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반양장)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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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 미술과 고전 미술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재현성'에 있을 것이다. 고전 미술은 그것이 무엇을 재현하는지 명확한 입장을 취했다. 미켈란젤로는 성당 천장에 하나님과 아담을 그렸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캔버스 위에 성모 마리아와 루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를 그렸다. 그러나 여기 현대 미술이 있다. 그것은 형체를 잃고 주제를 버렸으며 의미를 숨긴 것처럼 보인다. 현대 미술을 마주한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무엇도 재현하지 않기에 미술은 순수하게 그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미술은 더 이상 '~을 위해 존재' 하거나 '~을 재현하지' 않는다. 미술은 말한다. 나는 '~을 하기 위해' 여기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로지 '나이기 위해 이곳에 있다'. 이름만 들어도 성스러워지는 Fine Art의(순수 예술) 시작이다.


Fine Art는 자연이 아니라 예술 자체를 탐구한다. 더 이상 그 무엇도 재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을 재현'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재현 대상과 재현 결과인 예술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낸다. 실재보다 더 실재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재현을 주제로 하는 예술은 태생 자체가 저급한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잘해도 결국엔 실재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한계에 가닿고야 만다.


재현을 포기하기 위한 가장 극단적 방법은 사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뒤샹은 급진적일 뿐만 아니라 천재적이었다. 뒤샹은 변기에 서명을 한 뒤 전시회에 출품했다. 이미 만들어진 변기는 자기 자신 이외에 그 어느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예술은 사물 그 자체가 됨으로써 가장 순수한 것이 된다. 여기가 바로 모더니즘의 클라이막스였다.





모더니즘은 근대를 극복하기 위한 기획이었다. 다른 말로 그것은 그 당시의 '현재'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현재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더니즘 예술의 급진성은 자기 자신을 미래로 규정하기 위한, 혹은 자기 자신을 미래에 위치 시키고자 하는 노력으로 봐야한다. 그러나 여기 시간의 숙명성이 있다. 미래는 결국엔, 언젠가, 현재가 된다. 더불어 그것은 과거가 된다. 뒤샹이 변기를 '샘'으로 명명하는 그 순간 모더니즘은 현재를 극복하고 전통을 극복하고 체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샘'이 그것을 설명하는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미술관의 '현대 예술' 섹션에 위치하는 순간 모더니즘의 생명은 다한다.


1960년대에는 이미 "아방가르드주의 자체가 전통이 되고, 예외로서 규칙이 되어버리는 미래 사회의 징후"가 나타나 있었다. (중략) 여기서 아방가르드의 극복이 '끝없는 자기 부정'이라는 아방가르드의 계승이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포스트모던은 이 역설에서 출발한다(모더니즘편 p.357).



포스트모더니즘, It's just happening


이 책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추상표현주의(잭슨 폴록), 앵포르멜, 색면추상,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팝아트, 플럭서스, 해프닝 등을 언급하고 있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해프닝' 뿐이다. 


'해프닝'은 '간단히 말해 그냥 일어나는 사건'(p. 223)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해프닝은 '예술과 삶의 경계를 구별하지 않으'며 '단 한 번만 실연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예술과 삶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프닝은 예술가 혹은 예술이 취하는 특권적 위치를 포기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예술을 위해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진짜 바보에게 바보라는 말은 욕이 될 수 없듯이 여기서 너를 예술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비평의 협박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게 왜 중요할까?


고대에는 새조차 무엇이 더 위대한 예술인지 알고 있었다(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그림 경연을 떠올려 보라!).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비평은 단순한 사후 해석을 넘어 예술 자체를 규정하는 심판자가 된다. 비평 없이는 그 누구도 작품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술과 비평 사이에 견고한 카르텔이 형성된다. 그러나 카르텔은 기본적으로 이권에(利勸) 대한 입장의 일치다. 이 말은 예술이 문화 산업에 굴복하고 그것을 살찌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해프닝은 예술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그저 삶 자체일 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해프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해프닝은 예술을 이용해 살을 찌우려는 그 어떤 주체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진정한 Fine Art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편 '단 한 번만 실연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에 해프닝은 영원히 '현재'일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초기에 해프닝은 꽤 엄격한 스크립트가 있어 관객과 퍼포머 사이에 행위를 규정하곤 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즉흥성'을 더 강조해 그 기획과 실연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는 구경꾼들을 몰고 나가 마당 위에 얼음 벽돌을 함께 쌓았다. 얼음은 결국 녹을 것이다. 얼음이 녹고 나면 해프닝은 그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모던을 극복하려는 수 많은 포스트모던적 시도는 '작품'을 남기는 우를 범하므로써 언젠가 그 자신이 과거가 되는 참사를 겪는다. 전통을 극복한 위대한 작품들이 모든 열정과 힘을 쏟아 낸 뒤 박물관으로 돌아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통이 되는 것이다전통을 극복하려는 그들의 야망은 일시적이지만 해프닝은 그 자체가 '일시적' 이었기에 오히려 영원히 '현재'로 남게 된다. 작품을 남기지 않은 것은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체제를 극복하겠다는 정신이 결국엔 체제가 되어 군림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일은 없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애초에 시지프스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 둘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만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게 되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은 자기가 영원히 미래에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어느새 과거가 되버렸고 자기를 부정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러나 해프닝은 애초에 부정될 '자기'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그 윤회의 고리를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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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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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과 개미


<좀머 씨 이야기>는 설령 좀머 씨에 대한 이야기를 뺀다 하더라도 꽤 괜찮은 소설로 남았을 것이다. 유년기의 파스텔톤 추억이 잔잔하게 흘러, 이제는 온통 회색빛으로 변한 우리의 마음에 생명력 넘치는 빛깔을 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엔 좀머가 있다. 그의 죽음이 있다. <좀머 씨 이야기>를 읽는 것은 아름다운 벚꽃 가지 위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를 보는 것과 같다. 벚꽃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선 그 개미까지 봐야 한다. 개미는 작지만 결코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는 법이 없다. 어느새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봄이 지나면 이제 남아 있는 것은 개미 뿐이다. 


이 작품은 호수와 숲과 바람이 있는 작은 마을을 그리는 데 대부분을 할애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오히려 좀머의 발자국이 더 깊게 남는다. 나는 그 자국을 더듬어 이 책을 네 번이나 읽었다. 



좀머 씨의 죽음


좀머 씨의 삶은 대부분 공백으로 남아 있어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비어 있기에 채울 수 있다. 이 소설은 매우 짧지만 그 채워질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그가 우리에게 직접 전해준 말로부터 이 채움을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p. 35)


이것은 작중 화자인 '나'의 아버지가 주먹만한 우박이 떨어지던 길을 홀로 걷는 좀머 씨에게, '그러다 죽겠어요'라고 말하자 그가 한 대답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그러니 나를 죽지 않게 하려면 제발 날 가만 놔두시오'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가 피아노 선생님에게 심한 야단을 맞고 자살을 결심해 올라간 가문비 나무 위에서 좀머 씨를 목격한 대목의 지지를 받는다. '나'는 거기서 아주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는 좀머 씨를 발견한다. 그리고는 자살할 결심을 포기한다. '불과 몇 분 전에 일생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을'(p. 94)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 고작 피아노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았다는 이유로 자살을 한다는 것은 정말 웃기는 짓거리가 아니겠는가. 


'나'는 좀머 씨의 끊임없는 걷기가 사실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오해일 수도 있다. 이것이 오해라는 사실은 '나'가 훨씬 나이를 먹고 난 뒤, 좀머 씨와 다시 만난 대목의 지지를 받는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숲 속을 달리던 중 호숫가에 서 있는 좀머 씨를 보게 된다. 그는 걷고 있지 않았다. 좀머 씨는 석양이 지는 호수 반대편을 바라보며 멈춰 서 있었다. 그러다 한 발짝 한 발짝 호수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 물은 좀머 씨의 무릎까지 찼다. 잠시 후 허리까지, 가슴까지 그리고 머리 꼭대기까지 물이 차 올랐다. 이윽고 호수는 잔잔해지고 좀머 씨의 밀짚모자만이 살랑이는 물결을 따라 유유히 떠내려갔다. 


'나'는 그제서야 우박이 떨어지는 그날 밤 자신을 향해 외쳤던 좀머 씨의 말이 이해 된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말은 '그러니 죽을 수 있게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나는 가문비 나무 아래에서 좀머 씨가 뱉던 한숨을 떠올린다. '나'는 좀머 씨를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누나에게도, 형에게도, 경찰에게도,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 코르넬리우스 미켈에게조차 그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침묵으로 그의 죽음을 지켜주었다.



쥐스킨트의 아이러니


좀머 씨가 원한 것은 영원한 침묵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이 세상에 묶어 두려는 다른 존재를 피해다닌다. 이것은 마치 타자에 의해 자신의 작품이(존재가) 해석되는 걸 끔찍히도 싫어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 떠올리게 한다. 좀머 씨는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발생하는 필연적인 오해와 불통의 과정을 피하고 싶어 끊임없이 도망다녔던 걸지도 모른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자신이 언론과 대중을 피해 철저히 숨어 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 쥐스킨트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는 왜 소설을 쓰는 걸까? 


그는 왜 소설을 써 대중에게 보여주는 걸까. 그 행위가 자신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나'는 '나'의 침묵이 좀머 씨에게 안식을 줬다고 생각하지만 틀렸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호수 밑바닥에 고요히 침잠해 있는 좀머 씨를 꺼내 <좀머 씨 이야기>를 썼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좀머 씨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만 기어이 소설을 써 그를 안식에서 몰아내고 완성된 소설은 다시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안식에서 몰아낸다. 그는 왜 이 부조리한 장난을 반복하는 걸까?


어쩌면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나'와 '좀머 씨' 사이에서 방황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쥐스킨트는 보통 사람의 세계에 있는 '나'와 그것으로부터 영원히 침묵을 지키고 싶은 '좀머 씨'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다. 그는 소설을 쓸 때는 '나'가 되지만 다 쓰고 나면 '좀머 씨'가 된다. 살아 있는 사람이 평생 동안 이 세계로부터 도망다니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러기 위해선 좀머 씨처럼 차가운 호수 한가운데로 발을 옮길 용기가 있어야 한다. 


9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신작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쥐스킨트가 비로소 어떤 선택을 했는지 추측할 수도 있다. 나는 그가 평생 좀머 씨로 살기로 결심했길 바란다. 그 자신의 안식을 위해서라면 그의 작품 같은 건 다시는 안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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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노자 : 道에 딴지걸기 지식인마을 6
강신주 지음 / 김영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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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를 아십니까?'의 그 道가 노자의 道와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사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용어의 선입견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도가를(道家) 얘기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떨떠름함과 기괴함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물론 태초의 노장 사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문제가 없었을 뿐만아니라 도가는 수 많은 철학이 난무하던 제자백가, 그 중에서도 유가, 법가와 함께 시대를 대표한 사상이었으며 난세를 태평하게 할 강력한 후보 중 하나였다. 오늘날 우리는 '도'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갖고 있다.


우리의 두 번째 오해는 우리가 노자와 장자를 노장으로 묶어 생각한다는 것이다(이건 비운의 역사가 사마천의 죄다). 노자의 사상 국가의 동작 방식을 철학적으로 해석해 영원불멸할 통치체제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면 장자는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살 수 밖에 없는 개인이 그 타자와 어떻게 해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한지를 설명한 소통의 철학자였다. 노자와 장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자였던 것이다.



장자 철학의 핵심 테마 '소통'


구성된 마음을(成心)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기준으로 삼는다면), 그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변화를 알아 마음으로 스스로 판단하는 자에게만 구성된 마음이 있겠는가? 우매한 보통 사람에게도 이런 사람과 마찬가지로 구성된 마음이 있다. 아직 마음에서 구성된 것이 없는데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마치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하였다'는 궤변같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다(p. 30~31).


성심이란 이미 구성된 마음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구성된 마음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선입견이다. 선입견이란 어느 문맥에서 사용되든 뭇매를 맞기 쉬운 부정적 단어지만 사실 선입견 없이 우리의 자의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판단하며 살아가는가? 나의 판단과 행위의 축적은 곧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 선입견은 나라는 존재가 발현될 수 있는 최초의 원인인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입견을 만들어 나간다. 선입견은 타자에 대한 판단 결과이기도 하지만 한편 사회 규범과 예의 범절이 내면화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어른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또 조직 사회에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모두 선입견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선입견은 특정 사회에서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문제는 이것이 유유상종이라는 특유의 관계 맺기를 통해 고착화된다는 점이며 이것이 새로운 타자를 만났을 때 심각한 소통의 벽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여기 연애를 시작한 여자가 있다. 이 여자는 데이트를 위해선 남자가 반드시 차를 가지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러 와야하며 모든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내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여자다. 하지만 연애의 환상은 언제나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서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여자는 자기에게 그런 대접을 해주지 않는 남자를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는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주변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확인하는 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유유상종, 여자는 자신의 선입견이 보편타당함을 다시 한 번 확신한다. 이제 여자는 이별을 선언하고 소통은 실패한다. 


장자는 이렇듯 '특정한 성심을 표준으로 삼는 고착된 자의식'을 비판하며 유동적인 자의식 즉 '허심(虛心)'을 강조했다. 허심은 자신이 기존에 구성해온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 커다란 충격이자 고통이다. 그것은 '나'를 부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은 바로 그 고통의 순간에서 나온다. 


소통이란 나의 성심을 일부 수정 보완하며 타자에 맞춰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똑똑한 이기주의자들이 삶에 대처하는 전략적 비지니스일 뿐이다. 진정한 소통은 확실히 대범하다. 그것은 나 자신을 지우는 고통의 순간을 통해 타자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상태에서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달라'는 멜로 드라마 영원불멸의 테마가 사실은 장자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소통의 핵심은 타자와 더불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소통의 극의에 달한 사람은 깨끗하게 닦인 거울 같을 것이다. 거울은 미인이 보면 미인의 모습을 비추고 추녀가 보면 추녀의 모습을 비춘다. 거울은 추녀가 봤을 때 미인의 모습을 함께 비추며 추녀에게 미녀의 관점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성심이 타자에게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명경지수>, 정창균



노자 철학의 핵심 테마 '착취해야만 비로소 나눠줄 수 있다'


꽃과 나무를 벗삼아 무위자연, 욕심 없이 살아가는 게 노자 철학의 핵심이라 배워왔던 우리에게 그 사상의 진면목을 바라보는 건 마치 곰돌이 푸와 야생곰 사이에서 느꼈을 인지부조화의 충격과도 같을 것이다.


노자는 샌더스 대령 같은(KFC 앞에 서 있는 그 남자) 호호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는 난세 중의 난세, 전국 시대에 활동한 사상가였다. 천하를 얻을 수 있는 필살의 방법으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철학이 어떻게 꽃과 나무만을 벗삼을 수 있을까? 노자의 철학은 천하를 얻는 것을 넘어 그것을 영속화 하는 법을 고민했다는 점에서 그 사상의 고유성이 있다. 남들보다 한 술 더 뜬 셈이다.


백성이 굶주리는 이유는 통치자가 세금을 많이 거두기 때문이다. (중략)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은) 통치자가 지나치게 자신의 삶을 충족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p.83).


이 말은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국가가 작동되는 방식의 정수를 설명한다. 국가가 지속되기 위해선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세금을 백성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점이다. 백성이 세금을 내면 국가는 농업 기술을 개발해 보급하고 도로, 관개 시설 등 인프라를 건설하며 군대를 만들어 다른 나라의 약탈을 막는다. 이처럼 국가와 백성 사이에는 교환 관계가 성립된다. 내가 세금을 내면 국가도 뭔가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러한 교환 관계가 무너졌을 때 국가가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음을 무수히 증언함으로써 노자의 통찰을 밝혀준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노자 철학의 근본적 한계가 있다. 위 말을 곱씹어 보면 노자가 이미 국가의 수탈을 당연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자에게 있어 수탈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문제였던 것이다.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농노들>, 일리야 레핀



세금을 거두는 것은 따지고보면 국가의 수탈 행위다. 그것은 이 제도가 생긴지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가 세금을 낼 때 마치 도둑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느낌만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국가가 당신에게 나눠주는 것은 모두 당신으로부터 빼앗은 것이다. 그리고 나눠주는 것은 결코 빼앗은 것보다 클 수가 없다! 모든 백성이 이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 통치의 지속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노자는 수탈을 수탈처럼 보이지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통치자가 취해야 할 전략이자 반드시 갖춰야할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무위의 통치가 등장한다.


가장 좋은 것은 백성이 통치자가 있다는 것만을 아는 것이고, 그 다음은 통치자를 가깝게 여기고 칭찬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통치자를 두려워하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통치자를 모욕하는 것이다. (중략) 성인의 말 아낌이여. 그는 공을 이루고 일을 완수하였지만 백성은 모두 자신이 저절로 그러하였다고 말한다(p. 108).


그렇다. 가장 좋은 통치자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국민들이 알 수 없는 통치자다. 이것은 빼앗고 나눠주는 교환 관계가(통치자의 행위가) 백성의 삶에 깊숙히 파고들어 아예 인지조차 못하는 상황이다. 좋은 통치자는 빼앗되 그것이 빼앗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한다. 또 베풀 때는 그것이 백성들로부터 빼앗은 걸 되돌려 주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한다. 백성이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통치자는 숨기고 숨겨야 한다. 


백성이 수탈을 수탈로 받아들이지 않고(無爲, 무위) 자발적으로 복종할 때(自然, 자연) 혁명의 가능성은 제로가 되고 통치자의 지배는 영원해 진다. 무위자연(無爲自然)에는 이처럼 간교한 통치자의 음모가 숨어 있다.



왼쪽부터 노자, 장자



그리고 지금, 노자와 장자의 철학


최근 노자의 철학은 근대 사회가 몰고온 인간성, 자연의 파괴에 맞설 대안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오해인가? 노자의 철학은 지배-피지배 구조가 이미 고착된 세계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한 사상이지 변혁과 반전을 위한 사상이 아니다. 노자의 무욕(無欲)이 인간의 욕망을 근간으로 자행되는 환경 파괴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도 무리가 있다. 우리는 욕망의 근원을 더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 욕망은 과연 인간의 내부로부터 자발적으로 생성되는가? 오히려 현대의 자본주의가 없던 욕망을 생산하고 그것을 관리함으로써 인간을 부추기는 게 아닐까?


반면 장자의 철학은 계층, 종교, 정치 등 각종 이해집단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현대 사회에 '소통'이라는 근본적 해결책을 던져준다. 그것을 실행하느냐 마느냐가 모두 우리에게 달린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에필로그


한 가지 우려되는 바가 있어 덧붙이자면, 여기 나오는 장자, 노자에 대한 해석은 저자 강신주의 생각이자 그의 책을 읽은 나의 생각이다. 이 생각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다소 과장된 건 아닌지는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 자신의 지적 여정을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강신주가 아직 유명해지기 전에 쓴 책이다. 그는 확실히 말보다 글이 좋은 사람이다. 최근에 들어 그를 주목한 사람이라면 그의 글보다 말에 매료됐겠지만 말이다. 강신주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그의 책을 읽는 것이 좋다. 더 좋은 방법은 그의 철학책을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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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2014-04-06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이 있어서 더욱 좋은 글입니다, 대학로서 처음 뵌 후로 강신주 쌤은 말씀보다 글이 더 낫다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한깨짱 2014-04-07 15:00   좋아요 0 | URL
강신주님은 역시 말보단 글이죠! 언제나 본질과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매스미디어와 대중의 속성이겠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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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기에 앞서


이 글에는 엄청난 양의 스포일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글은 오직 읽은자들을 위한 글이다. 그러니 읽지 않은 사람은 이 글을 보지 말았으면 한다. 이 책을 선택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 때문에 이곳에 들른 사람이라면 이렇게 얘기해 주고 싶다. 세상에는 이유를 막론하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읽는 일이 그렇다. 


이 책을 다섯 번이나 읽고 나서야 이 글을 쓴다.



루엘린 모스


베트남 참전 군인 루엘린 모스는 저격용 라이플의 조준경을 통해 황량한 대지를 바라본다. 그 위엔 영양떼가 있다. 모스는 다시 한 번 조준경의 거리를 맞추고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올린 뒤 숨을 가다 듬는다. 피융! 총알이 영양의 대퇴부에 꽂히고 소리가 뒤따라 날아온다. 영양들이 달리기 시작하고 대지는 엷은 먼지 구름에 휩싸여 뿌옇게 흐려진다. 모스는 핏자국을 따라 영양을 추적한다. 그의 목에는 멧돼지 이빨 목걸이가 걸려 있다. 그는 사냥꾼이다. 그러나 핏자국의 끝에서 250만 달러가 든 돈가방을 발견했을 때 그는 자신의 처지가 피를 흘리는 영양의 처지와 뒤바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모스는 욕망의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의 이름 Moss가 나방을 뜻하는 단어 Moth와 흡사하다는 사실은 놀랄 것도 아니다. 그는 가방을 들고 황량한 대지를 가로질러 트럭에 도착해 뒷좌석에 가방을 놓고 점화 플러그에 키를 꼽는다. 키를 돌려 시동을 걸었을 때 덜덜거리는 엔진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육중한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톱니바퀴는 모스를 집어삼켜 산산조각을 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으스러지는 뼈소리를 들으며 그는 한 남자와 마주한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안톤 시거다. 사상 최악의 사냥꾼이다.



안톤 시거


안톤 시거가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나의 지지는 변함이 없다. 안톤 시거는 '죽음'을 상징한다. 시거는 국경지대에서 남자 하나를 죽이고 보안관에게 잡힌다. 보안관의 사무실에서 시거는 손에 찬 수갑을 보안관의 목에 걸어 목졸라 죽인다. 시거는 임박한 위기나 죽음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의연하다. 언제나 무표정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명확하다. 시거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죽지 않을 뿐더러 가둘 수 조차 없다는 사실을. 시거는 사실 의도적으로 잡혔다. 의도적으로 잡히기 위해 그는 의도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그러니까 국경지대에서 저지른 두 건의 살인은 시거가 자기 자신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시험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 존재의 확인이 죽음으로 마무리된다면 그 존재의 실체는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거의 동전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시거와 마주친 자들은 거의 죽음을 맞이하지만 간혹 기회를 얻는 사람들이 있다. 시거는 동전을 던져 그들로 하여금 앞, 뒤를 맞추게 한다. 맞힌 자는 죽지 않는다. 이것은 그저 변덕스런 절대자의 놀이인가? 그렇지 않다. 시거의 동전은 한순간의 선택이 우리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죽음으로 감당하기에 동전 던지기는 너무 사소한 선택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사소한 선택이란 없다. 살면서 내린 선택들은 돌고 돌아 언젠가 눈덩이처럼 커져 돌아온다. 그 눈덩이를 마주하는 날이 우리 삶의 청산일이다. 그 날이 바로 죽음이 우리에게 동전을 던져주는 날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단지 동전의 앞뒤를 맞추지 못해 죽은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저 마지막 선택이었을 뿐이다. 그 선택의 뒤로 무수한 선택이 사슬처럼 얽혀 우리가 태어난 날에까지 가 닿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안톤 시거의 정체로 돌아와, 그가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시거가 '죽음'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시거를 쫓는 보안관 벨은 시거를 목격한 아이들을 찾아가 그의 인상착의를 묻는다. 아이들은 시거가 그저 보통 사람 같았다고 말한다. 아주 평범한, 우리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죽음이 아주 특별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두운 망토를 두른채 큰 낫을 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라는 생명이 태어나는 그 순간 바로 나의 죽음도 탄생한다. 나와 죽음은 쌍둥이인 것이다. 죽음은 나와 너무 닮아 있어서 혹은 너무 평범하기에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에 임박해서야 비로소 내 손목을 잡은 그 죽음이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아주 오랫동안 내 옆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죽음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당신이 아무런 눈치도 못챈 게 전혀 놀라울 것 없다는 듯이.


하지만 시거를 죽음으로 해석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그가 가진 숙명성이다. 시거가 가는 길에는 언제나 죽음의 융단이 깔린다. 그 누구도 시거를 피할 수 없다. 시거는 돈가방이 어디 있는지 안다는 웰스(범죄 조직은 돈가방을 찾기 위해 시거를 보내지만 통제할 수 없는 그를 막기 위해 다시 웰스라는 청부업자를 파견한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거: 가방이 어디 있는지 안다고?

웰스: 그래.

시거: 나는 더 좋은 걸 알고 있지.

웰스: 뭔가.

시거: 가방이 어디로 갈지.

웰스: 어디인가.

시거: 나한테 와서 내 발밑에 놓일 거야.

(p.195)


그리고는 산탄총으로 웰스의 얼굴을 쏴 그의 머리를 끈적이는 고깃덩이로 만든다. 시거에게 이 모든 소동의 해결은 그저 시간 문제에 불과할 뿐이다. 사람이 어디로 가든 어디에 숨든 그는 결국 시거(=죽음)를 만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의 앞에 선 모든 생명은 무로 돌아가고 돈가방은 시거의 차지가 된다. 사람들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숨막히는 추격전을 그리고 있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시거는 단 한 번도 그들을 쫓은 적이 없다. 시거는 그저 목적지에 먼저 도착해 기다릴 뿐이다. 죽음을 피해 열심히 도망쳤다고 생각한 그들은 사실 필사의 힘을 다해 죽음의 품으로 달려든 것이다.





텍사스에서 온 악마


이 부분은 나의 해석이 아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참고 자료를 찾았는데 거의가 쓰레기 같은 글이었다. 그 쓰레기 중에는 꽤 많은 조회수와 추천이 있는 글도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하루 방문자가 4명 밖에 안되는 블로그에서 이 글을 발견했다. 나는 이 글을 소개해야만 한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gulchance&logNo=60126538922


이 글의 요지는 '잘 살아 보자'는 달콤한 거짓말이 어떻게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는지, 또 그로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열풍과 미국의 패권주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알려주는 영화가 바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것이다


레이건이 시작한 재앙은 텍사스 출신의 두 대통령(이 소설의 배경은 텍사스다) 죠지 부시 부자에 의해 완성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아버지는 걸프전을 아들은 아프간, 이라크 전쟁을 벌여 전세계에 죽음의 융단을 깐다. 코엔 형제는 2007년에 이 영화를 개봉한다. 그것은 미국 대선이 있기 1년 전이었다. 코엔 형제는 돈에 혹한 루엘린 모스의 선택이(잘 살아 보세에 속은 당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살인마를 데리고 왔는지(텍사스 출신의 두 살인자 죠지 부시 부자)를 보여줌으로써 곧 있을 선택이(대선)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려 한 것이다. 미국은 2008년 11월 4일 오바마를 선택해 회복의 여지를 만든다. 그러나 한국은 당시 이명박을 선택한다.



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의 제목을 보고 의아해 한다. 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만큼 내용과 제목의 연관성이 깊은 소설이 없다고 생각한다.


늙은 보안관 벨(이 소설은 도망자 모스와 추격자 시거 그리고 그 둘을 쫓는 보안관 벨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된다)은 틈날 때 마다 세태를 한탄한다. 이 나라 어딘가에는 노인의 사회보장기금을 가로채기 위해 그들을 납치한 뒤 앞마당에 묻은 젊은이들이 산다. 자기의 관할 구역에선 몇일 사이에 수 많은 사람이 그것도 소를 잡을 때 쓰는 스턴건에 이마가 뚫린채 살해 당한다. 범죄자들은 보안관을 향해 샷건을 쏘고 그들을 목졸라 죽이고 차트렁크에 넣어 불태운다. 곳곳에 마약이 있다. 학생들이 그것을 산다. 뉴스에는 끔찍한 사건 사고가 줄을 잇지만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소식들이다.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뉴스를 흘려넘긴다. 이곳은 분명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노인이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강팍하다는 사실만으로는 제목의 타당성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





이 소설은 모스와 시거의 추격전 사이사이에 그 둘을 쫓는 보안관 벨의 독백이 실린다. 그러나 이 독백은 이야기의 전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숨막히는 추격전의 흐름을 툭툭 끊어버리기까지 한다. 이것은 의도적이다. 작가는 우리가 현명한 노인의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이기 원하지만 벨의 독백은 그저 걱정 많은 노인네의 잔소리처럼 느껴진다. 시간의 세례를 받은 노인은 그 누구보다 삶의 비밀에 더 가깝게 다가간 사람이며 그 누구보다도 사는 법을 잘 아는 사람임에도 세계는 언제나 젊은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 누구도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역사 모든 세계에 걸쳐 나타나는 노인의 아이러니다.


안톤 시거의 살인 행각이 결국 미해결로 정리됐을 때 벨은 보안관을 관두기로 결심한다. 마지막 근무날 그는 군청을 나와 자신의 트럭에 올라 가만히 앉아 있는다. 벨은 자신을 짓누르는 감정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패배였다. 영락 없는 패배였다. 죽음보다 더 비통한 패배(p.336).


그러나 이것은 벨의 착각이다. 그는 시거와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죽음이 싸움을 받아주지 조차 않았기 때문이다.


모스가 죽고 난 직후 벨은 알 수 없는 예감에 사건 현장인 모텔을 다시 찾는다. 그때 먼저 와서 돈가방을 찾은 시거가 주차장에 앉아 벨을 바라본다. 벨은 그곳에 시거가 왔다 갔음을(모스는 시거와 멕시코 범죄 조직, 두 일당에게 쫓기는데 그를 죽이는 건 멕시코 범죄 조직이다. 시거는 나중에 사건현장을 찾아와 숨겨둔 돈가방을 찾아간다) 알아채고 주차장을 유심히 바라본다. 벨은 주차장에 시거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그는 총을 들고 주차장으로 나가 순찰차에 탄 뒤 모텔을 빠져 나온다. 모텔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온 벨은 무전기를 들고 두 대의 순찰차를 부른다. 그들은 모텔 주차장으로 쳐들어가지만 시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벨은 지원을 나온 보안관을 향해 아무래도 우리가 놓친 것 같다고 말한다. 벨은 여기서 첫번째 착각을 한다벨이 시거를 놓친 게 아니다. 


시거가 벨을 놓아준 것이다


노인은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는 핵심에 뛰어들기 원하지만 그것은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죽음은(시거) 그저 가만히 앉아 자기를 기다리기나 하라는 듯 노인을 무시한 채 유유히 사라진다.


노인에게 죽음보다 비통한 것은 패배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무용함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완전히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한 세계. 과감히 죽음과 대항하려하지만 죽음조차 관심을 갖지 않는 존재로 전락한 세계. 그 세계야말로 'No country for old men'이다.





꿈의 해석


이 소설에는 두 개의 꿈 이야기가 나온다. 둘다 보안관 벨의 꿈이다. 첫 번째 꿈은 벨이 아버지가 준 돈을 잃어버린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돈 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으니 돈 같은 건 잊고 그것을 찾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돈에 대한 코맥 매카시의 부정적 태도는 이 소설 전반에 이를 뿐만 아니라 최근작인 <카운슬러>에 까지 이어진다. 코맥 매카시는 이 나라의(미국) 모든 문제가 돈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두 번째 꿈은 조금 복잡하다. 나는 여기에 그 전문을 옮기겠다.


두 번째 꿈에서 우리 둘 다 꽤 옛날로 돌아갔고 내가 밤중에 말을 타고 산 속을 통과하고 있었다. 산 속의 협곡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날이 춥고 땅에 눈이 쌓여 있었고 아버지는 말을 타고 나를 지나쳐서 계속 나아갔다. 아무 말씀이 없었다. 그는 단지 나를 지나쳤을 뿐이고 담요를 뒤집어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가 나를 지나칠 때 나는 아버지가 옛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을 머금은 뿔피리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안에 담긴 불빛으로 뿔피리를 볼 수 있었다. 달빛 색깔과 비슷했다. 꿈에서 나는 아버지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서 그토록 춥고 어두운 세상의 어딘가에서 불을 피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언제든 닿으면 아버지가 거기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p.339).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언제나 정직하고 올바르게 산다. 그들은 눈보라를 뚫고 어둠을 넘어 얼음 위에 불을 피우는 사람들이다. 벨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리고 벨의 전에는 그의 아버지가 그랬다. 벨은 언젠가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 그 불을 다시 뿔피리에 담아야 할 것이다. 그때는 벨의 차례다. 그 불을 가슴에 품고 말을 달리는 것 말이다.


불을 옮기는 자에 대한 의미는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에서 더 명확하다.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아마 위의 해석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해석을 해보려 한다. 


달빛 색깔과 비슷한 그 뿔피리는 죽음이다. 달은 때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를 지나쳐 죽음을 피워 놓고 나를 기다린다. 그곳이 죽음의 세계라면 나는 결국 그곳에 닿을 것이고 그곳에 아버지가 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버지가 불을 피워 놓고 기다렸기에 죽음의 세계는 더이상 어둡고 추운 곳이 아니다. 이 세계가 아무리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도 결국엔 끝이 있다. 끝 이후엔 다행히 그 어떤 소동도 없다. 이 잔인한 세계에선 죽음만이 유일한 안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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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4-02-24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대이후 지금까지 이상하게 소설책은 읽혀지지가 않더군요. 이유는 잘모르겠지만 노력은 했지만 끝까지 읽은책은 아마 더 로드가 유일할 겁니다. 너무 인상적이라 영화로 나온 것까지 봤는데 살아가면서 그 로드의 흔적이 제 삶에 지울수 없는 흔적같은게 있습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느낌 어쩌면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할수 없는 느낌 같은거....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한깨짱 2014-02-24 12:53   좋아요 0 | URL
저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영화로 접했습니다. 그 후 소설을 봤죠. 그리고 코맥 매카시의 전작을 읽었습니다. <더 로드>를 재밌게 보셨다면 코맥 매카시의 전작도 꼭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잘 읽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군자란 2014-02-24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요즘하는 일이 있어 책을 읽지는 못하고 가끔씩 서재를 돌아 보는것이 제가 할수 있는 일일뿐 그냥 땅기는 책있으면 사서 조금씩 쟁여 놓는 일이 제가 하는 유일한 취미이지요.(요즘 과소비가 아닌가 걱정됩니다?) 매카시 전작중 꼭 읽어보았으면 하는 책 3권정도만 말씀하시면 고민해 보겠읍니다. 혹 시간이 나면 읽을수도....

한깨짱 2014-02-25 13:54   좋아요 0 | URL
매카시 자체가 다작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다 국내에는 일부만 번역되어 총 7권 정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더 로드>는 이미 보셨으니 저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만을 추천합니다. <핏빛 자오선>, <모두다 예쁜 말들>, <평원의 도시들>, <국경을 넘어서>는 호불호가 극명할 것 같아 쉽게 추천드리기 어렵구요, 최근작 <카운슬러>는 소설이 아니라 영화 시나리오라 개봉한 영화를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굳이 한 권을 더 꼽자면 <국경을 넘어서>를 추천드립니다.

travelholic 2022-01-02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전에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았는데 제목과 내용의 연관성에 대해 어렴풋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깨짱님 글을 읽으니 좀 더 명확하게 가닥이 잡히네요. 잘 읽었습니다.

한깨짱 2022-01-09 10:02   좋아요 0 | URL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욕도 참 많이 먹은 글이에요 ㅎㅎ
 
유쾌한 하녀 마리사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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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이후의 소설들


천명관의 <고래>를 읽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여기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한결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이야기가 계속 되기를 바랄 뿐이다.



삶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삶의 부조리나 아이러니라는, 뭔가 거창하고 상투적인 말 보다 나는 '우발성'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단편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표현하는 말로 말이다.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어디선가 불쑥 등장하는 삶의 모습에 당황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절망을 겪는다. 이를테면 성묫길을 향하는 대서의 자동차, 그 백미러에선 마누라와 딸대신 이혼의 그림자가 보이(세일링), 연못 속에서 골프공을 줍던 아이는 불현듯 싸늘하게 식어 있는 친구의 죽음과 조우하게 된다(13홀). 그런가하면 하녀의 실수로 외도한 남편을 독살하게 된 여자도 있다(유쾌한 하녀 마리사). 또 다른 하녀는 부지불식간에 주인이 열등감을 느끼는 어떤 천재의 원고를 불쏘시개로 쓰고 만다(프랑스혁명사-제일 웰시의 간절한 부탁). 


감히 말하건대, 삶이란 내가 볼록한 퍼즐 하나를 놓는다고 해서 잇따라 오목한 퍼즐이 놓이는 보드판이 아니다. 삶은 그야말로 무작위다. 삶은 내가 어떤 패를 들었고 어떤 패를 놓을지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패를 내키는대로 늘어 놓을 뿐이다. 인간의 첫번째 슬픔은 이 무작위성을 작위적으로 대비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삶이란 안개낀 바다 한가운데서 부족한 레고 블럭을 들고 서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레고 블럭으로 어떤 배를 만들지 골똘히 계획해 보지만 안타깝게도 나머지 블럭은 모두 삶이 갖고 있다. '어떤' 블럭을 '언제'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지금 내 발 밑에 상어가 나타났거나 해일이 몰려오는 것,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얼마나 그것이 필요한지와는 완전히 무관하다인간의 두번째 슬픔은 모든 사람이 거대하고 안전한 배를 만들길 꿈꾸지만 대개는 위태로운 뗏목조차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사실 이 단편집의 소설들이 이 정도로 우울한 건 아니다. 천명관은 레일을 벗어난 인생의 비극적 최후를 잔인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바로 그 어긋난 순간 짓는 인간의 표정에 집중한다. 그 표정은 대개 웃음이다. 그러나 즐거움에서 나오는 웃음만 있는 건 아니다. 그것은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됐지' 혹은 '살다 살다 이럴 수도 있나'하는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자기도 모르게 터지는 헛웃음을 포함한다. 대개는 이 헛웃음이다. 천명관이 다루는 것들이 말이다.



<고래> 이후의 소설들?


이 단편집을 얘기하면서 <고래> 얘기를 안할 수가 없다. 천명관의 <고래>를 읽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여기에 도착했을 것이며 그들의 마음은 한결 같기 때문이고 그들은 그저 <고래>와 '같은' 이야기가 계속 되기를 바랄 뿐이기 때문이다.


<프랭크와 나>를 제외하고는 여기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고래> 이후에 씌여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것들이 <고래> 이전에 씌여졌어야 할 예행연습으로 보이는걸까? 책의 말미에 씌인 어떤 평은 이것이 <고래>의 미니어쳐라고 하지만 이 말이 <고래>를 밀도 있게 압축했다는 말은 아닐거라고 믿는다. 나는 오히려 난도질 되어 부위별로 늘어놓은 고래를 본다. 이야기들은 모두 고래의 편린을 지녔지만 그 무엇도 완전한 고래가 될 수는 없다. 


<고래>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암세포처럼 번져나가는 이야기의 실타래였다. 침 한 번 삼키지 않고 계속되는 놀라운 입담. 고래의 물줄기처럼 힘차게 터져나오는 기기묘묘한 이야기. 그에 반해 이 단편들은 미처 터지지 못한 폭탄 처럼 보인다. 단편의 한계일 수도 있다. 형식이 문제라는 말이다. 나는, 그러길 빈다. 


사실은 한 마디로 이 리뷰를 끝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게 뭔지 듣고 싶다면 해줄 수 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 소설은 <고래> 보다 훨씬 재미 없다.


어쩌면 이 한 마디로 끝내는 게 더 좋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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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쯔 2014-09-25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읽었는데, 뭔가 좀 아쉬움이 남더군요.
<고래>를 읽어봐야겠어요.

한깨짱 2014-09-26 11:35   좋아요 0 | URL
저 방금 그 책을 사려 했는데! 역시 <고래>만한 소설은 없는가 보군요. <고래>는 천명관의 최초이자 최후의 명작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