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이 극으로 치닫던 1960년대 초 미국 정부는 라오스를 인도차이나의 반공 방파제로 삼겠다며 극비리에 CIA를 투입했다. CIA는 ‘라오스 공산당 빠텟라오Pathet Lao 견제‘, ‘라오스 내 호치민루트파괴‘, ‘중국의 북베트남 지원 차단‘을 목표로 비밀 정보부대 둘을 꾸렸다. 하나는 마쥔궈 장군이 이끄는 국민당 잔당 제1독립부대였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군이 인도차이나에서 써먹었던 ‘특수대대111Bataillon Spéciale 111‘을 베껴 몸통을 숨긴 엘리트 정보부대였다.
특히, CIA는 리텅장군을 앞세워 윈난 출신 국민당 잔당과 한국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중국 인민해방군 21,300명 가운데 본토귀환을 마다하고 타이완을 택한 14.715명 속에서 1,000명을 뽑아 특수대대111을 창설했다. CIA는 그렇게 반파땅을 발판 삼아 조직한 정보부대 요원들을 자신들의 비밀군사기지인 라오스의 남유NamYo로 파견해 중국 본토까지 반경에 넣고 첩보전을 벌였다. 그렇게해서 한국전쟁 유산은 소리도 없이 3,200km나 떨어진 인도차이나현대사로 파고들었다. - P141

애초 중국과 선을 달고 1942년 제1차 전국인민대회에서 반일투쟁을 선포한 타이공산당은 이민 화교가 줏대였고 베트남 난민이 그 뒤를 받쳤다. 예컨대 무장투쟁이 한창 달아오르던 1968년 지도부를 보면 서기장 짜로언 완응암Charoen Wanngarm과 부서기장 위랏앙까타온Wirat Angkathavorm은 말할 것도 없고, 송 노빠쿤Song Nopakhun,
우돔 시수완Udom Srisuwan, 담리 루앙수탐Damri Ruangsutham을 비롯해 정치국원 일곱 가운데 넷이 화교였다.
베트남계는 1928년 호치민이 동남아시아 코민테른 대표로 타이를 방문한데 이어, 1931~1933년 사이 프랑스 식민당국에 쫓긴 베트남공산당(VCP)이 본부를 타이 동북부로 옮겨오면서 인연을 맺었다. 1965년 타이공산당 무장투쟁에 불을 붙였고 마지막 서기장을 했던 통 짬시Thong Jamsri 같은 이가 베트남계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러니 타이공산당은 처음부터 화교와 베트남계 사이에 노선 갈등이 불거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 바탕에는 중국과 베트남의 전통적인 적대감에다, 두 거대 공산당이 아시아 맹주 자리를 놓고 벌인 힘겨루기가 깔려 있었고. - P161

애초 산악 소수민족을 탐탁잖게 여긴 타이 정부는 공산당이 무장투쟁을 벌이기 훨씬 전인 1955년부터 이미 국경초계경찰(BPP)을 동원해 몽족을 짓밟아댔다. 그즈음 타이 정부는 몽족을 ‘산림 파괴자‘, ‘아편 생산자‘, ‘사회통합 걸림돌‘, ‘안보 장애물‘ 같은 온갖 편견으로 다뤘다. 사실은 산림 파괴나 마약 생산 주범이 오히려 자본과 권력을 낀 도시 사람들이었음에도. 하기야, 뭐 오늘이라고 달라진 것도 없지만,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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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잔당 지도자 리미 장군은 CIA 지원을 받아 샨주Shan State 몽양Mong Yang에서 윈난반공구국군을 창설한 뒤, 지역 소수민족까지 끌어들여 1만 병력으로 몸집을 불렀다.
6월 들어 위기감을 느낀 버마 총리 우누UN가 국민당 잔당 토별 명령을 내렸다. 버마 정부군 공세에 밀린 리미 장군은 두어 달 뒤 타이와 국경을 맞댄 Mong Sar으로 본부를 옮겼다.
그즈음부터 국민당 잔당은 라후Lahu를 비롯한 지역 소수민족을 올러메 아편 생산을 폭발적으로 늘려나갔다. 1950년 전까지 연간30톤이었던 버마 국경의 아편 생산량이 1950년대 중반 300~600톤으로 불어났다. 잔당 지도부는 그 아편으로 군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개인적인 부를 쌓아나갔다. 훗날 ‘큰 아편‘으로 불리게 될 탐응읍마을 시조 리원환의 뿌리였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CIA의 역할이다. CIA는 전비 지원대신 자신들이 비밀스레 운영해온 에어아메리카 항공편으로 국민당잔당이 생산한 아편을 몽삿에서 타이 북부 치앙마이를 거쳐 방콕까지 실어다주었다. 그 아편은 CIA 끄나풀로 타이 정치판을 주물렀던 경찰 총수 파오 시야논Phao Sriyanond 비호 아래 아무 탈 없이 홍콩,
미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로 퍼져나갔다.
현대 정치사에서 온갖 음모를 꾸미며 라오스, 멕시코, 온두라스, 니카라과, 파나마로 이어진 CIA의 ‘마약팔이‘ 버릇이 바로 여기 버마-타이 국경에서 비롯되었다. 이 CIA란 놈은 1947년에 태어났으니 기껏 세 살에 마약부터 손댄 셈이다. - P48

그렇게 마약을 앞세운 국민당 잔당이 인도차이나 지역 안보에 말썽을 일으키자 국제사회가 들썩였다. 1953년, 버마 총리 우는1951년에 이어 다시 유엔에서 미국의 국민당 잔당 비밀 지원을 거세게 나무랐다. 결국, 버마와 중국의 밀월관계를 걱정한 미국 대통령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국민당 잔당 철수 결정을 내렸다.
유엔은 미국과 타이완 비난 결의안을 통과시킨 뒤 버마, 타이완,
미국, 타이로 ‘4개국 군사위원회‘를 꾸려 국민당 잔당 송환을 맡겼다. 그에 따라 1953~1954년 국민당 잔당 5,770명과 그 관련자 880명이 타이완으로 철수했다. 1954년 5월 30일, 리미 장군은 타이완으로 떠나면서 윈난반공구국군 해체를 선언했다. 이게 제1차 송환이었다. - P49

그러나 국민당 잔당 가운데 송환을 거부한 이들은 버마 국경에서 류위안린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내세워 제1군(사령관 뤼런하오), 제2군(사령관 푸징윈), 제3군(사령관 리원환), 제4군(사령관 장웨이청), 제5군(사령관 돤시원)으로 조직을 재편했다.
한동안 숨죽였던 국민당 잔당은 제1차 송환자 가운데 비밀스레 되돌아온 600여 명에다 1958년 중국의 대약진운동을 피해 온 이들을 받아들여 다시 덩치를 키워나갔다.
그러던 1961년 초, 버마 정부군이 국경을 불법으로 드나들던 타이완 정부 소속 미제 군용기(PBY)를 격추하면서 미국의 비밀 지원이 또 말썽을 일으켰다. 곧장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그 책임을 장제스한테 돌리며 잔당 송환을 다그쳤다. 그해 봄, 본토 수복 꿈을 접은 장제스는 국민당 잔당 3,371 명과 그 관련자 825명을 타이완으로 데려갔다. 장제스는 지원 중단과 관계 단절을 선언해 형식상 국민당 잔당에서 손 뗐다. 이게 제2차 송환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국민당 잔당은 사라지지 않았다. 버마에서 쫓겨난 잔당은 몰래 타이 국경을 넘었다.
이때 리원환 장군이 제3군 1,400여 명을 이끌고 바로 이 탐웅옵에 본부를 차렸다. 탐웅읍 역사는 그렇게 출발했다. 한편 돤시원 장군은 제5군 1,800여 명을 데리고 탐응옵에서 동북쪽으로 100km쯤떨어진 도이매살롱에 본부를 꾸렸다. 이렇게 제3군과 제5군에다 마쥔궈장군의 제1독립부대 정보요원을 포함해 4,000명 웃도는국민당 잔당이 타이 국경으로 흘러들었다. - P50

근데 왜 이 잔당은 편안한 타이완을 마다하고 험난한 산악 국경에 남았을까? 장제스의 아들로 나중에 총통을 한 장징궈國의 행적에 그 답이 숨어 있다. 그즈음 국방부 정보국(IBMND)을 이끈 장징궈는 제2차 송환 직전 비밀리에 돤시원 장군을 타이완으로 불러잔당 지도자로 임명하면서 국경 잔류 명령을 내렸다. 그 자리에서장징궈는 돤시원한테 "미국의 눈길이 수그러들 3개월 뒤부터 자금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건 장제스의 공식적인 관계 단절 선언과 달리 타이완 정부가 여전히 국민당 잔당을 정치적 연장으로 써먹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미국 눈치를 본 타이완 정부는 오늘내일하며 끝내 그 자금지원 약속을 저버렸다. 목 빠지게 돈줄을 기다렸던 돤시원과 리원환은 배신감을 앞세워 ‘독자적 생존‘을 외치며 마약사업에 스스로 정당성을 갖다 붙이게 된다. - P51

"제3군과 제5군의 국경 잔류는 타이완 정부의 자금 지원과 미국정부의 비밀반공용병정책이라는 큰 틀에서 나왔지만, 그 밑바탕엔잔당 지도부의 마약 돈줄이 걸려 있었다."
잔당 소년병 출신으로 국민당 역사를 연구해온 친이후이覃怡輝(타이완 중산인문사회과학연구소) 말마따나, 그 시절 극으로 치닫던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와 마약루트를 쥐고 있던 국민당 잔당의 이권이 절묘하게 맞물렸던 셈이다.

그로부터 제3군 리원환은 제5군 돤시원과 손잡고 타이, 버마, 라오스 국경을 낀 이른바 골든트라이앵글 마약 패권전에 뛰어들었다. - P51

그게 ‘아편왕‘으로 불린 버마 산주 출신 군벌 쿤사Khun Sa와 맞붙은 ‘1967년 아편전쟁1967 Opium War‘이었다. 그 전쟁 끝에 리원환과 돤시원은 국경 마약루트 90%를 손에 쥐었고, 골든트라이앵글은 세계최대 마약생산지로 악명 떨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연간 60톤에 지나지 않던 인도차이나의 아편 생산량이 1970년대 중반 베트남전쟁이 끝날 무렵 1,000톤을 웃돌았다. 바로 리원환, 돤시원의 국민당 잔당과 쿤사의 마약 경쟁이 낳은 결과였다. - P52

그사이 국민당 잔당은 1960~1970년대 미국의 대라오스 ‘비밀전쟁Secret War‘에 이어 1970~1980년대 타이 정부의 타이공산당(CPT) 박멸작전에 용병으로 투입되었다. 그로부터 국민당 잔당은
‘코드네임 04‘로 타이 합참의장이 직접 조종하는 중국비정규군(CIF)이란 이름을 달았다. 그 대가로 타이와 미국 정부는 국민당잔당의 마약사업을 눈감아주었고, 타이 영내 정착을 허락했다. 그렇게 국민당 잔당은 1950~1980년대를 통틀어 ‘국제반공전선‘과
‘국제마약전선‘이라는 쌍둥이전선을 달리며 아시아 현대사를 난도질했다.
현재 탐응을 비롯한 타이-버마, 타이-라오스 국경에는 할아비의 역사를 모르는 국민당 잔당 후손 6만여 명이 60여 마을을 일궈 3대째 흘러내리고 있다. - P52

현실은 어떤가? ‘군대를 먹여 살렸다‘는 그 국민당 잔당 지도자들은 전쟁이 끝나고도 자손대대 부를 대물림했다. 이게 마약의 정치경제학이다. 그 돈줄이 몰렸던 곳이 치앙마이다. 그 시절 국민당 잔당 지도부와 군사를 비롯한 모든 마약군벌들이 그랬듯이 리원환도 치앙마이를 마약사업 발판 삼았다. - P58

알음알음 전해지던 치앙마이 마약거점설이 세상에 드러난 건 1972년이었다. 그것도 미국 정부의 마약퇴치쇼를 통해서다. 그즈음 베트남전쟁에 투입한 미군한테 흘러드는 골든트라이앵글 마약으로 골머리를 앓던 미국 정부가 치앙마이에서 국민당 잔당이 생산한 아편 26톤을 불태웠다. 그 공개적인 쇼의 대가로 미국 정부는 국민당 잔당한테 100만 달러, 요즘 시세로 70억 원 가까운 돈을 건넸다. 그 돈은 리원환을 비롯한 국민당 잔당 지도부의 치앙마이 비밀금고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그날 리원환은 아편에서 손을 씻는다고 선언했다. 미국 정부가 머리카락 뒤에서 숨바꼭질한 꼴인 그 쇼는 아편에 콩과 온갖 잡것들을 섞어 태웠다는 의혹에다, 리원환의 가짜 은퇴설까지 불거지면서 두고두고 말썽을 일으켰다. - P55

마약꾼을 잡아 가두기는커녕 오히려 미국 정부가 대놓고 아편을 구입한 꼴인 그 희한한 쇼는 결국 던진 놈의 목을 치는 부메랑이 되었다. 그 결과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났을 때 참전 미군 10~15%가 마약에 중독돼 미국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국제마약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진 것도 바로 그 무렵이다.
그 마약이 모두 미국 정부가 부려먹은 반공용병 손에서 나왔다. 그 하나가 국민당 잔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라오스 비밀전쟁에 투입한 몽족 Hmong이었다. 그 두 반공용병의 마약사업을 지원한 게 CIA였다. 그렇게 CIA가 뒤를 받친 마약이 베트남전쟁으로 흘러갔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국제 마약 카르텔의 뿌리가 되었다. CIA의 그 비밀작전을 직접 승인하고 지원했던 주인공이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닉슨으로 이어지는 미국 대통령들이었다. 마약, 누구를 탓하랴? - P59

그 시절 국제 정치판을 따진다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진짜 희생자는 따로 있다. 중국내전에서 열대여섯 살 철부지로 영문도 모른 채 국민당 쪽에 줄 섰다가 한평생 반공전선 용병으로 끌려 다닌 전사들이다. 그가운데도 가족 없이 쓸쓸히 사라져가는 전상자들이 있다. 바로 룽민즈자수용자들이다.
탐응읍에서 산을 내려가 12km쯤 떨어진 곳에 반마이농부아BanMai Nong Bua라는 제법 큰 마을이 하나 있다. 그 마을 언덕배기 108계단을 오르면 깨지고 낡아빠진 수용소 건물 네 채가 나온다.  한때 홀아비 전상자 100여 명을 수용했던 룽민즈자다. 2004년 취재 때만해도 마흔네 명이 살아 있었는데 13년 세월에 휩쓸려가고 이제 딱열 명만 남았다. 그이들을 반공용병으로 부려먹었던 미국, 타이완,
타이 정부는 애초 눈길 한 번 준 적 없다. 그동안 타이완 자선단체가한 사람 앞에 다달이 500밧(16,500원쯤)을 보태준 게 다다. 2004년에도 500밧이었다.
1972년 타이공산당 박멸작전 때 지뢰를 밟아 한쪽 다리를 잃은 자잉왕(73세)은 "500밧으로 쌀 사면 끝이다. 어쩌다 동네 사람들이찬거리를 보태준다."며 13년 전과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살아있는 게 기적이다. 예나 이제나 소원도 똑같다. "죽기 전에 고향(원난성)으로 돌아가고 싶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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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이야기가 한참 길어졌는데, 아무튼 버마전선 반짝경기로 버티던 방콕 외신판은 1991년 미국의 제1차 이라크 침공 유탄을 맞고 서서히 김이 빠졌다. 베트남전쟁 뒤 첫 대규모 국제전에 엄청난 돈을 뿌렸던 언론사들이 비용 절감을 내걸고 1990년대 중반부터 하나둘씩 방콕 지국 문을 닫은 탓이다. 이건 냉전 동안 정치 중심 편집을 해왔던 언론사들이 경제 중심 편집으로 틀을 바꿔나가는 시점과도 맞물린다. 이때부터 국제 언론은 ‘뉴스나는 곳에 기자 간다‘는 전통적 언론관을 팽개치고, ‘기자가는 곳에 뉴스 난다‘는 자본논리를 휘두르며 입맛대로 뉴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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숄로호프의 대부분의 작품의 주인공은 카자크이다. 특히『돈 강 이야기」와 「고요한 돈 강』은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에 휩쏠린 돈 강 카자크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직접적으로 다루고있다. 그러므로 숄로호프의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카자크의 역사, 전통, 생활 방식을 알 필요가 있다.
우선 ‘카자크‘란 단어의 어원을 알아보자. 유명한 사전 편찬자인 V. 달리는 ‘카자크‘라는 단어가 ‘방랑하다‘, ‘떠돌아다니다‘를 의미하는 중앙아시아아의 ‘카즈마크‘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 P268

 유목 생활을 한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인들은 스스로를 ‘카즈마크‘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편, 유명한 러시아의 사학자인 V. 클류체프스키와 N. 코스토마로프는 이 단어가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의 남쪽과 남동쪽을 집중적으로 식민지화했던 14~15세기에 타타르인들로부터 차용되었다고 생각한다. P. 골루보프스키 같은 사학자는 폴로베츠인들사이에서 ‘수호자‘, ‘경비원‘으로 사용되었던 ‘카자크‘란 단어가러시아어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20세기 초에는 기존의 견해들을 뭉뚱그려 ‘카자크‘란 단어가 몽골어 ‘코‘(갑옷)와 ‘자흐‘
(경계, 국경)에서 나왔고, 그 의미는 ‘국경의 수호자‘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5~16세기 무렵의 모스크바 러시아 시대에는 국경선(불가강 중류의 랴잔과 툴라에서 드네프르 강까지)을 지키기 위해 고용되어 군무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카자크로 불렸다. 국경선 남쪽에는 국경을 수비하는 카자크들의 독립 촌이 존재하기도 했다. 16~17세기에 군무에 종사한 카자크들은 국경선의 남동쪽으로 국토를 확장하고, 시베리아와 극동을 정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군무에 종사하던 카자크들과 함께 스스로를 ‘떠돌이‘라고 불렀던 ‘자유로운‘ 카자크들이 있었다. 이들은 국가의 기존 질서에 불만인 사람들, 모험가들, 돈 벌러 돌아다니는 사람들, 지주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도주한 농노들,
라스콜리니키(구교신자들)로 군무에 종사하는 카자크들과 뒤섞여 일정한 거처나 사유재산이 없이 돈 강, 테레크 강, 야이크강 유역에서 카자크 공동체를 이루며 자유롭게 살면서 이웃한공국과 유목민들과 항상 싸움을 했다.  - P269

카자크 공동체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땅을 공동으로 경작했고, 세금이나 연공도 없었다. 그들은 임기제의 아타만(대장)과 원로회의 의원을 뽑았다. 평상시에 아타만은 카자크들의 뜻을 받들고 실행했지만 전쟁 시에는 무제한의 전권을 행사했고, 원로회의는 법이 아니라 카자크의 전통과 풍습으로 공동체를 운영했다. 그러나 일련의 농민 봉기(스테판 라진 봉기, 푸카초프 봉기, 불라프 봉기)가 일어나자 러시아 정부는 18세기 초부터 아타만과 원로회의 의원선출 제도를 폐지하고 그들을 군 계급으로 서열화하고, 아타만에 의한 카자크군 지휘권을 점차 박탈하기 시작했으며, 카자크의 상층부에게 러시아 귀족의 권한을 부여하여 회유하기도했다.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 군대를 개혁하면서 국가의 영토확장ㅇ에 용감하고 호전적인 카자크들을 이용했다.
1861년 농노해방 이후 많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러시아의 남동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카자크 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카자크 촌에 분여지가 증대하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생기고, 관직을 얻은 카자크가 생기고, 군무에 종사하지않는 농민 출신의 비카자크인이 부유한 카자크에게서 땅을 임대하여 경작하면서 카자크 촌에는 계층 분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이후에 땅을 둘러싼 카자크 계층들 간의 불화, 카자크의 가부장적인 전통과 풍습을 지키려는 노인 세대와 보다 자유분방한 젊은 세대 사이의 갈등이 내연된다. 결국 볼셰비키 혁명이후 내전이 발발하면서 카자크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적위군과 백위군)로 갈라져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에 휘말리게 된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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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뉴시카가 몇 걸음 물러서며 짧은 갈지자 걸음으로 걷다가 날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작은 장밋빛 손을 흔들었다. 갑자기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짐승의 앞발이 내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다. 나는 급히 얼굴을 돌렸다. 그렇다, 수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머리가 희끗해진 중년의 남자들이 꿈속에서만 우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현실에서도 울고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제때에 얼굴을 돌리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가장 중요한 건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고, 그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겁고 인색한 남자의 눈물을 아이가 보지 못하도록하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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