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로큰롤
오쿠다 히데오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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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의 책은 처음이다. 이름은 많이 들어 봤는데, 일본 현대 작가들 중에는 거품이 낀 사람들이 많아 선뜻 찾아볼 마음이 들지 않았었다. 그러다 우연히 신간의 출간 광고를 보게 됐고 두 페이지 쯤 미리 보기 해봤다. 그리고 바로 구매.


훌륭하지 못한 소설을 쓰는 작가라도 훌륭한 '에세이'를 쓰는 경우는 자주 있다. 소설과 에세이의 작법 난이도 차이 때문이다. 아무래도 소설은 어렵다. 구성도 있어야 하고 캐릭터도 있어야 하고, 아무튼 겁나 짜증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에세이는 그냥 쓰면 된다. 다소 중구난방 다른 애기가 이어져도 "이 에세이는 참 구성이 엉망이에요"라고 투덜대는 독자는 없다.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에세이는 쾌변 같은 것이다. 소설은 변비고. 그래서 하루키는 장편 하나를 쓰는 동안 그토록 많은 에세이를 쏟아내는 것이다. 안 그러면 똥독이 올라 죽어버리거든. 에세이 조차 한 단어 한 단어 바위에 새기듯 힘겹게 밀어 쓰는 사람은 아마 김훈이 유일할 것이다.


<시골에서 로큰롤>은 오쿠다 히데오를 오늘의 오쿠다 히데오로 만들어준 Rock 음악에 대한 이야기다. 국가를 막론하고 Rock 음악은 청년기에 앓게 되는 병인 것 같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웃사이더들이 청년기에 앓는 병이다.


아웃사이더는 아웃사이더를 알아보고 우리에겐 우리만의 언어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좋다. 엄청 재밌다. 동시에 오쿠다 히데오가 정말 부러웠다. 그는 Rock 음악의 탄생과 중흥기에 청년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일종의 숙주 같은 거다. QUEEN이 전세계적 명성을 얻기도 전에 그들의 라이브 공연을 본 사람이란 말이다. 아웃사이더들은 누구나 알만한 밴드의 누구나 알만한 앨범에 대해 말하기 보다는 그들의 알려지지 않은 명반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고, 그걸 일종의 라이센스로 여기고, 그런 걸 알아보는 자기 자신에 도취하고, 그런 얘기를 관심도 없는 남들에게 해줄 때 자부심과 우쭐함을 느낀다. 그런데도 오쿠다 히데오가 싫지 않은 이유는? 잘난척 쟁이들 특유의 꼰대스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Rock Will Never Die라고 외치지 않으면 Rock 음악이 사라져버릴 것 같은 공포를 떨쳐낼 수 없었던 90년대 중반에 처음으로 그 음악을 접했다. 그 때 Rock은 온갖 양념이 뿌려져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자극적 음식으로 변해버린 시기였으므로 그 맛을 먼저 본 나는 명반이라는 걸 들어도 "이게 뭐?"하며 오히려 촌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래서 오쿠다 히데오가 알려주는 수 많은 앨범을 직접 들으면 당신도 비슷한 감상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월이 흘렀다. 나도 나이를 먹었다.


그러고나니 이제 이 음악들의 맛을 알겠는 거다. 확실히 옛날 음악들은 차분히 앉아 들어야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것들이 대다수다. 그 때는 음악 감상이라는 것이 실제 '취미'로 존재하던 시대였다. 사무실에 앉아, 출퇴근 길에, 음질도 형편없는 MP3와 차마 형언 할 수 조차 없는 엉터리 이어폰으로 듣는 듯 마는 듯 음악을 흘려 듣던 시절이 아닌 것이다.


오쿠다 히데오 덕분에 오랜만에 음악의 참맛을 느꼈다. 사 놓고 잘 쓰지 않던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60년대 말에서 70년대 말까지 이어지는 Rock 음악의 본류를 깊숙히 빨아들였다. 그러고 나니 알겠다. 역시 Rock이 최고다.


세상 모든 게 시시해져도, Rock 만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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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지음, 박규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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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네딕트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건 1944년 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 때 '미 전시정보국'과 '전략조사국'에서는 일본을 이해할 수 있는 뭔가, 그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비록 전쟁이 끝난 1946년 출간되긴 했으나 이는 점령지 일본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탈바꿈 한다.


전시였던 탓에 루스 베네딕트는 '원격 타문화 연구'를 위한 기법을 특화해 일본을 연구한다. 이는 획득 가능한 문헌 자료들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재해석하고 일본 외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인터뷰를 추가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인지 <국화와 칼>을 읽다보면 일본인이 세계 안에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기 보다는 실험실 안에 고립된 타계의 생명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만큼 같은 점도 많이 갖고 있다. 하지만 문화 비교 연구에서 이런 점은 종종 간과되곤 한다.


차이는 회자될 수록 신화화 되는 경향이 있다. <국화와 칼>이 처음 나올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차이를 경험함으로써 비로소 일본을 이해하게 됐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이런 인간도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일본을 '구경'했을 것이다. 타문화간 이질감과 몰이해를 강조하는 건 어쩌면 이해를 목표로 진행되는 문화 비교 연구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책을 읽을 때 더 철저히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역사를 보면 거의 모든 국가는 봉건 사회를 거쳐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발견하는 근대화 과정을 겪게 된다. 계급이 사라지고 단 하나의 인간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 근대화 과정에서 오히려 계층적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메이지 유신 시대 일본의 정치인들이 행한 첫 번째 조치는 천황을 국가의 정점으로 내세우는 것이었다. 봉건 시대 일본의 계층 구조는 백성이 자기 번의 다이묘를 섬기고 이 다이묘들이 쇼군을 섬기는 이중 구조였다. 개화기 정치인들은 쇼군을 제거하고 번을 폐지했다. 이로써 위계 질서는 천황을 중심으로 더욱 단순해졌으며 추가로 영주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 충돌할 갈등도 근본적으로 없애버렸다.


이렇게 일목요연한 위계 질서 아래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이것이 서구 근대 국가와 일본이 다른 결정적 차이였다. 특히 이는 억압적 강제가 없다는 점에서 '권위 주의'와 구분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모두가 자기 자리를 안다, 혹은 분수를 안다는 것은 내재화된 복종이며 자발적으로 발현되므로 체제는 저절로 안정을 획득하고 꼭대기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토대를 마련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 일본의 발전과 전쟁의 밑바탕이 되었다.


독특하게도 일본은 국제 정치에서도 이 같은 생각을 고수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아시아의 여러 국가를 무력으로 점령하며 내세운 기치가 바로 '대동아공영권'이었던 것이다. 가장 우수한 민족이자 국가인 일본 아래 아시아의 모든 국가를 둠으로써 평화(?)를 회복하고 각 국가에 맞는 자리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같은 생각이 뻔뻔한 침략의 미화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실제로 '대동아공영권'을 믿었다. 그들이 자국의 위계질서를 의문없이 내재화한 것처럼 세계도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일본이 아니었다.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일본의 통치자들은 진심으로 의아해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아시아의 국가들을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수도 모르는 뻔뻔한 미개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침략이 종종 계몽의 모습을 띄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일본이 승전국이 아닌 패전국이 됐을 때 아주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일본군은 전세가 완연히 기울어 패배를 눈 앞에 둔 상황에서도 포기를 모르는 전사였다. 그들은 거대한 항공모함의 막강한 화력에 '천황 폐하 만세!'를 세 번 외치고 자폭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으로 맞섰다. 그들의 비행기나 배에는 구명 도구가 없었고 그런 도구의 비치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사무라이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죽음이 당도했을 땐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것이 전사라는 위치에 맞는 올바른 행동이기 때문이다. 설령 의도치 않게 죽음을 피했더라도 그 징표는 남아 끝내 할복이라는 극단적 행동으로 발현된다.


이렇듯 그들은 결코 항복을 모르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 사나운 짐승들의 입에 일제히 제갈을 채운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천황의 항복 선언이었다. 1945년 8월 15일 떨리는 목소리로 마이크 앞에 선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몇몇은 자기 주인을 그 수치스러운 상황에서 구해내지 못했다는 책임을 지고 할복을 감행한다.


우스운 건 바로 여기서 부터다. 자기 주인을 위해 할복까지 감행한 그들이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정복자 미국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미국은 주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제거되야 할 복수의 대상이었을까? 아니었다. 일본인은 자신을 패배시킨 미국을 새로운 위계 질서의 정점으로 받아들였다. 재편된 위계 질서 안에서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대던 개가 얌전한 강아지로 변해 본분을 다하고, 


이로써 체제는 무한한 안정을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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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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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


  아내를 참아내지 못한 남편의 계획 살인이 한 가족을 몰락시키는 과정을 차분하고 집요하게 그려내는 소설. 갈등은 어항 안에 떨어뜨린 잉크 한 방울이다. 다툼이 고조되는 사이 어항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잉크는 힘차게 뻗어나가 정신을 차렸을 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재앙으로 확산된다. 여기엔 자비가 없다. 고작 한 방울에 불과했던 잉크는 어항 전체를 빨갛게 물들여 그 안에 숨쉬는 모든 것을 목졸라 죽일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1922>의 교훈: 결혼을 하지 말자



  빅 드라이버


  한적한 국도에 못 박힌 나무를 뿌려 두고 먹잇감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는 거대한 강간마의 이야기. 사고를 당한 직후에 100미터 정도 온 길을 되짚어 사고 표지판을 놔뒀다면 어땠을까? 커브를 돌면서 충분히 속도를 줄였다면? 방금 무사히 함정을 피해간 저 봉고가 나처럼 사고를 당했다면? 인간은 닥쳐온 재능의 심연 속에서 어쩌면 그것을 피할 수도 있었을 이런 저런 가정을 내려본다. 그것은 과거를 바꿀 수도 없고 오히려 상처만 키울 뿐이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아주 간단한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이 가정의 끝은 대개 이렇게 마무리 된다. 왜 하필 나였을까? 현실이라면 절대 답을 얻지 못할 질문이지만 소설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내가 강간을 당한 게 정말 우연이었을까? 주인공은 시간을 되짚어 올라가 점점 빅드라이버의 진실에 가까워진다. 그리고는 이 강간에 정교하게 펼쳐진 거미줄을 발견한다.


  <빅드라이버>의 명대사: "타이어 가는 건 집어 치우고." 유쾌한 목소리. "그냥 떡이나 치는 게 어때? 응?"(p.251)



  공정한 거래


  한 꺼풀만 벗겨도 인간의 몸엔 뜨거운 피가 아니라 차갑고 냄새나는 오수가 흐른다는 걸 알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시커멓게 털이난 괴물이다. 가장 친한 친구의 행복도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겉으로는 축하를 건네지만 속으론 그 행복이 오래 가지 않기를 간절히 빈다.

  <공정한 거래>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극단으로 밀어 붙인다. 스티븐 킹은 이 책의 닫는 글에서 형편 없는 글이란 "살인자들도 때로는 할머니가 길을 건너도록 도와 준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데서 비롯된다"(p.600)고 말하는데, 바로 그 짓을 이 소설에 해 버린다. 하지만 살인자들도 때로는 할머니가 길을 건너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을 외면하기에 <공정한 거래>는 단순함을 획득하고 그걸로 쾌감의 폭탄을 제조한다. 어린 아이의 전쟁에는 전략도 전술도 필요 없다. 그저 막강한 탱크, 미사일에 맞아도 터지지 않는 괴물 한 대가 전장을 초토화 시킨다. 단순함이 지나치면 바보가 되는데, 사실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정한 거래>의 교훈: 친구를 질투할 거면 만나질 말자



  행복한 결혼 생활


  딜레마다. 나를 끔찍이 사랑하는 남편이 어린 아이의 성기를 이빨로 물어 죽인 괴물이란 걸 발견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경찰에 신고하는 순간 결혼 생활은 끝이다. 뿐만 아니야, 아이들은? 연일 TV가 쏟아내는 변태 살인마의 뉴스를 향해 저게 우리 아빠야 라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을까? 침묵하자니 성기가 잘린 아이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이는 잘린 성기를 찾아 지옥을 헤맬 것이다. 하지만 남편을 지옥으로 보낸다고 이 소년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소년은 지옥에서조차 이 끔찍한 살인마와 함께 하게 되는 거 아닐까? 억지라는 거 안다. 하지만 안다고 마음을 쉽게 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이들과 나, 우리의 삶에서 이 남자의 존재만 똑, 잘라 낼 방법이 없을까? 여자는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의 교훈: 결혼을 왜 하지?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단편은 하찮다, 가치 없다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 남자는 단편을 거의 쓰지 않고 정말 부득이한 경우라도 중편 선에서 타협을 본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 남자가 수다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라는 건 조금만 주의를 놓쳐도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 쉽다. 조금만 주의를 놓쳐도 군더더기가 덕지 덕지 붙는다. 실제 수다에선 그게 매력이지만.

  <별도 없는 한밤에>는 전 세계적으로 3억 부의 책을 팔아 치운 작가의 글이라고 보기엔 당황스러울 정도로 엉터리다. 에필로그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군더더기들이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를 방해하는 건 기본이고 독자를 무시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허술한 전개가 자신 있게 이어진다. 미국은 정말 미지의 나라다. 윌리엄 포크너를 낳은 땅에서 스티븐 킹을 기르니.

  할 수만 있다면 책 앞에 이렇게 적어 전 세계의 소설가 지망생들에게 보내고 싶다.

  "이렇게 써도 3억부를 팔 수 있습니다." 

  그들에겐 엄청난 희망이 될 게 확실하다. 그러고 보면 스티븐 킹이 맞는 말을 하기는 했다. 악덕 속에서도(살인자들도) 미덕은(할머니들이 길을 건너는 걸 도와주는) 발견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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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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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책 날개에 실린 <환상의 책>의 줄거리다.


<환상의 책>은 비행기 사고로 두 아들과 아내를 잃은 대학교수 짐머의 이야기다. 자기 연민과 자살의 충동 속에서 허우적대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무성 영화 시대의 코미디언 헥터 만의 연기를 보고 몇 개월 만에 억제할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린다. 순간 아직도 자기 안에 삶에 대한 욕구가 남아 있음을 깨달은 그는 헥터 만이 출연한 영화 필름들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한다. 헥터 만의 과거와 짐머의 현재가 서로 교차되면서 한 겹 한 겹 그 비밀을 드러내는 헥터 만의 실종에 관한 미스터리와 놀라운 사건의 연속 속에서,


이 소설은 독자들을 현실과 환상, 웃음과 슬픔, 거침과 부드러움이 어우러진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대체로 사실은 이 글은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진위 검증을 요구한다.


첫째로 현실과 환상.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거짓말이다. 짐머도 헥터 만도 그가 나오는 영화도 모두 다 허구다. 이 책엔 현실이 없다. 환상과 환상 속의 환상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앞 부분은 이렇게 고쳐 써야 옳다. 이 소설은 독자들을 환상과 환상 속의 환상,


둘째로 웃음과 슬픔. 조사 '과'를 제외한 두 단어를 읽는 순간 책 날개 글을 작성한 사람이 웃음과 슬픔의 말 뜻이 뭔지 아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웃음은 하하하. 슬픔은 엉엉엉이다. 이 책은 헥터 만의 코미디 무성 영화를 끈질기게 묘사하지만 하하하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 없다. 오로지 짐머의 하하하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건 너무 건조하게 표현되어 있어 독자에게 전해지기도 전에 바짝 말라 바스라진다. 그렇다면 엉엉엉은 어떨까? 이 책은 감정을 꾹꾹 눌러 절제하므로 엉엉엉이라 묘사할 슬픔은 없다. 사건 자체는 비극적이지만 표현은 차분하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슬픈은 엉엉엉을 넘어 가슴 깊숙이 고인 고요한 호수, 그러나 발을 담그는 순간 섬뜩한 차가움에 온 몸이 얼어붙는 슬픔이 될 가능성이 보인다. 고민을 거듭해 보지만 슬픔을 대체할 단어는 생각나지 않는다. 지저분하지만 수식을 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책 날개의 문장은 다시 이렇게 고쳐 써야 옳다. 이 소설은 독자들을 환상과 환상 속의 환상, 주인공 짐머의 웃음과 절제된 슬픔,


셋째로 거침과 부드러움이. 나는 이 대목에서 글쓴이가 <환상의 책>을 읽어 보기는 한 건가 싶은 의문이 들었다. 거침과 부드러움이라니. 도대체 뭐가 거칠었고 뭐가 부드러웠단 말인가. 나는 이 단어를 아예 삭제할 생각도 해봤지만 그렇게 하면 문장에 리듬이 사라지므로 뭔가 다른 단어로 대체하는 게 옳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면 뭐가 좋을까? 글쓴이가 책 날개 앞 쪽에 쓴 <우연의 미학>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우연은 필연적으로 '필연'과 붙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연과 필연이다. 주인공 짐머가 어느 날 TV를 켰는데 하필 거기에 헥터 만의 무성 영화 클립이 등장하고 또 그걸 보고 웃게되는 건 확실히 우연이다. 그런데 그 우연한 발견 때문에 뒤에 벌어지는 일들, 그러니까 짐머가 헥터 만에 대한 책을 출간하고 그걸 죽은 줄로만 알았던 헥터 만이 발견하고 그가 사람을 보내 짐머를 부르고 그들이 마침내 만나게 되는 건 필연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폴 오스터는 <환상의 책>의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는 짐머를 자신이 꾸며 놓은 줄거리로 인도하기 위해 그에게 우연히 헥터 만을 발견하는 상황을 부여한다. 잠깐만, 그런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짐머가 정말로 '우연히' 헥터 만을 발견한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 또한 폴 오스터의 의도, 즉 필연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아! 짐머는 그 날 버스터 키튼도 찰리 채플린도 그루초 마르크스도 아닌 헥터 만을 발견한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폴 오스터 이 음흉한 거짓말 쟁이! 그러므로 책 날개의 문장은 다시 이렇게 고쳐써야 한다. 이 소설은 독자들을 환상과 환상 속의 환상, 주인공 짐머의 웃음과 절제된 슬픔,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 필연이


넷째로 어우러진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문제는 빠져들게. 엄청난 판매 부수를 보면 좀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솔직히 책을 샀다고 해서 모두 그의 책에 빠져들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 나를 봐도 그렇지 않은가. 폴 오스터의 책은 뭔가 보일듯 말듯 묘한 분위기에 끌려 손에 들지만 막상 책장을 열면 기가막힐 정도로 지루하다. <뉴욕 3부작>, <거대한 괴물> 그리고 이 책까지 나는 세 권을 경험했지만 모두 똑같다. 지루하다. 특히 <환상의 책>이 으뜸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전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소설이란 전부 남의 얘기, 모르는 사람의 얘기다. 하지만 읽는 동안 감정 이입이라는 고리에 엮여 우리는 소설 속으로 '빠져든다.' <환상의 책>은 의도적으로 그 고리를 잘라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집중이 안 된다. 나는 이 경험을 토대로 폴 오스터의 책을 읽는 방법을 깨달았다. 이 사람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 차례 읽어 나갈 필요가 없다. 그냥 아무데나 편다. 그리고 아무 문장이나 읽는다. 별로라면 다음 페이지로. 그렇게 읽다보면 어느 순간 혹하게 만드는 뭔가가 꿈틀 거리는 걸 발견한다. 그 때 부턴 차분히 그 흔적을 따라 가야 한다. 물론 그 흔적은 문장을 읽는 새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또 다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 아무 문장이나 읽기 시작하면 된다.


이상을 종합해 봤을 때 책 날개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고쳐써야 옳다. 


이 소설은 독자들을 환상과 환상 속의 환상, 주인공 짐머의 웃음과 절제된 슬픔,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 필연이 어우러진 세계를 그려낸다.


바이바이 폴 오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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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못 쓰는 남자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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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라는 이름엔 뭔가 특별한 힘이 깃든 것 같다.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힘. 금가루를 뿌리며 날아다니는 단어의 요정들을 잡아 정교하고 환상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힘.


아마도 보르헤스적이라는 말이 베르나르 키리니를 설명하는 가장 쉬운 말일 것이다. 하나이자 모든 것인 궁극의 실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책속의 책,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 갑자기 끝나는 결말, 파렴치한 사기지만 동시에 눈이 부실정도로 매혹적인 거짓말, 아주 유치하게 말하면 무한한 상상력. 이것들이 바로 보르헤스와 베르나르 키리니를 연결하는 스타일이다.


또 한 가지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분량이다. 우리 나라에 소개된 키리니의 작품은 총 두 권으로 보이며 전부 단편집이다. 아시다시피 보르헤스는 평생 단편만을 썼다. 세계를 알렙이라는 작은 유리 구슬에 넣었던 사람이라 긴 글은 좋아하지 않는다. 압축된 상상력이 대기를 뚫고 세상에 내려오는 순간 찰나의 섬광을 그리며 사라진다. 사라졌기에 오히려 강렬히 남는 여운과 떨림. 이것이 바로 두 사람의 이야기가 가진 매력이다.


차이가 있다면 베르나르 키리니 쪽이 덜 난해하다. 표범의 얼룩에서 신의 메시지를 읽으려 한 보르헤스다. 때때로 그는 고행자나 수도승이 되어 기꺼이 고립과 감금을 받아들이지만 키리니는 빳빳히 다려진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사람들로 빽빽한 도시의 거리를 걷는다. 1899년에 태어난 보르헤스가 오히려 미래적이라면 베르나르 키리니는 현대적이다.


이 소설집의 가장 위대한 점은 이야기들에서 삼류 잡지의 믿거나 말거나 코너처럼 싸구려 흥미가 느껴지는 동시에 아주 거대한 철학, 얼핏 비논리로 보이나 사실은 딱딱하게 굳은 관념을 깨부수는 반전의 논리가 숨어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신의 뇌는 삐걱거리면 회전할 것이다. 딛고 있던 땅이 뜩! 사라지는 것처럼 갑작스레 끝나는 이야기에 추락한 뇌가 고통을 받고 움직임을 멈출 수도 있다. 하지만 최후의 한 장을 넘기고 나면 의식의 깊숙한 곳, 수 십 년 간 활동을 하지 않았던 생각의 논리들이 저마다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것이다. 굳었던 근육이 말랑말랑 풀리는 것만큼 상쾌한 일은 없다.


설명하려는 것이 너무 추상적이라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경우, 끈질기게 그것을 정의하려기 보다는 그 대상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만들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인 설명이 될 때가 있다. 나는 <첫 문장 못 쓰는 남자>를 읽고 아래의 이야기들을 구상해 냈다.



거대한 탑


늙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죽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세계의 중심에 우뚝 솟은 탑을 오른다. 탑의 높이는 가늠할 수 조차 없다. 어느 날 한 소년이 탑에서 떨어진다. 소년은 공포에 눈물을 흘리지만 곧 그친다. 하루를 꼬박 떨어졌는데도 지상에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소년은 탑에서 수시로 떨어져 내리는 빵과 잼과 고기와 밥을 먹으며 살아간다. 어느덧 소년은 남자가 되고 고개를 돌렸을 때 자신과 마찬가지로 추락 중인 한 여자를 만난다. 남자는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두 사람은 그렇게 평생을 추락하며 산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자신에게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을 느낀다. 그는 여자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을 본다. 여자도 남자의 몸에 깃든 늙음을 본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눈을 감는다. 그러자 추락이 멈추고 두 사람은 영원으로 돌아간다.



복수


젊은 시절을 온통 문학에 바친 남자가 있다. 남자는 노력했으나 문학은 결국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는 문학에 청춘을 바친 대가로 늙음을 얻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던 남자는 거지가 되어 십 년을 방황한다. 겨울비가 내리는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쓰레기 통에서 공책과 연필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백 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글을 쓴다. 글이 완성됐을 때 남자는 이것이 문학의 세계를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할 대작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 순간 남자는 공책을 쓰레기 통에 쳐박고 다시 거지로 돌아간다.



거래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연애에서도 실패를 거듭하던 남자가 어느 날 우연히 악마를 만난다. 남자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성공을 사려 한다. 그러자 악마는 남자의 영혼이 너무 순수해 가치가 없으니 나쁜 짓을 해서 더럽혀 오라고 요청한다. 그 날 이후 남자는 친구를 배신하고 직장 동료의 아이디어를 훔치고 상사를 음해한다. 남자는 승진을 거듭하고 돈다발을 손에 쥔다. 예쁜 여자와 결혼한다. 등을 돌렸던 친구들이 남자의 영향력을 보고 돌아온다. 그러자 남자는 더 이상 악마를 만나 영혼을 팔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한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텐가? 이야기는 작가에서 독자로, 그리고 다시 작가에게 돌아간다. 그리고는 다시 독자에게, 다시 작가에게 돌아간다.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이야기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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