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 못 쓰는 남자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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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라는 이름엔 뭔가 특별한 힘이 깃든 것 같다.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힘. 금가루를 뿌리며 날아다니는 단어의 요정들을 잡아 정교하고 환상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힘.


아마도 보르헤스적이라는 말이 베르나르 키리니를 설명하는 가장 쉬운 말일 것이다. 하나이자 모든 것인 궁극의 실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책속의 책,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 갑자기 끝나는 결말, 파렴치한 사기지만 동시에 눈이 부실정도로 매혹적인 거짓말, 아주 유치하게 말하면 무한한 상상력. 이것들이 바로 보르헤스와 베르나르 키리니를 연결하는 스타일이다.


또 한 가지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분량이다. 우리 나라에 소개된 키리니의 작품은 총 두 권으로 보이며 전부 단편집이다. 아시다시피 보르헤스는 평생 단편만을 썼다. 세계를 알렙이라는 작은 유리 구슬에 넣었던 사람이라 긴 글은 좋아하지 않는다. 압축된 상상력이 대기를 뚫고 세상에 내려오는 순간 찰나의 섬광을 그리며 사라진다. 사라졌기에 오히려 강렬히 남는 여운과 떨림. 이것이 바로 두 사람의 이야기가 가진 매력이다.


차이가 있다면 베르나르 키리니 쪽이 덜 난해하다. 표범의 얼룩에서 신의 메시지를 읽으려 한 보르헤스다. 때때로 그는 고행자나 수도승이 되어 기꺼이 고립과 감금을 받아들이지만 키리니는 빳빳히 다려진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사람들로 빽빽한 도시의 거리를 걷는다. 1899년에 태어난 보르헤스가 오히려 미래적이라면 베르나르 키리니는 현대적이다.


이 소설집의 가장 위대한 점은 이야기들에서 삼류 잡지의 믿거나 말거나 코너처럼 싸구려 흥미가 느껴지는 동시에 아주 거대한 철학, 얼핏 비논리로 보이나 사실은 딱딱하게 굳은 관념을 깨부수는 반전의 논리가 숨어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신의 뇌는 삐걱거리면 회전할 것이다. 딛고 있던 땅이 뜩! 사라지는 것처럼 갑작스레 끝나는 이야기에 추락한 뇌가 고통을 받고 움직임을 멈출 수도 있다. 하지만 최후의 한 장을 넘기고 나면 의식의 깊숙한 곳, 수 십 년 간 활동을 하지 않았던 생각의 논리들이 저마다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것이다. 굳었던 근육이 말랑말랑 풀리는 것만큼 상쾌한 일은 없다.


설명하려는 것이 너무 추상적이라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경우, 끈질기게 그것을 정의하려기 보다는 그 대상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만들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인 설명이 될 때가 있다. 나는 <첫 문장 못 쓰는 남자>를 읽고 아래의 이야기들을 구상해 냈다.



거대한 탑


늙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죽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세계의 중심에 우뚝 솟은 탑을 오른다. 탑의 높이는 가늠할 수 조차 없다. 어느 날 한 소년이 탑에서 떨어진다. 소년은 공포에 눈물을 흘리지만 곧 그친다. 하루를 꼬박 떨어졌는데도 지상에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소년은 탑에서 수시로 떨어져 내리는 빵과 잼과 고기와 밥을 먹으며 살아간다. 어느덧 소년은 남자가 되고 고개를 돌렸을 때 자신과 마찬가지로 추락 중인 한 여자를 만난다. 남자는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두 사람은 그렇게 평생을 추락하며 산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자신에게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을 느낀다. 그는 여자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을 본다. 여자도 남자의 몸에 깃든 늙음을 본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눈을 감는다. 그러자 추락이 멈추고 두 사람은 영원으로 돌아간다.



복수


젊은 시절을 온통 문학에 바친 남자가 있다. 남자는 노력했으나 문학은 결국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는 문학에 청춘을 바친 대가로 늙음을 얻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던 남자는 거지가 되어 십 년을 방황한다. 겨울비가 내리는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쓰레기 통에서 공책과 연필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백 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글을 쓴다. 글이 완성됐을 때 남자는 이것이 문학의 세계를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할 대작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 순간 남자는 공책을 쓰레기 통에 쳐박고 다시 거지로 돌아간다.



거래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연애에서도 실패를 거듭하던 남자가 어느 날 우연히 악마를 만난다. 남자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성공을 사려 한다. 그러자 악마는 남자의 영혼이 너무 순수해 가치가 없으니 나쁜 짓을 해서 더럽혀 오라고 요청한다. 그 날 이후 남자는 친구를 배신하고 직장 동료의 아이디어를 훔치고 상사를 음해한다. 남자는 승진을 거듭하고 돈다발을 손에 쥔다. 예쁜 여자와 결혼한다. 등을 돌렸던 친구들이 남자의 영향력을 보고 돌아온다. 그러자 남자는 더 이상 악마를 만나 영혼을 팔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한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텐가? 이야기는 작가에서 독자로, 그리고 다시 작가에게 돌아간다. 그리고는 다시 독자에게, 다시 작가에게 돌아간다.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이야기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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