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 : 정재승 + 진중권 - 무한상상력을 위한 생각의 합체 크로스 1
정재승,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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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과 진중권은 모두 글깨나 쓰는 사람들이다. 글을 잘쓰냐 못쓰냐는 여러가지로 따져 볼 수 있겠지만 특히 쉽게 읽힌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글은 후한 평가를 받곤 한다.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가 각각 제 분야의 까다로운 전문 지식을 다루고 있음에도 그 특유의 가독성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던 기억이, 나는 아직도 생생하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의 기획 의도는 명백하다. 인터넷의 발달과 복잡한 정치 상황, 대형 스포츠 행사의 개최로 촉발된 다양한 문화 현상의 빅뱅. 이 전례없는 사태에 대한 해석이야 말로 지금 우리가 원하는 스토리 텔링인 것이다.   

 

<대중 문화의 알파와 오메가...?>

그러나 대중 문화 비평이란 전혀 새로운게 아니다. 짧게는 발터 벤야민과 아도르노로부터 길게는 그 옛날 고대 벽화에 '요즘 애들은 참 버릇이 없어'라는 낙서가 등장했을 때 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 바로 이 대중 문화 비평이다. 잔뼈가 굵은 출판 업계가 이런 사실을 모를리 없다.  

그리하여 미학자이자 대중 문화 비평가이자 전직 교수인 진중권과 물리학을 전공했고 이제는 뇌과학을 연구중인 베스트셀러 과학자가 링 위에 올라선다. 인문학 vs 과학! 이건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얘기다. 이제 관객은 두 사람의 주먹이 제대로 충돌해 주기만을 바라며 두근대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펀치는 당연하게도 무척 대중적이다. 스타벅스에서 생수, 레고에서 애플, 셀카에서 개그콘서트까지 의, 식, 주, 락! 생활 세계를 총망라한 다양한 문화 현상들은 미학자가 날리는 잽이 되고 과학자가 휘두르는 훅이 된다.   

 

<우리 시대의 Icon>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 경기장은 애초에 미학자에게 유리하게 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학(學)을 추구하는 인문학은 그 주제가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나름의 답을 제시할 수 있다. 게다가 진중권은 오랜 기간 동안 대중 문화와 함께하고 그것을 연구해온 사람아닌가. 그에게 이런 일은 너무나 익숙한 작업이다.

그러나 과학자는 그렇지 못했다. 21개의 소재 중 물리학과 뇌과학의 힘을 빌려 논술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정재승의 글이 현상의 뿌리를 파고드는 논문이 아니라 그저 담백한 에세이가 되고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주 창조론이나 생명의 기원, 인간 복제와 윤리학의 문제 등 과학과 인간의 가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를 두고 두 사람의 대담이 진행됐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는다. 이런 면에서 '크로스'의 기획 의도는 그 자체가 한계이기도 했다.

따라서 웅진지식하우스는 새로운 경기장을 지어야 한다. 이번에는 누구에게도 기울어지지 않은 - 아니 정재승 쪽으로 살짝 기울어도 괜찮다 - 평평한 경기장을 만들어 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 위에서 미학자 vs 과학자의 진정한 종합 격투기가 벌어진다면, 합체도 충돌도 미완성인 이 책의 허물쯤은 적당히 덮어둘 의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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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시절 선배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회사 생활 해보니 어떠냐?'는 것이었다. 대답은 대개 '잘 모르겠다'거나 '그냥 그렇다'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이런 대답을 하면서 어쩜 이렇게 감상이 없을까 하다가도 이 질문을 고대로 선배에게 돌려준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궁금했다. 

아마 특별한 얘기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상'이라는게 원래 그런거다. 다람쥐 쳇바퀴 돌기. 
사람의 뇌는 가장 많이 한 일을 기억하는게 아니라 가장 특별한 일을 기억한다고 한다. 당시이나 나나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처지에 뭔가 특별한 얘기가 있을리 없지 않은가. 이런 질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평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대개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요즘 신입 사원들과 같이 일을 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회사 생활 어떠냐?'는 것이다. 말하면서도 참 난감하다.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나. 돌아오는 대답도 1년 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뾰족하지 않다. 어쩌면 이 말은 신입 사원과 독대하는데서 오는 침묵, 그 난감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안된 선배들의 필살기가 아닐까 한다.




<판화가 Maurits Cornelis Escher 作>



만약 그렇다면 이 기술은 Freshmen에서 Sophomore로 레벨업하는 순간 패시브 스킬로 습득되는 능력일 것이다.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지난 1년간 수 많은 선배들로 부터 들어온 질문이 최면이 되어 Freshmen을 만나는 순간 저절로 발동하는 능력. 이런 구태의연한 대물림을 고급스럽게 '전통'이라고 부르는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난감한 일은 하나 더 있다. 후배들의 입에서 대답하기 곤란한 얘기가 튀어 나왔을 때다. 예를들면 '우리가 하는 일은 생각만큼 창의적이지 않다'거나 '우리의 작업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얘기들 말이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땐 선배로서 뭔가 납득이 갈만한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결국 한다는 얘기는 '조직은 원래 다 그런거다'고 얼버무리는 것 뿐이다. 물론 조금 잰체 하는 사람의 경우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이라고 운을 뗀 뒤 '정말로 모르겠는' 얘기를 주구장창 늘어놓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 '너도 내 나이 되봐' 또는 '당신도 내 위치 되보면'하는 가히 얼토당토 않는 결론을 내려 버리는 경우까지 있다. 선배라고 언제나 답을 갖고 사는건 아니다. 



 

                            <clean shave face. 1moretime 作>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사고 구조를(이하 Frame) 갖고 있다. 때문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Frame과 적응해야할 환경의(조직) Frame이 충돌하는 것은 당연하다. 위에서 예를 든 신입사원들의 의문들은 이 두개의 Frame이 강렬히 충돌했을 때 터져나오는 것이다. 의문이 많이 생길 수록 Frame은 아직 굳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의문'이란걸 품어본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면당신은 이미 '닳은' 사람이다. 당신의 Frame은 이미 온순해졌고 말랑말랑해졌지만 Freshmen에게서 보이는 유연성과는 거리가 멀다. 당신이 가진 말랑함은 탄력이 아니라 흐물함이다.

어리석은 후배들을 깨우쳐 준답시고 근사하게 연설해 보지만 이미 나는 조직의 논리에 포섭당한 좀비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매너리즘과 순응을 '경험'과 '지식'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고 있는 걸지도.

선배란 그저 뒷 사람보다 조금 먼저 답을 구하러 나섰을 뿐이지 이미 모든 해답을 구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선배들도 틀릴 수 있다. 나는 아직 한 개의 답도 찾지 못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선배는 되야 겠다'고 생각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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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제 서재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티스토리에 새로운 블로그를 만들게 됐습니다. 지난 여름 휴가 동안 글들은 모두 옮겨 놓은 상태고 오픈한지는 벌써 2주일 정도 되가네요.  

아무래도 알라딘 서재는 '책방'에서 운영하는 블로그다 보니 제가 다루고자 하는 IT분야나 User Interface에 대한 글은 쉽게 쓸 수 없더라고요. 티스토리로 옮긴 만큼 좀더 자유롭고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글쓰기를 시도할 생각입니다.  

물론 알라딘 서재도 계속해서 유지할 생각이고요 이 곳은 주로 책과 정치, 사회 등 인문학적인 주제만을 다룰 예정입니다.   

티스토리 쪽은 이제 새로 시작한 블로그라 아직 방문자 수는 바닥입니다. 즐겨찾기와 서재를 찾는 알라딘 유저 등을 통해 비교적 안정적인 방문자 수를 올렸던 이곳 서재와는 좀 더 척박한 환경이지만 스스로에게 보다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여겨 어렵게 옮기게 됐습니다.  

어쨌든 글쓰기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2039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겠다는 다짐도 변함 없습니다. 앞으로도 쭉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처럼만 봐주신다면 더 바랄게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www.wiredhusk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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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전3권 세트 - 한국만화대표선
박흥용 지음 / 바다그림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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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k(벡, 해롤드 사쿠이시 작)에 대한 글에서 썼듯이 만화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오로지 시각을 통해서만 전달하는 매체이다. 그러므로 만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기린의 이름은 기린이다 라고 하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이란 머리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아서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게 되고 거의 예상했던 일이 보란듯이 틀어지고 마는 일이 빈번히 나타나곤 한다. 감정 이입이 쉽지 않은 그림임에도 그 글을 읽는데 흠뻑 빠져들고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독서 경험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영화에선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원작은 매우 서정적인 작품이다. 그것은 영화가 주로 이몽학-황처사(혹은 견자)-백지의 피상적인 대립 구조에 근거를 둔 반면 원작은 견자의 내면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준익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도 바로 견자의 내면. 시대 자체보다는 그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한 '개인'의 애수였을 텐데 이는 이준익의 이야기들이 언제나 역사 속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시대보단 개인의 정서를 그리는데 공을 들인 전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이준익이 '왕의 남자'만큼 잘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다.

그러나 원작의 글은 너무나 오묘했고 차분했다. 그것은 푹푹 고아 삶아내는 사골국처럼 차분히 앉아 뜸을 들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2시간 남짓의 시간에 압축하기엔 글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고 그 의미는 너무나 거대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무대는 조선의 선조 시대. 바야흐로 임진왜란의 전운이 감돌고 동서인의 당쟁이 극에 달했으며 정여립이 반란하는 등 유사이래 그보다 더한 폐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시기였다.  

주인공은 한견자(犬子)라는 인물로 본명이 한견주(堅柱)요 또 서자 출신이었다. 견자는 뛰어난 침술가요 전설적 검객인 봉사 황정학을 만나 그를 스승으로 삼게 되는데 이 만남이 의미하는 바가 또 오묘하다.

견자는 신분에 대한 울분으로 사회에 의미없는 분노를 표출할 뿐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는 눈 뜬 장님이다. 반면 봉사임에도 마치 구르미 달을 버서나듯 태생의 저주를 훌훌 털어버린 황정학은 진정한 자유인이요 또 '눈 뜬' 장님이다. 이 눈 뜬 장님 둘이 만나니 비록 '눈 뜬'의 의미는 서로 다를지언정 두 사람의 마음까지 다르진 않았다.  

황정학은 눈먼 병신으로 천대 받았던 경험을 기억하기에 견자의 울분을 이해하고 견자는 황정학의 초월적 능력을 보고 자신의 깨부셔야 할 것은 부패한 나라, 사회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견자의 성장 만화가 된다. 역사의 소용돌이를 배경으로 스펙타클하게 전개되는 이야기가 아닌 까닭에 만화는 여유가 있다. 명대사들도 견자와 황정학이 나누는 한담 속에 드러나고 그것은 은근히 스며드는 서정시가 되었다가 곧 가슴 전체를 울리는 소리로 퍼져나간다. 영화가 원작을 쫓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고작 팔천원을 내고 감동과 재미와 메시지까지 남겨 가려는 관객들에게 영화는 어느 한 곳에도 집중하지 못한채 조바심 내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대중 예술이란 이렇듯 쉬워 보이면서도 결코 쉽지가 않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삼백원짜리 대여점에서 만나지 않은 건 참 다행이다. 만화가 책장 안에서, 위대한 문학과 나란히 호흡할 수 있다고 믿기에 나는 이 세 권의 만화를 나의 서재에 꽂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보다 글이 좋은 만화, 그래서 더 오롯이 기억되는 작품.

찌는듯 사람을 볶아대는 이 더위가 마치 견자와 황정학을 괴롭혔던 사회의 굴레처럼 느껴지기에 이 밤, 웬지모를 절절함이 가슴 속에 더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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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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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들이 '예수'에 집중하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무래도 그들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고 했던 예수의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토록 노골적으로 유산계급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 인물이 존재했던가? 이 질문의 답을 잠시 미뤄둔다 하더라도 이토록 상쾌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은 인물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관심가져 보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솔직함이 그 어느 시대보다 절실히 다가오는 오늘날에 말이다.  

김규항은 우리 사회의 혁명 실패를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는 영성의 개발이 없는 혁명이다. 그리고 둘째는 영성의 개발에만 몰두하는 혁명이다. 전자는 냄비에 끓이는 밥과 같다. 밑바닥은 다 타서 늘러 붙는대도 윗 부분은 설익어 먹을 수 없다. 반면 후자는 증기를 내뿜지 않는 압력 밥솥이다. 안으로 꽁꽁 싸매고 들어가 아무리 힘을 줘도 뚜껑은 열리지 않는다. 

그러니 해답은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땐 그냥 '중간'에 두고 에둘러 말해 버리면 의외로 위대한 해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공자도 그랬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랬으며 칸트 또한마찬가지였다. 김규항이도 이렇게 말한다. 혁명은 '사회 변혁과 내 안의 변혁이 동시에 이루어졌을 때 탄생한다'. 고로 좌파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김규항이 이번에 '예수'라는 담론을 자신의 필모그라피에 올리기로 한 것은 그 자신에게는 혁명의 초석이요 필수불가결한 사항이었을 것이다.

'예수전'은 마르코 복음서를 중심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쫓는다. 김규항에 따르면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의 견해'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복음서로 4복음서 중 가장 먼저 씌였고 종교적 첨가가 가장 적은 복음서이다. 

김규항이 마르코 복음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굳이 좌파 기독교도라는 말을 만들어야 할만큼 보수화해버린 오늘날의 교회와 말씀은 김규항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 예수', 진보의 탈을 쓰고 인민을 호도한 짭퉁 지도자들에(바리새인) 대항하고 성전 앞 상인들의 좌판을 뒤 엎으며 분노했고 언제나 빈자와 약자를 대변했던 이 위대한 '아웃사이더'를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예수전'을 통해 김규항이 말하고자하는 유일한 것이다.

나는 한국의 기독교도들은 정말 무식하고 편협하다고 생각한다(물론 나를 포함해서). 이슬람교 심지어 가톨릭까지 싸잡아 사이비 종교쯤으로 말하는걸 보고 있으면 그 무식에 정신이 아연해지기까지 한다.이것은 한국의 종교 교육이 몰이해와 배타성으로 점철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들에게 왜 몰이해와 배타성이 필요한 것인가? 그건 이미 거대한 주식회사로 변해버린 한국 교회를 지탱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의 모토는 단 하나. 

남보다 더 많이 고객을(신도) 유치하는 것. 

그러기 위해선 남의 종교, 심지어 다른 교파 마저도 찢어 발겨야 한다. 몰이해와 배타성은 일종의 마케팅 전략인 것이다.

신도가 돈으로 보이는 교회에서 어떻게 빈자와 약자를 대변했던 예수의 말씀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예수가 재림하여 부와 권력에 맛들인 목사들을 향해 '너희들이 가진 모든 것을 놓고 나를 따르라'고 한다면 누가 과연 예수를 따를 것인가? 그들은 또 한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다.

당신이 꼬박꼬박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헌납하며 좋은 배우자와 직장, 높은 시험 점수를 얻기 위한 기도를 올리기 전에 진짜 예수의 말씀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하자. 그리하여 내 안의 진정한 변혁부터 이뤄내자. 그럼 총력전도주일에 가짜 신도의 이름을 적어내지 않아도, 전철역 앞에서 싸구려 커피믹스를 타주지 않아도 복음은 제발로 땅끝까지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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