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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전3권 세트 - 한국만화대표선
박흥용 지음 / 바다그림판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Beck(벡, 해롤드 사쿠이시 작)에 대한 글에서 썼듯이 만화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오로지 시각을 통해서만 전달하는 매체이다. 그러므로 만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기린의 이름은 기린이다 라고 하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이란 머리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아서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게 되고 거의 예상했던 일이 보란듯이 틀어지고 마는 일이 빈번히 나타나곤 한다. 감정 이입이 쉽지 않은 그림임에도 그 글을 읽는데 흠뻑 빠져들고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독서 경험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영화에선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원작은 매우 서정적인 작품이다. 그것은 영화가 주로 이몽학-황처사(혹은 견자)-백지의 피상적인 대립 구조에 근거를 둔 반면 원작은 견자의 내면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준익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도 바로 견자의 내면. 시대 자체보다는 그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한 '개인'의 애수였을 텐데 이는 이준익의 이야기들이 언제나 역사 속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시대보단 개인의 정서를 그리는데 공을 들인 전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이준익이 '왕의 남자'만큼 잘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다.
그러나 원작의 글은 너무나 오묘했고 차분했다. 그것은 푹푹 고아 삶아내는 사골국처럼 차분히 앉아 뜸을 들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2시간 남짓의 시간에 압축하기엔 글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고 그 의미는 너무나 거대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무대는 조선의 선조 시대. 바야흐로 임진왜란의 전운이 감돌고 동서인의 당쟁이 극에 달했으며 정여립이 반란하는 등 유사이래 그보다 더한 폐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시기였다.
주인공은 한견자(犬子)라는 인물로 본명이 한견주(堅柱)요 또 서자 출신이었다. 견자는 뛰어난 침술가요 전설적 검객인 봉사 황정학을 만나 그를 스승으로 삼게 되는데 이 만남이 의미하는 바가 또 오묘하다.
견자는 신분에 대한 울분으로 사회에 의미없는 분노를 표출할 뿐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는 눈 뜬 장님이다. 반면 봉사임에도 마치 구르미 달을 버서나듯 태생의 저주를 훌훌 털어버린 황정학은 진정한 자유인이요 또 '눈 뜬' 장님이다. 이 눈 뜬 장님 둘이 만나니 비록 '눈 뜬'의 의미는 서로 다를지언정 두 사람의 마음까지 다르진 않았다.
황정학은 눈먼 병신으로 천대 받았던 경험을 기억하기에 견자의 울분을 이해하고 견자는 황정학의 초월적 능력을 보고 자신의 깨부셔야 할 것은 부패한 나라, 사회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견자의 성장 만화가 된다. 역사의 소용돌이를 배경으로 스펙타클하게 전개되는 이야기가 아닌 까닭에 만화는 여유가 있다. 명대사들도 견자와 황정학이 나누는 한담 속에 드러나고 그것은 은근히 스며드는 서정시가 되었다가 곧 가슴 전체를 울리는 소리로 퍼져나간다. 영화가 원작을 쫓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고작 팔천원을 내고 감동과 재미와 메시지까지 남겨 가려는 관객들에게 영화는 어느 한 곳에도 집중하지 못한채 조바심 내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대중 예술이란 이렇듯 쉬워 보이면서도 결코 쉽지가 않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삼백원짜리 대여점에서 만나지 않은 건 참 다행이다. 만화가 책장 안에서, 위대한 문학과 나란히 호흡할 수 있다고 믿기에 나는 이 세 권의 만화를 나의 서재에 꽂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보다 글이 좋은 만화, 그래서 더 오롯이 기억되는 작품.
찌는듯 사람을 볶아대는 이 더위가 마치 견자와 황정학을 괴롭혔던 사회의 굴레처럼 느껴지기에 이 밤, 웬지모를 절절함이 가슴 속에 더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