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 미처 알지 못했던 재미있는 기독교 이야기
유재덕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012년 전, 모래와 먼지를 뒤집어 쓴 중동의 작은 지방 나사렛, 그곳에서 태어난 한 남자가 오늘날까지 죽지않고 찬란하게 살아남아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일부에서는 그 남자가 달변이었다고 말한다. 항간으로는 그 남자의 외모가 대중을 완전히 매료시킬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믿는 사람들 중에는 그 남자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장님을 눈 뜨게 했으며 미친자로부터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보기에 그 남자가 성공한 이유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주고 일곱 번 씩 일흔 번을 용서해 주는 것. 이게 바로 그 남자의 성공 전략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네 이웃을 내 몸의 반에 반만 사랑했어도' 세상이 이렇게 엉망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특히 타 종교를 증오하고 억압하는데 그들은 탁월한 능력을 보여줘왔다. 그리고 그 분노와 증오를 종교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대대로 전해오는 것을 그들의 존속 전략으로 삼아왔다.





종교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또 선행되야 하는건 교리가 아니라 바로 역사다. 이런건 유치 1, 2부 때부터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우리 나라 교회치고 역사에 기반한 기독교를 가르치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명심해야 할 것은 종교가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에 뿌리를 내린 역사적 실체다. 이걸 무시하면 종교는 현실과 유리되어 저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가 버린다. 인간과 구체적 세계가 사라진 종교? 그런걸 도대체 어디다 써먹는단 말인가!


우리 나라 종교인들 중에는 가톨릭과 기독교를 이른바 성당과 교회로 나눠(언제 한번 이 단어의 유래를 찾아보고 싶다) 마치 독립된 별개의 종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눈 앞이 캄캄해지고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일부 광신적인 기독교인들은 게거품을 물고 난리를 칠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가톨릭은 기독교의 형님뻘 되는 종교다. 가톨릭이야 말로 나사렛 예수를 계승한 최초의 종교라는 말이다. 

예수가 활동할 당시에는 당연히 가톨릭 따위는 없었다. 예수와 열두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은 전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겼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는데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가 바로 본디오 빌라도가 이스라엘에 파견된 총독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핍박을 받았던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예수의 언행이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그는 '안식일에 성전을 찾는 것보다 네 이웃과 화해를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거나 성전 앞에서 비둘기를 파는 상인의 좌판을 걷어 차며 '꺼지라'고 할 정도로 대담했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혁명적 인물은 기득권의 눈 밖에 나기 마련이 아닌가? 당시 유대인 대제사장이었단 안나스와 가야바는 점차 넓은 지지를 확보해 가던 예수를 군중 선동, 정치 혼란의 주범으로 고발하여 결국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하고 만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예배를 보던 지하 묘지. 카타콤



예수 사후 와해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은,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사역을 이어갔다. '사도'로 일컬어 지는 열 두 제자들이(특히 바울은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독립 종교로서의 지위를 다지게 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라기 보다는 '바울'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주변국을 여행하며 선교에 힘썼고 당시 사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수 많은 피지배층들이 사회적 소수자를 옹호하는 기독교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흐르자 기독교는 점차 로마의 지배층으로까지 침투했다. 세속적인것을 거부하고 경건한 생활에 힘쓰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 기독교인의 삶은 속세에 찌든 로마의 도시인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었다. 그리고 서기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마침내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승인한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를 자칭한 뒤 벌인 첫 일은 교리의 통합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랜 핍박 끝에 자유를 맞이하게 되었으나 그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에 심각한 교리 다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교회의 분열을 우려했던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7월 4일, 3백 명의 감독과(Bisop) 2천 명의 장로들(presbyter) 및 집사들(deacon)을 당시 황궁이 있던 니케아에 소집해 교리 통일을 시도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니케아 공회'다. 


니케아 공회가 채택한 교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뽑으라면 역시 삼위일체론일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 하나라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비록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났으나 그 본성은 '신'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오늘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 같은 교리를 공의회까지 열어 결정할 정도면 초창기 기독교는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놓고 상당히 분분한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대립은 결국 반 삼위일체론의 대표격이라고 볼 수 있는 아리우스가 추방되면서 일단락 된다. 하지만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종파는 현재까지도 당당히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선 완전히 사이비 종교로 오해받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그 대표 종파다. (여호와의 증인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으며 대한민국에만 10만명의 성도가 살고 있다)





니케아 공의회가 시사하는 바는,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교리, 즉 이단을 구분해 내고 그들을 잔인하게 심판하는 절대적 교리라는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도와 말씀을(성경)을 임의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합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리의 채택은 당연히 정치적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교리는 줄곧 교회 권력을 놓고 벌이는 정치적 암투의 희생양이 되어 왔으며 특히 정적을 제거할 구실로는 그만한 방법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상당히 퇴색하고 말았다. 


교리 선택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다수의 추종자들의 합의하여 결정하는 구조를 채택하는 한 교리 해석의 난립과 이를 통한 종교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실제로도 그리스도교는 수 차례의 교리 논쟁으로 많은 분파를 만들어 냈으며 그 때마다 서로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진흙탕 싸움을 계속해 교회의 분열을 가속화 시켰다. 이 과정에서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이 안에서도 또다시 교리 논쟁이 벌어져 이집트, 에티오피아의 콥트교회와 시리아의 야고보교회를 탄생시켰다. 


과연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진짜 말씀인가를 따지는 일은 강물과 바다물을 앞에 두고 무엇이 진짜 물인가를 가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오늘날의 교리에 따르면 두 번 따져볼 가치도 없이 터무니 없는 주장이겠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천상으로부터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인가? 아니면 교회를 지배하고 그 권력을 향유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목소리인가? 내가 '신은 믿을 수 있지만 교회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후 그리스도교의 상황을 얘기하면 한 마디로 분열이다. 분열이 심했다는건 그만큼 기독교가 '장사가 됐다'는 말이다. 기독교는 더 이상 개인의 구원, 정의로운 삶 어쩌구 하는 가치를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삶을 추구하는건 언제나 힘 없고 무지한 평신도들 뿐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종교는 직업이다. 밥벌이라는 뜻이다. 밥 그릇 주위에는 언제나 악취와 오물이 넘쳐나는 법이다.


7세기에는 이슬람이 탄생했다. 마호메트도 하나님을 믿었지만 마호메트의 하나님은 이슬람교도들에게 자신이 직접 창조한 자식들을 무참히 살해하라고 사주했다. 아이러니한건 기독교인들도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사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하나님의 동일한 계시를 받고 서로를 무참히 살해했다. 이런 이중인격적인 하나님의 계시에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섭리가 존재하는 걸까?


사람들이 기독교(가톨릭)의 부패와 멍청함과 부정의에 언제까지 참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영국 왕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든 최초의 유럽 왕이었다. 그는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인정하고 종교 개혁을 실시했다(16세기). 물론 그에게 정의로운 동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자신의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파문 시킨 로마 가톨릭이 꼴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틴 루터와 칼뱅이 등장한다. 이들은 가톨릭에서 분리된 새로운 교회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 교회고, 한국에서는 이를 개신교 또는 '교회'라 지칭하며 가톨릭의 '성당'과 구분한다. 


유대교에서 시작한 '야훼의 종교'는 가톨릭, 콥트교, 그리스 정교, 이슬람교, 영국 성공회, 프로테스탄트 교회 등 수 많은 종교를 파생시켰고 프로테스탄트교는 장로교(칼빈파), 감리교, 침례교, 퀘이커교, 루터교, 제7의 안식일교(삼육 재단) 등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종파를 만들어 냈다. *이들은 똑같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었지만 탄생 당시에는 거의 예외없이 서로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댔다. 





이 책은 오랜 기독교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지만, 2천년이란 그렇게 만만한 시간이 아니다. 애초에 한 권의 책으로 담는다는 생각 자체가 넌센스다. 숨가쁜 질주에 내용은 다소 산만하고 일부는 빈약해 보인다. 하지만 기독교의 역사를 한 눈에 훑어 보기에는 이것만큼 좋은 책도 없어 보인다. 시간과 지면이 허락했다면, 저자도 분명 더 나은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언젠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처럼 '기독교인 이야기'를 내 손으로 직접 써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분명 흥미진진한 작업이 되겠지만, 죽기 전에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유대교, 가톨릭 보다는 개신교의 분열이 훨씬 심각한 이유는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근본 정신이 저항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부패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단호한 태도.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저항 정신이 오히려 프로테스탄티즘의 분열을 가속화 시켰으니, 역시 세상은 아이러니의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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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2-08-27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우매함을 가장 극적으로 나타내주는 표지가 저는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우매한 존재들이지요. 그러면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존재들,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확신 과 자신감에 오만한 존재들...그 태생적인 한계를 깨닫지 못한 이상 그들이 내린 결론은 결국 모래성일 뿐...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도 그런 존재고요....

한깨짱 2012-08-29 13: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인간의 우매함을 나타내는 지표이자 인간의 불안, 그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도 때때로 종교에 귀의하여 평온한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갖기도 해요.

군자란 2012-08-29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그걸 몰랐을때가 행복했던것 같아요. 신앙의 그 충만함을 어디에서 채울 수 있을까요? 지금도 무척 그립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못본체 할 수는 없고...그냥 그저...웃지요...

한깨짱 2012-08-30 11:55   좋아요 0 | URL
역시 앎은 악마의 재산인 것 같아요.

군자란 2012-08-30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앎은 악마의 재산이라....새겨 듣겠습니다...

한깨짱 2012-08-31 11:25   좋아요 0 | URL
너무 진지하게 새겨들으실 필요는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