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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꿀벌 이야기에 꿀이 빠질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이야기에는 돈이 빠질 수 없는 노릇이다.'
얼마가 있어야 부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10억? 20억? 대기업 회장들에게는 스마트폰 인터넷 뱅킹으로 송금할 수 있는 최저 금액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임금 노동자들에게 '억'은 결코 만만한 액수가 아니다. 그렇다고 20억을 가진 사람을 부자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그럼 8,700만 달러는 어떤가? 이만하면 부자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시골의사는 부자의 기준을 '더 이상 부를 늘려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설의 주인공 엘리엇 로즈워터는 분명 부자다. 8,700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로즈워터 재단의 이사장.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하루에 10,000 달러가 생기지만 의용 소방대원으로 일하며 알콜 중독자, 매춘부, 10대 미혼모 등을 보살피는 로즈워터군의 천사. 이 남자라면 시골의사가 말한 부자의 기준을 충족하고도 남을 것이다.
만약 이런 부자들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는 사회라면 앨리엇 로즈워터는 결코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지구는 탐욕이 휘몰아치는 욕망의 바다 그 한 복판에 떠 있는 작은 배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하여 커트 보네거트는 이런 소설을 쓰게 됐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커트 보네거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여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성의 문제'를 '블랙 코미디'의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로즈워터가의 재산 8,700만 달러는 앨리엇의 증조부인 노어 로즈워터가 남북 전쟁의 혼란기와 전후 미합중국의 허점을 간파하여 축적한 부의 결과물이다. 이 돈은 앨리엇의 아버지인 리스터 에임스 로즈워터에 이르러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는데, 그는 '도덕'을 가르치는 재단을 만들어 이 돈을 모두 귀속시켰다.
재단의 이사장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후손이 대대로 맡는다는 강령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아들인 앨리엇 로즈워터가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알콜 중독자에 정신병자가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신 분열의 이유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대략 2차 세계 대전 참전 당시 무고한 소방대원을 죽인 트라우마가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창문으로 수류탄을 던지고 건물에 침투해 들어가 막고 차고 찌르고, 정신을 차려 보니 소방 마스크를 쓴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한 명은 아직 어린애였다. 죽음이 삶보다 관대한 전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인을 별 것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앨리엇의 영혼은 이 일로 송두리째 파괴 되었다. 신경 쇠약에 걸린 앨릴엇은 곧바로 제대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출처: Flickr.com, dunechaser>
전장에서 돌아온 앨리엇이 처음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건 아니다. 우선 술을 먹기 시작했다. 많이 마셨다. 그러더니 헛소리를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파티 장소에서 더 심했다. 손에 든걸 목격당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싸구려 SF 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의 작품들에 심취했고 모두의 앞에서 그것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출을 시도했다. 미국 전역의 의용 소방대를 전전하며 미친 소방대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의 고향, 인디애나 주 로즈워터로 돌아왔다. 로즈워터 의용 소방대에 최고급 소방차를 기증한 앨리엇은 드디어 정식으로 소방대원이 되었다.
소방서에 두 대의 전화를 놓았는데 한 대는 화재 신고를 받는 전화였고 한 대는 '무엇이든 도와주는 로즈워터 재단'의 상담 전화였다. 이 전화로 의부의 아이를 임신한 열 다섯살 짜리 소녀와 매춘부와 노숙자들을 상담했고 그들에게 상당한 돈을 보내줬으며 로즈워터 군의 신생아들에게는 전부 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IBM)의 주식을 한 주 씩 선물했다.
앨리엇 로즈워터가 기행을 일삼고 이혼 소송을 진행하며 동시에 정신과 치료를 받는 동안 로즈워터 재단의 기금 운용 변호사 무샤리는 로즈워터 재단의 서류 더미 속에서, 심각한 정신 질환이 있는 경우 이사장직에서 해임할 수 있다는 재단 규정을 찾아냈다. 인간이 돈 냄새를 맡았다.
무샤리는 앨리엇 로즈워터를 대신할 상속자를 찾아냈고 그를 앞세워 소송을 걸었다. 상원의원은(앨리엇의 아버지) 아들의 정신을 되찾고 나아가 재단의 돈을 지킬 태스크 포스 팀을 꾸렸다. 앨리엇은 뉴욕으로 송환됐다.
그가 다시는 로즈워터군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시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앨리엇을 전송했다. 앨리엇이 떠난지 얼마 후 로즈워터 군의 매춘부와 미혼모들은 자기 아이의 아버지가 사실은 앨리엇 로즈워터였음을 주장했다. 그들은 모두 앨리엇이 돌봐준 사람들이었다. 그 속에는 의부의 아이를 임신한 열 다섯살짜리 소녀도 끼어 있었다.
이 소설에서 미친것으로 분류되는 사람은 앨리엇 로즈워터와 그의 아내 실비아 뿐이다. 그러나 지극히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미친 사람으로 묘사하는 소설의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커트 보네거트는 로즈워터 부부의 정신병적 선행과 지극히 똑똑한 사람들이 펼치는 탐욕의 세계를 대비시킴으로써 돈에 미쳐 인간의 본성을 잃어 버린 세상에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제 5 도살장'으로 대변되는 커트 보네거트의 후기작들에 비해 이 책은 가볍고 단순하다. 문득 문득 Jesus Christ를 연상케하는 앨리엇 로즈워터의 기행들은 그 이면에 난해한 상징이 숨어 있다기 보단, 등장 인물의 희화화를 통해 조롱의 강도를 증폭시키려는 의도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난해한 상징 따위 없어도 소설은 충분히 훌륭하다. 이 점은 소설의 끝부분, 테니스 라켓을 머리 위로 치켜든 앨리엇 로즈워터가 우리 모두를 향해 '생육하고 번식하라'고 외치는 장면에 이르러 분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294페이지의 양장본 소설을 읽느라 소비된 당신의 노고는 멈추지 않는 웃음과 함께,
모두 보상 받을 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