 아우라는 언제나 후세들의 가치관에 공포감을 조성한다. 그 사람이 누구든 고전을 파괴하려는 자는 사회적 교수형에 처해 주류 세계에서 밀려난다. 앞 세대의 눈부신 광채는 눈먼 후손을 낳고 눈먼 후손은 고전을 영원히 눈부시게 만든다.

그래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내가 '일리아드, 오디세이' 서사의 촌스러움을, '로미오와 줄리엣'의 진부한 신파를, '셜록 홈즈'의 농밀하지 못한 트릭을 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광신도들의 무자비한 돌팔매를 피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전의 가치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깊은 통찰력을 통해서만 발견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스커빌가의 개'는 가장 유명한 소설이다. 그 유명한 셜록 홈즈 시리즈 중에서도 말이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셜록 홈즈의 부활'때문 이었다.

아서 코난 도일은 1893년에 출간한 '셜록 홈즈의 회상록', 그 최종장인 '마지막 사건'에서 셜록 홈즈를 폭포 밑으로 떨어뜨려 죽인다. 그것은 셜록 홈즈 시리즈의 종지부를 알리는 대사건이었는데, 아서 코난 도일 자신이 추리 소설이라는 대중적 장르를 떠나 문학가로서의 길에 정진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이처럼 훌륭한 작가에게도 세상일이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미지의 것이었나 보다. 정치에 대한 꿈은 낙선의 현실로 이어졌고, 아서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의 부활'만큼 독자를 열광시키는 소재는 없을 거라며 출판사에 흥정의 서신을 보냈다. 서신에는, 은근히 다른 출판사를 언급하며 100파운드 정도면 셜록 홈즈가 무덤에서 뛰쳐나올 의사가 있다는 내용을 적어 넣었다.  

 

 

 

'바스커빌가의 개'는 바스커빌가의 전설로 부터 시작된다. 데번셔의 황무지에 자리잡고 있는 바스커빌가의 대저택에는 대저택을 갖고 있는 부잣집 도련님이 으레 그렇듯 망나니 아들이 하나 살고 있었다. 이 망나니는 망나니 답게 여색을 즐겼는데 하루는 친구들과 잔뜩 술에 취해 옆 마을의 미녀를 납치해왔다. 그러나 미녀는 잡혀온 미녀들이 으레 그렇듯 머리가 빈 공주님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망나니 도련님이 술독에 빠져있는 동안 담쟁이 덩쿨을 타고 탈출에 성공했다. 흥분과 욕망으로 축축해진 입김을 내뿜으며 망나니가 문을 열었을 때 방은 이미 텅비어 있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망나니는 친구들을 끌고 야밤의 추격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추격은 실패했다. 망나니의 친구들이 비명 소리가 들려온 계곡으로 달려가보니 망나니의 시체가 그들을 바라보며 일그러진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 위엔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거대한 사냥개 한마리가 서 있었는데 사냥개는 지금 막 망나니의 목을 물어 뜯어 꿀꺽 집어 삼키려는 찰라였다. 야밤의 추격전은 피와 공포로 물들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황무지에는 '바스커빌가의 망나니'를 물어 죽인 '지옥개의 저주'가 퍼지기 시작했다. 바스커빌가는 완전히 몰락했다. 망나니 바스커빌의 3대손 찰스 바스커빌이 남화공에서 얻은 막대한 부를 업고 황무지로 돌아올 때 까지 바스커빌가의 대저택은 아무도 살지않는 황무지에 버려져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찰스 바스커빌마저 '지옥개의 저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드디어 런던 베이커가 221번지 B호에 사건 의뢰가 접수 된다. 

 

 

<출처: Flickr.com, loja> 

 

'바스커빌가의 개'에는 두 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 우선 홈즈의 부활로 유명한 소설이지만 사실 이야기의 대부분이 왓슨 박사의 시점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물론 이런 구성은 후반부의 반전을 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둘째로 전작과는 확연히 다른 소설의 분위기다. 사람과 말을 삼키는 늪지대, 피폐한 황무지, 불을 뿜는 지옥개, 죽음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대저택의 공포 등이 의문의 살인 사건과 어울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바스커빌가의 개'가 고딕 소설로까지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점을 감안하더라도 나에게 셜록 홈즈는 자정이 넘은 시간 오래된 브라운관 TV로 보는 토요 명화만큼이나 빛 바랜 영광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나는 단 한편의 셜록 홈즈를 봤을 뿐이다. 이 한권으로 소설가 아서 코난 도일의 전부를, 혹은 그의 삶과 경험의 화신인 셜록 홈즈를 비하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일 것이다.

고전의 독해란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가 철저히 현대성을 잊고 빠져드는 과거로의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고전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그것에 몰입하는 독자의 태도에 달려있다고도 볼 수 있다. '왜 고전을 읽을 것인가', '그곳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단순히 고전을 읽는 것을 넘어서 고전이 현대와 상호작용하는 혹은 상호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니 '바스커빌가의 개'가 재미 없었다면 곰곰히 생각해 보라. 과연 자신이 틀린 건지 아니면 셜록 홈즈가 틀린 것이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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