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빈곤 - 개정판
헨리 죠지 지음, 김윤상 옮김 / 비봉출판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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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조지가 <진보와 빈곤>을 쓸 당시의 세상은 부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제임스 와트와 토마스 에디슨. 증기 또는 전기와 결합한 기계의 도입은 노동의 효율성을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사람들의 마음이 웅장 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태풍 같은 생산력 앞에 빈곤은 곧 꺼져버릴 등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기대가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있다. AI를 필두로 생산성의 한계가 사실상 사라질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에도 오히려 빈곤은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진보와 빈곤>의 탁월한 점은 낮은 임금에 대한 문제를 자본과 노동의 대결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임금이 "자본이 아니라 노동의 직접 생산물에서 나온다"(p.169)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사장님의 지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면 우리의 월급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우리가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해 삽 한 자루를 만들었다고 하자. 그리고 사장님이 당신에게 오천 원의 임금을 지급했다. 이때 사장님은 우리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돈을 준 것인가? 아니다. 우리가 만든 삽 한 자루를 오천 원에 사간 것이다!


스타트업에 투자되는 막대한 자본은 언뜻 이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초기 기업이라고 해서 생산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상품화되지 못한 소스코드, 건조 중인 배, 자라고 있는 수박 기타 등등. 월급은 완성품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량의 구매 대금으로 볼 수 있다. 이제 막 꾸려진 회사, 말 그대로 직원과 아이디어밖에 없는 회사라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투입되는 엔젤 머니는 이 팀과 아이디어를 구매한 대가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돈을 가진 사장님이 하해와 같은 아량을 가져 실패할지도 모를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는 게(선금 지급)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사장님은 우리의 '직접 생산물'을 싼 값에 가져가려는 유혹을 버리기가 힘들다. 이는 단순히 사장님이 탐욕을 부려서가 아니다. 사장님의 주장은 매입과 매출의 차이를 정교하게 계산한 값에 근거한다. <진보와 빈곤>은 바로 이 순간 우리가 진짜 눈여겨봐야 할 공동의 적이 누구인지를 가리킨다.


"생산력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최저액에 머무는 이유는, 생산력 향상과 더불어 지대가 더 큰 비율로 상승함으로써 임금이 낮게 유지되기 때문이다."(p.291)


문제는 땅이다.


"토지를 공동소유로 해야 한다."(p.335)


토지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누가 나서서 그 땅을 개발하겠는가? 하지만 이는 토지와 토지를 이용해 만들어낸 생산물을 구분하지 않는 관습이 초래한 착각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 땅은 모두가 갖되 그 위에 지어진 건물은 개인이 가지라는 말이다. 건물주는 멋진 빌딩을 지어 월세를 받고 정부에 토지 사용의 대가를 지불한다. 헨리 조지는 토지에 대한 막대한 조세 수입으로 정부가 다른 직간접세를 폐지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건 우리의 소득이 더더욱 늘어난다는 말이고, 늘어난 소득이 소비로 이어져 경제는 뜨겁게 타오를 것이다.


물론 여러 반박과 이견이 있을 것이다. 공시지가를 올리는 것만으로 정권이 바뀔 수도 있는 '민주 사회'의 특성에 비추어 볼 때 지난 수백 년간 이어져온 기득권의 소유권을 단박에 무효화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싶다. 토지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룬 나라들도 대부분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대혁명이나 주권 독립 같은 천지개벽을 틈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설령 토지 공유화에 성공하더라도 그 토지를 관리할 행정력이 충분한가도 의문이다. 건물주가 실제로 얼마의 월세 수입을 올리는지, 그들이 세입자들과 이면 계약을 하는 건 아닌지, 정말로 객관적인 토지 가치의 평가가 가능은 한 건지 기타 등등. 저자는 다른 직간접세를 제거하고 오로지 이 분야에만 행정력을 집중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대한민국처럼 조그만 땅에서조차 꾼들이 저지르는 부동산 투기를 근절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이를 AI가 해결할 수 있을까? 제발 그렇게 되기를)


하지만 토지 재산권에 근거가 없다는 주장만큼은 크게 공감이 된다. 지구는 우리의 것이다. 그 누구도 자연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다. 이는 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지금 대한민국에 땅을 가진 사람들은 과연 누구에게 그 권리를 이양받은 걸까? 조선으로부터 국토를 물려받는 대한민국인가? 그렇다면 조선은 누구에게 땅을 이어받았는가? 태조는 공양왕(고려의 마지막 왕)과 양도 계약을 맺고 한반도를 차지한 것인가? 태조가 고려의 땅을 무력으로 빼앗아 조선을 세웠다면 지금 우리가 무력으로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을 때 그 권리를 인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어디 있는가? 끝까지 따지고 들면 우리는 명백한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것이다.


<진보와 빈곤>은 내용이 어려운 데다 번역도 친절한 편이 아니고 무려 57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라 쉽게 펼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주장이 세상 어떤 사상가와도 결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 헨리 조지는 19세기 사람이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삶이 그때와 별반 다를 거 없다는 거, 아니 오히려 더 악화됐다는 건 우리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주장은 동일 국가 내에선 별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더라도 국가 대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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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07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지의 공유개념은 오래된 개념인데 이렇게 보니 또 새롭네요. 실현여부는 의문이 많이 들지만.... 하지만 실현과 상관없이 이런 생각을 점점 퍼뜨러가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깨짱 2021-03-09 13:4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모든 혁명은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니까요. 맘 먹고 하면 또 못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모두가 한 마음만 먹는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