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박노자가 본 러시아혁명

올해는 1917년의 러시아혁명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월 혁명'이라 불리지만 지금의 달력으론 11월이고 그때쯤이면 러시아 내외에서 이 역사적 사건(이자 소위 '과거의 사건')에 대한 활발한 조명이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국내에서도 대학가에서는 이미 이러한 조명이 기획되고 있는 듯하다. 마침 최근에 러시아계 한국인이면서 노르웨이 대학의 교수로 있는 박노자의 글방에 '러시아 혁명'에 관한 짤막한 글이 올라왔다. 예전부터 '당신들의 러시아'를 읽고 싶던 차에 흥미롭게 읽었다. 여기에 스크랩해놓는다(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list.html?blog_board=4).

박노자 글방(07. 01. 29) 1917년 러시아 혁명, 배울 것 배우고 미화하지 말기를

지금은 사회 전체가 비판 의식이 좀 강화해서 덜하지만, 제가 1991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왔을 때만 해도 소위 "운동"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레닌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성경 무오류설"을 믿는 기독교인들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소련이 몰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레닌을 따라 배우자"는 사람을 제가 살았던 안암골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어요.

사실, 제가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좀 어리둥절했었지요. 빛이 있는데에서 꼭 어두움도 따라 생기고 각종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따른다는 것은 이미 도교나 불교에서도 잘 알려진 변증법의 기본인데, 그 "자생적 볼세비키" 분들에게 그러한 이야기가 안통할 때가 많았어요. 그 분들께서 제게 "혁명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사실, 저는 단순한 "호불호"를 갖다가 답을 못했었지요. 하도 진보와 퇴보, 문화의 대중적 보급과 야만적 잔혹성, 상당수의 신분상승과 일부의 몰락이 얼키고 설킨 것이 혁명이기에 말씀입니다.

글쎄, 1917혁명의 덕분이 아니라면 저부터 러시아에서 태어날 리도 없었을 걸요. 제 조상인 가난한 유대인들은, 제정 정권이 지속되거나 반동적 "백군"이 이겼을 때에 아마도 pogrom (유대인 학살)에 죽거나 미국으로 도망쳤을 것이고, 저도 러어를 모국으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혁명이 제게 개인적으로 '생명의 은인'에 가까운 것이지요(*박노자가 유대인 가계라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1905년 혁명 때에 행동대 일하다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민간 제 조상의 친척 한 분은, 본인도 사회주의 혁명가이었음에도 1920년대 중분에 소련에 잠깐 왔다가 너무 실망이 커서 남미로 돌아갔답니다. 물질적 가난에만 경악한 것이 아니고 본인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도 없었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경악한 것이지요.  본인이 목숨을 걸고 행동대에서 일했던 것은, 제정 정권과 같은 부자유, 탄압, 사상적 획일화의 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것이었느냐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레닌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저로서 간단히 답하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The 1917 Russian Revolution

그건 그렇고 1917년 혁명의 성격을 생각해봅시다. 이 혁명이 사회주의적이라고 하는데, 그게 일면으로 맞을 것입니다. 20만 명의 볼세비키 당원의 대다수가 "사회주의 지향적인" 대규모 공장의 숙련공과 중, 하급 지식인이었고 그 지도부 역시 주관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해 평생 투쟁하려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과연 "사회주의"를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생각했을까요? 이건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아주 길겠지만, 간단히 축약하자면 그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사회주의"의 청사진은 없었던 것 같아요. 거의 "임기응변"의 가까운 방식이었지요.

일단,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도 제대로 연습을 못한 후진국에서는 이 분들을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 (제헌의회 등등)를 다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으며, 권력을 잡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벌써 비밀 경찰 격의 "체카"를 만들어 사형제를 부활시켰지요. "체카" 자체의 통계를 그대로 믿어도, 18-20년간 사형집행된 "반동 분자"들은 12700 여명이었는데, 그들 중에서는 상당수는 "유산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마구 붙잡혀 "반동 분자 준동에 대한 집단적 응징"이라는 명목으로 총살된 "인질"들 이었지요. 레닌이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방 체카들은 고문과 부녀자, 아동의 학살 등 제정러시아 암흑의 통치하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반혁명 분자 근절 방법"들을 이용했어요.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가 구 제정러시아 군의 장교들을 혁명의 "적군" (Red Army)에다 다시 징병했을 때에 그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특별 관리하다가 해당장교의 탈영/"반역 행위"시에 그 노모나 아이들을 수용소에 보내거나 총살하도록 조치해놓기도 했어요.  그런데 부녀자와 아이들을 마구 죽이면서 저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요?

1917년의 10월 혁명을 앞두고 레닌이 "국가의 소멸", "직접 생산자들의 직접적인 생산 과정의 전국적 관리" 등, 참 듣기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국가가 진짜 언젠가 소멸됐으면 아주 좋았을 터인데, 레닌 등이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이 됐을 때에 그 말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어요. 1919년말-1920년초에, 레닌이 "전시 공산주의"의 "알곡 징발제도"와 배급제를 '사회주의의 맹아', '사회주의에의 이행 방법'이라 이야기하고, 그 뒤에는 "공산주의란 전국의 전기 보급과 소비에트 권력 장악"과 같은, 자본주의적 개발주의를 그대로 방불케 하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았어요.

[Photograph of Lev Davidovich Trotskii]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는, 자기 부처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그런지 "전국 노동의 군사화"를 주장하여 "노동 군대"를 만들어서 생산 요충지에 배치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에의 첩경이라고 선전했어요. 이와 같은 "노동의 군사화"가 전시 공산주의라는 특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필요했는지 몰라도,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이를 "사회주의적 덕목"으로 취급한 것은 그들의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해방 지향성"을 의심케 합니다. 나중에 1921년초에 전국적 농민 반란과 크론스타드 수병 봉기 등 민중의 저항에 정신들 차려 "알곡 징발제"와 같은 반인륜적 폭력을 정지하고 어느 정도 민중의 숨통을 트이게 했지만, 권력의 독점을 또 끝까지 지키려 했었지요.

1921년까지만 해도 일부 소비에트에서 멘세비키 등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자 들이 계속 참여했지만 (사실, 인쇄노동자의 노조나 화학 노조 등이 1921년까지 거의 멘세비키들이 장악했었지요), "신경제 정책"을 발표하여 경제에서의 국가적 폭력을 줄임과 동시에 멘세비키, 에세르, 아나키스트 등의 "비 볼세비키" 혁명 세력들을 크게 박해하기 시작했어요(*박노자의 포지션은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쯤에 해당하겠다). 

이미 1918년4-5월부터 간헐적으로 멘세비키 계통의 노조 활동가들을 총살하거나 체포하는 개별적인 소수의 경우들이 있었지만, 1921년에 그 탄압이 커져 1922년초에 전국에 체포된 멘세비키 활동가 (대다수 노조 간부들이지요)만 해도 무려 1500 명이었어요. 아니, 의견을 달리 하는 사회주의적 노동자 활동가들을 마구 붙잡아 감옥에 집어넣는 것은, 무슨 놈의 "노동자 민주주의"입니까? 1920-1921년까지 노동자 민주주의의 일부 요소들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뒤에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한 마디로, 과거 혁명들의 장점을 아는 동시에, 그 단점도 좀 배우도록 합시다.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도 알아야 하지만,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를 이 시대의 혁명가들은 제발 따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청년 레닌의 둘이 없는 지기로서 1890년대 중반에 그와 함께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을 이끌었다가 나중에 멘세비키의 길을 걷게 된 율리 마르토브(1873-1923, 사진) 선생의 1918년의 레닌 관련의 논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을, 난 이해 못한다". 글쎄, 제가 꼭 마르토브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역시 촌철살인의 평이었지요. 저도 낮에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놓고 밤에 편안히 자는 사람을 이해 못하지요.그러나, 레닌의 잠은 정말로 편안했을까요? 

1917년, 한 군 부대에서의 혁명적 집회의 모습. 그러나, 1918년5-6월에 일부 멘세비키 노동자들은 독립적인 노조의 전국적 총회를 열려고 하자, 레닌 정권이 경찰 박해로 맞섰습니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이미 그 때도 사실 빛좋은 개살구에 가까웠지요.

07. 02. 05.

 

 

 

 

P.S. 내가 갖는 의문은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과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가 과연 별개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조급하지 않게 인명을 존중해가면서 그리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해가면서, 즉 어떠한 '과잉' 혹은 '광기'도 배제하면서 우리는 '혁명적 열성'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가? 박노자의 인도주의적/민주주의적 사회주의란 것도 '참 듣기 좋은 이야기'에 속하는 건 아닌가? 해서 경청할 만하지만 내게 '리얼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 레닌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역시나 지젝의 레닌론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를 참조할 수 있다. 정리해놓을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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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네가 읽은 건 장자가 아니다!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도발적인' 것은 뜻밖에도 가장 오래된 고전 <장자>의 재번역본이다. 한겨레의 기사 타이틀은 아예 "왜곡·오역의 ‘장자’는 불태워라"인데, 그간에 나온 <장자>의 번역들이 왜곡과 오역으로 도배돼 있으니 다 불태워 마땅하다는 것. 역자인 기세춘 선생의 일갈을 옮기면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장자는 장자가 아니다.” 나도 몇 권의 번역서를 갖고 있는지라(비록 지금은 다 박스에 들어가 있지만),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동양 고전인지라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는데, '네가 읽은 건 장자가 아니다!'란 소리니까 더 없이 도발적인/충격적인 발언임에 틀림없다. 소위 '전문가들'의 신뢰할 만한 리뷰들을 읽어봐야 상황판단이 가능할 듯싶지만, 일단은 역자와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책은 보관함에 넣어두었다). 아마도 내일자 신문에 게재되는 모양이다.

경향신문(07. 01. 27) ‘장자’ 재번역한 기세춘씨

“노·장자의 기본 ‘캐릭터’가 완전 변질됐습니다. 저항성이 사라지고 지배 담론으로 윤색됐어요. 그 본 모습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고증학적 작업을 거친 재번역이 필요합니다.”

기존 학계에 기세춘씨(72)는 ‘불편한 존재’다. “시중의 동양고전 번역서를 모두 수거해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과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동양고전 번역서가 왜곡과 변질, 오역으로 넘쳐나고 있다는 게 기씨의 주장. 그가 “칠십 노인의 망령기와 당돌함으로 만용을 부려” 나선 재번역의 첫 결실로 ‘장자’(바이북스)를 내놓은 건 이때문이다.



“학계에선 아무도 경종을 울리지 않습니다. 저야 강단학계의 학맥이나 스승이 없어 자유로우니까 욕 좀 하겠다는 겁니다.” 기씨에 따르면 노장사상은 도교가 일어나 황제와 노자를 교조로 삼으면서 신비학으로 왜곡됐고, 정치권력에 의해 체제에 순응하는 은둔과 청담의 사상으로 변질됐다. 왜곡의 뿌리는 2~3세기 중국 위진(魏晉)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조에 의해 등용된 왕필이 당시 반란의 중심이었던 도교 세력의 민중성을 거세하기 위해 ‘노자 도덕경’과 ‘장자’에 나타난 반체제성과 저항성을 제거해 체제순응적이고 권력친화적인 내용으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기씨는 “국내에 출간된 노장 주해 및 해설서들은 왕필의 주해를 근간으로 삼은 탓에 이러한 왜곡을 답습한 것들”이라고 비판했다.

번역자의 오역도 ‘장자’의 본 모습을 훼손했다. 시대와 문화, 언어 등의 차이로 인한 변질과 오해 가능성조차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채 번역했다는 것이다. 기씨는 “은미하고 철학적인 담론이 치졸한 처세훈이 되고, 서사적인 우화는 그 핵심을 놓치고 초점을 그르쳐 다른 길로 빠져버린 엉뚱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고 꼬집었다.

그가 ‘장자’의 오역으로 꼽는 예를 살펴보자. 내편(內篇) ‘대종사(大宗師)’에 ‘죽일 자를 풀어주는 것이오(綽乎其殺之)’로 해석해야 할 것을 ‘여유있게 죄인을 죽이는 것이다’로, ‘잘못을 행해도 형벌로 다그치지 말라(爲惡無近刑)’로 해석되는 부분을 ‘어쩌다 악한 일을 하더라도 형벌에 저촉되지 않게 하라’로 옮긴 게 대표적. “권력 저항적이고 무정부주의인 노장 사상에서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느냐”는 게 그의 분노 섞인 한탄이다.

기존의 모든 가치체계를 전면 부정하는 혁명적 담론인 ‘동심론(童心論)’도 왜곡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도올 김용옥 교수가 동심론을 기공술(氣功術)로 해석해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운 피부를 가꾸어 젊음을 되찾자고 한 것은 “한심하다”고까지 말했다.

기씨는 “중국 고전의 경우 수천년 묵은 고문자이므로 우리나라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뜻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또 “고전은 내용이 포괄적이므로 신학, 철학, 정치, 경제, 사회 등 광범위한 소양이 요구된다”며 “자기 깊이가 그걸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제 밥술이라도 먹게 됐으니까 적어도 동·서양 고전은 우리가 제대로 번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문은 비판정신이 생명입니다. 그냥 그대로 답습하려면 왜 합니까.”(김진우 기자)

07. 0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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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대중문화의 숲에서 태워버려야 할 책

그제 점심을 먹으며 몇 페이지 읽어본 책은 자신을 '미디어 키드'라고 지칭하는 문학평론가 정여울의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강, 2006). '대중문화'를 표나게 내세우고 있어서 그 흔한 문화비평서의 한 종류쯤으로 치부하기 쉬운데, 실상은 진지한 미디어 리뷰들로 채워져 있다. 한데, 그 미디어에는 '글'도 포함되고 저자가 말하는 '내 유일한 미디어'가 '글쓰기'인 걸 보면 제목의 '대중문화'는 두루뭉술이라 할 만하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나 <안녕! 프란체스카>, <프렌즈> 같은 드라마들도 리뷰의 대상이 되었다는 걸 제외하면 책을 구성하고 있는 글들은 대부분 '고전적인' 의미에서 북리뷰나, 영화리뷰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해서 이 책의 용도는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는 데 있다기보다는 다루어지고 있는 미디어-텍스트들에 대한 가이드북 정도로 이해하는 게 타당할 듯싶다. 그렇게 성격을 한정하면 책의 미덕이 도드라진다. 내가 읽은 책이나 본 영화들을, 리와인드 시켜서 다시 읽고 보는 효과가 있을 뿐더러 아직 읽지 않은 책이나 보지 않은 영화들에 대한 개성있는 소개, 마치 진득하게 사귀어온 친구들을 한번 만나보라고 권해주는 듯한 정감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친구들'과 단번에 다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이 책 덕분에 한 '거물급'을 다시금 상기하게끔 됐으니, 곧 <분서>의 저자 이탁오가 그이다.

'태워버려야 할 책, 그러나 영원히 태우지 못할 책'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분서>의 리뷰는 책의 맨마지막 꼭지인데, 이 배치 자체는 물론 우연이 아니겠다. 저자가 '책머리에'에서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글은 사람을 한꺼번에 쓰러뜨리고 한꺼번에 일어서게 만드는 글이었다. 가득 찬 절망을 선물하지만 가득 찬 희망을 동시에 선물하는 그런 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헷갈리지만 결국 울음과 웃음은 같은 것임을 깨닫고 그저 웃어버릴 수 있는 글. 한마디로 병주고 약주는 글이었다. 아직 그런 글을 써본 적은 없지만, 지금은 그런 꿈을 아직 내버리지 않고 견디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11-2쪽)고 적었는바, 바로 그 '병주고 약주는 글'이 말미에서 다루고 있는 <분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좋은 글에 대한 탐심에서 벗어나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매서운 죽비처럼 쾌감 어린 고통으로 내 뒷목을 후려친 두 스승이 바로 루쉰과 이탁오였다." 먼저, 루신: "루신의 글은 세상을 향한 그의 고독한 전투를 위한 '투창과 비수' 자체였다. 나는 루쉰의 글을 통해 글이란 자고로 무조건 아름답고 봐야 한다는 미학적 허영과 결별할 수 있었다. 좋은 글이란 좋은 삶을 위한 하찮은 핑계이거나 배설물에 불과하며, 삶이라는 토대가 받쳐주지 않는 한, 한낱 글이란 삶에 맹독이 될 수도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 이탁오의 <분서>: "루쉰이 글에 대한 내 오랜 낭만적 허영을 한칼에 베어냈다면, <분서>(한길사, 2004)는 건조한 철학책이 한 사람을 종일토록 울게 할 수도 있음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글이란 반드시 어떤 특정한 장르에 속할 필요가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어떤 장르도 아닌 채로 글 자체의 에너지로 진검 승부하는 글쓰기. 그의 글은 일상과 현실에 대한 하루하루의 고뇌 자체가 철학으로 여울질 수 있다는 희망이다. 이탁오의 <분서>는 철학이고자 하지 않는데도 철학이 되었고 차라리 '태워버려야 할 책'(焚書)이 되고자 몸부림쳤음에도 아무도 훼손할 수 없는 걸작이 되었다."(343-4쪽)

이전에 <이탁오 평전>(돌베개, 2005)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소개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은 <분서>의 완역본이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되었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그 이전에는 <평전>의 역자가 옮긴 단권짜리 <분서>(홍익출판사 1998)가 나와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렇듯 '온몸으로 보여주는', 리뷰 자체가 명령으로 여울질 수 있다는 걸 증명해주는 글을 접하게 되어 일단 <이탁오 평전>만이라도 먼저 사두었다(<분서>를 소장하려면 목돈이 필요하다). 이런 '폐해'를 보건데, 서두에 적은 이 책의 '미덕'은 달리 '맹독'이라 불러도 무방하겠다(이거 '대중문화의 숲'이 아니잖아!).

그걸로도 모자라는지 저자가 뿜어내는 '강추'의 추임새: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품에 안을 수 있었던 사람. <분서>는 앎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닌, 교양이나 권력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닌, 알고 죽지 않으면 인생이 너무 서러울 것 같아, 차마 멈출 수 없는 그리움으로 뿜어낸 사유의 기록이다."(345쪽) 이 정도면 가관 아닌가? 거의 투창과 비수를 들고서 '이래도 안 읽겠는가?' 심문하는 듯하다. 몇 문장이 더 이어지지만 여기까지 읽고서도 이탁오와 그의 <분서>에 대해서 모른 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아마도 모든 책과 무관한 사람이 예외일 수 있겠다). 나는 두손 다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싱어송 라이터, 한대수'씨의 추천사를 빌어서 말하자면, "정여울씨, 땅콩 베리 머치!"

07. 01. 25.  

P.S. '태워버려야 할 책'까지 집에 꽂아두면 식구들한테 더 혼날까.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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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돌이 > [퍼온글] 외국인에게 소개하고 싶은 우리나라 문화 유산

한국인의 품을 닮은 지리산, 그 속에 아름다운 절을 찾아서

  왜 지리산인가? 지리산의 모습은 한국인의 속으로 정 많은 심성과 닮았다. 그 깊이와 폭을 가늠할 수 없으면서도, 언제나 후덕하고 시련을 꿋꿋하게 이겨나가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지리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지리산에도 그 속에 품은 절이 없다면, 그 절과 함께 오랜 세월을 살아 온 사람들의 흔적이 없다면, 지리산도 우리나라 사람의 참모습을 닮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리산과 그 품안의 절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자취와 오늘의 모습, 그리고 미래까지도 오롯이 보여주는 곳이다.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지리산 성모설화의 배경인 노고단, 삼국시대와 신라시대에 지어진 쌍계사, 연곡사, 화엄사, 천은사, 실상사. 그 절의 속살을 채운 고려와 조선의 유적들이 과거의 모습이라면, 물 맑은 섬진강, 쌍계사의 벚꽃 길, 연곡사의 계단식 논밭, 천은사의 석축은 현재를 일구어 가는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보여준다. 실상사 주변의 생태 논밭과 그 절에서 수행 정진하는 스님들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하동 쌍계사의 벚꽃과 쌍계 - 지리산의 계곡이 품은 절

  봄날, 쌍계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사람들로 장사진이다. ‘전라도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끝의 화개 장터에서 시작된 벚꽃이 말 그대로 십리. 벚꽃 길의 벚꽃만큼이나 사람도 많다. 모두 어우러져 장관이다. 그러나 어느 때 가도 기본은 갖춘 절이 쌍계사이다. 쌍계사는 계곡으로 이름난 절이다. 쌍계사는 최치원이 '쌍계'라는 석문을 써서도, 섬진강 그림자를 본 딴 팔영루 때문도, 절집이 우아하거나 아름다워서 이름이 높은 게 아니다. 오직 쌍계사의 그 이름처럼 절을 깊게 두르고 있는 두 계곡(=쌍계)이 이름값을 한다.
  심지어 나라에서 국보로 지정한 "진감선사 부도비"도 보통의 관광객에겐 별로 의미가 없다. 오히려 담장에 기와 조각을 넣어 만든 소박한 꽃문양이 우리나라 사람의 소탈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성품과 더 닮았다.
  쌍계사가 이름 높은 이유는 지리산이 품고 있는 비경인 불일폭포 때문이기도 하고, 그 물을 받아 잘 자라는 녹차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번잡한 것을 싫어한다면 쌍계사는 들르지 않아도 좋다. 다만 벚꽃이 핀다면, 그 어떤 수고를 하더라도 벚꽃 길을 걸어보는 맛도 있다. 차로 휙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벚꽃 길을 걸으면 산 중턱에 드문드문 자리 잡은 차밭도 눈에 들어올 것이다.
  참, 그리고 범종각 앞에 소담스럽게 핀 연보랏빛 수국과 절집 담장을 따라 핀 천리향, 분홍 꽃빛이 든든한 배롱나무, 그리고 흔하디흔한 나리꽃도 좋은 물과 함께 해서 그런지 참 예쁘다.

 

구례 연곡사의 부도 - 나라 안 최고 작품 두 가지

  연곡사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안 최고 작품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피아골에 펼쳐진 계단식 논밭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난 승려들의 사리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돌조각품인 부도이다. 
  지리산 중에서도 가장 단풍이 곱다는 피아골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산 중턱에 어떻게 저런 곳에도 밭을 일구었을까 싶은 산중턱의 밭들이 나온다. 층이 많은 곳은 100여 층도 넘는다고 하니 농부들의 지혜가 사뭇 놀라울 따름이다.  
  쌍계사가 계곡의 절이라면 연곡사는 부도(이름난 승려들의 사리를 넣어둔 돌조각)의 고향 같은 절이다. 우리나라 모든 부도의 아름다움이 이곳 연곡사에서 나와 다시 이곳에 모인다. 지리산 피아골에 사는 사람들의 억센 기운을 보여주는 계단식 논밭을 거슬러 올라 피아골 적당한 중턱에 자리 잡은 연곡사는 공간이 넓지 않음에도 규모가 굉장히 크게 느껴진다. 아마도 담장이나 번잡한 무엇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 앞 꽃밭이 정갈하게 가꿔져서 절 주인의 정갈한 솜씨가 배어난다.
  우리나라의 최고 수준의 부도는 대적광전의 산기슭에 앉아 절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름은 건물의 동쪽에 있어 동부도. 연곡사 동부도는 아마도 탑으로 치면 불국사 석가탑의 엄정함과 단아함, 다보탑의 화려함과 산뜻함을 절묘하게 섞어 놓은 것 같다. 차갑고 시커먼 돌덩이에 이렇게 환상적이고 멋진 옷을 입혀놓을 수가 있을까 싶다. 연곡사 동부도만으로도 한국 전통 예술의 자랑스러움을 설명할 수 있다. 돌에다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동부도의 아름다움은 바로 위의 북부도와 반대편의 서부도, 그리고 주인을 알 수 없는 다양한 부도들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부도들은 줄을 잘 못 서서 괜히 억울할 것 같다. 이들도 다른 곳에 있었으면 그래도 꽤 괜찮은 평을 들었을 텐데, 사람들이 연곡사 동부도를 보고 난 후에는 아무래도 (눈이 높아져서) 평가가 박하다. 

 

구례 천은사 - 아름다운 전설과 우아하고 정갈한 분위기

  천은사(泉隱寺-샘이 숨은 절이라는 뜻이다.)는 분위기의 절이다. 그리고 자리 잡음의 절이기도 하다. 이 절집의 분위기는 절집 앞에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호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절을 둘러싸고 있는 지리산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지리산의 끝자락인 노고단 아래에 푹 둘러친 곳에 앉은 것도 그렇고, 절집의 공간을 끌어당기기 위해 일주문 옆에 헛담(담의 기능을 하지 않는 담)을 세운 것도 그렇다.
  천은사에서는 입구의 감로수(甘露水)를 반드시 마셔야 한다. 한숨 돌리고 감로수를 마시며 천은사의 전설을 들어야 절이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천은사의 원래 이름이 감로사였다. 그 감로수 때문에 절이 세워진 것인데, 그 물에서 뱀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절에 사는 스님들이 그 뱀을 잡아서 죽였더니 이제는 절에 화기가 일어 불이 자주 났다. 이 때 조선시대의 명필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 라는 편액을 마치 물이 흘러가는 듯한 글자체로 쓴 이후부터는 절에 불이 한 번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천은사에 들어서면 눈에 잘 띄는 것이 자연석을 아주 잘 써서 건물의 터를 잡고, 공간 배체에 활용했다는 것이다. 천은사의 돌담과 돌계단이 오랜 세월에 잘 갈린 것처럼 둥글둥글하며 적당히 색이 바랬고(사실 은행잎이 노란 가을엔 천왕문 뒤에 선 은행나무 때문에-지천이 노란색이다- 정말 장관이다.) 알맞게 높으며 또 곧다.
  천왕문 앞에서 바라본 ‘보제루’의 기둥 쓰는 법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지를 말없이 가르쳐준다. 스님들 넉넉한 마음 씀씀이 덕에 보제루에 앉아서 현판을 쓴 호남 명필 "창암 이삼만"을 떠올리며 지리산을 바라보면 좋다. 아픈 몸으로도 평생 벼루 10개를 붓으로 뚫고 천 개의 붓을 사용했다는 사람이 이삼만이라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보여도 저 정도의 글씨가 나오려면 보통 내공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천은사 담벼락에 곱게 핀 능소화가 천은사 분위기를 닮아 유달리 우아하고 정갈하다. 

 

남원 실상사 - 현재보다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희망의 공동체

  천은사에서, 우리나라에서 차가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이라는 성삼재에 차를 두고 잠시 야생화의 천국인 노고단을 올라보는 것도 좋다. 10년도 넘게 걸린 야생화 복원 프로그램 덕에 겨우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있는 한 노고단에서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인 운해를 볼 수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성삼재를 지나 도로를 달리면 전라북도 남원이다. 남원은 그 유명한 춘향이의 고향이고, 이곳 남원과 이웃 동네 함양 어름엔 흥부/놀부 형제가 살았다는 곳으로 우리 문학에 자주 등장한다. 남원읍에서는 꽤 떨어진 한적한 시골 마을, 지리산의 맨 끝자락에 실상사가 있다. 실상사 앞 계곡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바로 돌장승이 서 있다.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웃음으로 극복해 온 삶의 모습 그대로, 익살이 잔뜩 묻어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있다.
  실상사 주변의 논과 밭은 한국 농업의 미래를 좌우할 실험실이다. 실상사에서 운영해 온 귀농학교 출신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다양한 생태 농업을 연구하고, 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상사에서 눈여겨 볼 보물은 보광전 앞의 동서 3층 석탑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탑인 석가탑과 다보탑의 상륜부(탑의 맨 꼭대기를 해당하는 부분)를 복원할 때 그 원형을 자세히 알 수 없어서, 이곳 실상사의 동서 3층 석탑 상륜부를 본 따서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보면 볼수록 석가탑의 모습과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실상사에도 멋진 유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절에는 ‘이것을 봐야 한다.’는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실상사를 찾는 이유는 절에 살고 있는 사람의 마음씨가 좋기 때문이다. 세상 만물은 생명체의 한 그물로 얽혀있어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인드라망’ 공동체 운동의 중심인 실상사답게 수행자만을 위한 절이 아니라 낯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절이다. 그런 마음들은 생태 뒷간을 비롯해서 절집 곳곳에서 묻어 나온다.
  미래의 한국 불교를 이끌어 갈 젊은 스님들이 치열하게 고뇌하는 절! 작은 배려로 사람을 흐뭇하게 만들 줄 아는 절! 절도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는 절! 아직은 겉멋이 들지 않아 풋풋한 사람 냄새가 나는 절이 바로 실상사이다. 
그래도 실상사에서 볼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실망한 사람은 실상사에 속한 실상사 백장암으로 가면 된다. 백장암은 실상사로부터 약 6-7킬로미터 떨어진 산 속에 있는데 우리나라 조상들이 얼마나 돌을 기막히게 다루었는지를 실증한 탑이 있다. 깊은 산 중에 제대로 기단(탑의 밑받침)도 갖추지 못한 탑이 국보 제 10호! 이 탑의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조각은 연곡사 동부도에나 비길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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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매지 > 전국한자능력검정시험 2007년 일정

시   행   회 35회 36회 37회
교육급수
(4급-8급)
공인급수
(1급-3급II)
교육급수
(4급-8급)
공인급수
(1급-3급II)
교육급수
(4급-8급)
공인급수
(1급-3급II)
인터넷접수 2007.03.05 ~     
      2007.03.08(4일)
2007.03.12 ~     
      2007.03.15(4일)
2007.06.04 ~     
       2007.06.08(4일)
2007.06.11 ~     
       2007.06.14(4일)
2007.09.03 ~     
      2007.09.06(4일)
2007.09.10 ~     
      2007.09.13(4일)
방 문 접 수 2007.03.19 ~     
      2007.03.21(3일)
2007.03.22 ~     
      2007.03.23(2일)
2007.06.18 ~     
      2007.06.20(3일)
2007.06.21 ~     
      2007.06.22(2일)
2007.09.17 ~     
      2007.09.19(3일)
2007.09.20 ~     
      2007.09.21(2일)
시 험 일 시 2007.04.21 15:00 2007.04.28 15:00 2007.07.21 15:00 2007.07.28 15:00 2007.11.03 15:00 2007.11.10 15:00
합 격 발 표 2007.05.21 00:00 2007.05.28 00:00 2007.08.21 00:00 2007.08.28 00:00 2007.12.03 00:00 2007.12.10 00:00
위 일정은 고사장 운영, 대입시험일정 등의 사유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접수일정의 ()부분은 접수일 수이며, 2007년 인터넷접수는 교육급수 및 공인급수 각각 4일동안,
    방문접수는 교육급수 3일, 공인급수 2일동안 시행되니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합격발표는 ARS(060-800-1100)와 인터넷접수 사이트(www.hangum.re.kr)에서 발표합니다.
유의사항
공인급수1급·2급·3급·3급II이며, 교육급수4급·4급II·5급·6급·6급II·7급·8급입니다.
전국한자능력검정시험 18회부터 28회까지 한자능력급수 4급 취득자는 국가공인자격으로 평생 유효합니다.
응시원서는 방문접수기간 동안 각 고사장의 해당 접수처에서 교부하며, 1인당 50매 이하만 접수할 수 있습니다.
고사장 수용인원에 따라 고사장별로 조기마감될 수 있습니다.
방문접수 시간은 09:00부터 18:00까지입니다. 단, 방문접수 마감시간은 각 접수처의 근무시간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인터넷접수 시간은 인터넷 접수 시작일 09:00부터 인터넷 접수 마감일 24:00까지입니다. 계좌이체로 결제하실 경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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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접수는 www.hangum.re.kr 에서 전국 고사장을 대상으로 실시합니다.
시험 당일 반드시 접수하신 해당 고사장에서 지원 급수로 응시하여야 하며, 타 고사장에서 응시하거나, 지원한 급수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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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출된 원서(사진포함)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출처 : http://www.hanja.re.kr/guide/schedule.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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