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동그라미 > 클림트의 다양한 그림들
Judith II, 1909, oil on canvas, Galleria d'Arte Moderna, Venice
유디트 Ⅰ이 좀더 장식적인 화려함과 아름다운 모습에 집중했다면, 이 그림의 색채와 인물은 전형적인 아르누보풍으로 표현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유디트는 유명한 이스라엘의 애국 여걸입니다. 그녀는 서양미술사에서 오랫동안 비중있는 소재로 무수히 다뤄졌고요. 그러나 이 애국 여걸이 클림트의 그림에서는 마치 마약에 취한 듯 몽롱한 표정의 요부로 돌변했습니다. 유디트 연작을 보면 모두 주인공의 눈동자가 풀려 있습니다. 그리고 앞가슴도 공통적으로 드러내놓고 있죠. 옷은 속이 들여다 보이거나 하늘거리는 관능적인 것들입니다.
The Three Ages fo Woman, 1905Oil on canvas
178X198cm
잠든 아이와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여인.그녀는 꿈을 꾸듯 두 눈을 꼭 감고 서 있습니다. 젊음, 희망, 밝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음에도 전혀 사실적이거나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서있는 늙은 여인은 검게 그을린 피부와 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는 불룩 나온 배를 하고 뭔가 고통스러운 듯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있습니다. 사신이 바로 눈 앞에 와 있는 것처럼...... 클림트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들을 그림에 담아낸 이 작품은 만성적인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누이와 어머니의 죽음 인한 삶, 특히 여성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과정으로서 그려진 것이라고 합니다.
Death and Life, painted before 1911 and revised 1915, oil on canvas, Collection of Frau Marietta Preleuthner, Vienna
당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은 말세적 비관주의가 휩쓸고 있었습니다. 1908년에는 8만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지진이 일어났고, 2년 뒤에는 헬리혜성이 나타나 많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 갔으며 1912년에는 호화여객선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죠.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느껴졌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클림트는 죽음의 신에 직면한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Mäda Primavesi, 1912,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New York
클림트의 황금색과 섬세한 구성. 장식성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클림트가 교육을 받았던 응용미술학교의 영향도 있었지만, 이는 당시의 유행하던 미술사조인 아르누보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공간성의 파괴를 목격하게 되는데 이는 물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범하게 된 오류였습니다. 장식성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않았고 작품에서 발산하는 창조적인 힘은 지극히 파괴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그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Elisabeth Bachofen-Echt, 1914, oil on canvas, present location unknown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1907/Oil and gold on canvas
138 x 138 cm/Austrian Gallery, Vienna
Portrait of Emilie Floge/1902/Oil on canvas/71 1/4 x 26 1/8 in. (181 x 66.5 cm)/Historisches Museum der Stadt Wien, Vienna
클림트에 있어 여성은 일종의 구원 같은 것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한 여인에게 안주하지 못하고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유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많은 여성들을 만납니다. 클림트의 작품세계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으로는 미치 침머만, 에밀 플로게,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가 있습니다. 미치 침머만은 희망이라는 그림에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평생을 동반자로 함께 했던 에밀 플로게는 클림트가 죽는 순간까지 찾았던 사람입니다. 또한 클림트의 많은 작품에 주인공이 되었고, 클림트는 그녀의 사진을 찍는 것도 즐겨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으며 상호간의 정신적 지주로서 항상 곁에 머물렀고 관계의 선을 절대로 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달콤한 사랑의 말도 오가지 않았으며 때론 사업의 동반자로서 때론 여행의 동지로서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여느 에로틱한 작품과는 다르게 이 작품에서 에밀 플로게의 모습은 다소 정숙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부유한 금융인의 딸로서 매우 매혹적인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위의 그림만을 보아도 그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클림트를 위해서 기꺼이 누드모델을 서줄만큼 그를 신봉했으며 꽤 오랜동안 육체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디트'와 '키스'를 탄생시킨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의학 – 히게이아 (1907)
오스트리아 교육부의 주도로 제작된 빈 대학의 천장화 시리즈는 의학, 철학, 신학, 법학이었고, 클림트는 신학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그렸습니다. “의학”의 부분그림인 이 작품은 에로틱한 복수의 여신 “헤게이아”입니다. 이 여신 위에는 죽음의 신이 많은 여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듯 서 있습니다. 그 때문에 생명을 살리는 의학을 무시했다는 의료진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기도 했던 작품입니다.

학부회화 중 철학 최종판 1907
사회적으로 가장 많은 비판과 논쟁을 불러일으켰 던 작품입니다. 처음의 제작의도는 철학, 의학, 법률로 표상되는 이성의 힘과 그로인한 세계의 눈부신 발전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죠. 그러나 클림트는, 불안과 고통에 찬 얼굴로 반목하고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함으로서 기득권층에게 큰 충격을 던져줍니다. 또한 신학계에선 등장인물을 누드로 표현하고 만삭의 임산부까지 등장시켰다하여 거센 비판을 가합니다. 사업의 동반자, 혹은 친구들이나 동료화가마저도 등을 돌려버립니다 클림트는 이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서 국가로부터 받은 제작비 전액을 돌려주고 자신의 소유로 삼아 버립니다.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억압하고 제한하는 힘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사였던 겁니다. 이로서 그는 사회 기득권층과 영원한 결별을 선언하게 되고 이는 초기의 고전적인 화풍에서 벗어나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화풍을 추구하는 계기가 됩니다. 불행하게도 이 작품은 2차대전중에 나찌의 손에 불살라짐으로서 대중들에게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법학 1903~1907 캔버스 유채 430×300cm 1945년 1945년 임멘도르프 성의 화재로 소실

붉은 물고기들
이 몽환적이고 도발적인 자세들은 위에서 언급한 논쟁에 대해 클림트가 보여준 일종의 대응, 혹은 대답차원으로 간주되는 작품입니다. 그는 이 그림의 제목을 < 나의 비방자들에게 >라고 지으려 했다가 가까스로 억눌러 참았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Beethoven Frieze/Central narrow wall (detail): Unchastity, Lust and Gluttony/1902/Casein paint on plaster/220 cm high/Austrian Gallery, Vienna
적대적 힘이라는 소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예술가인 베토벤을 신처럼 숭배하고자 제작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신전, 조각상, 회화, 부조 등이 제작되었고 대부분 성서나 신화 속에서 그 주제를 차용했습니다.
클림트는 옷을 갈아 입으려 하다가 뇌일혈 발작으로 오른쪽 반신이 불수가 됩니다. 그의 부친도, 그의 동생도 뇌일혈로 사망하였으므로, 클림트는 늘 자신도 그같이 될까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소원은 '60세까지는 살고 싶다'였다고 하는 군요. 하지만 그는 뇌일혈이 아닌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합니다. 56세였죠.
실레는 클림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비엔나종합병원의 해부병리학과 지하실에서 그의 사체를 화폭에 담았는데, 클림트의 저주였을까요. 실레 역시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