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이나 연착을 해!" 첫 번째 친위 대원이 씩씩대더니, 내 갈비뼈 끝에 대고 있던 총구를 더 깊이 쑤셔 넣었다. 지금 엄습해 오는 느낌은 지난 3개월 전 죽으려고 시도했던 그때와는 달랐다. 그날 저녁, 차표를 사려고 고개 숙여 매표소 안을 들여다보니 빨강 머리 여직원이 앉아 있었다. "차표 한장 주세요." 여직원이 나를 알아보고 말했다. - P42
그때 대위의 눈길이 자기처럼 흉터가 있는 내 손목에 멈줬다. 손잡이를 잡은 팔의 옷소매가 흘러 내려와 있었다. 대위는 무슨 책이라도 읽듯이 내 흉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벌써 더 많은 걸 눈치챘거나, 아니면 모든 걸 다른 관점에서 보고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눈이 돌멩이 두 조각 같았다. 이제 기관차 사람들 모두가 내 손목을 보고 있었다. 대위가 들고 있던 작은 채찍으로 내 다른 쪽 옷소매를 들어 올려, 그쪽 흉터도 봤다. "동지!" 대위가 부르며 신호를 보내자, 엄중히 감시받는 병력수송 열차가 속도를 줄였다. 나를 겨누던 두 개의 총구가 치워졌다. 이제 나는 잘생긴 친위 대원 두 명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아래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격자형 강철 바닥이 기관차가 선로를 따라 달려가는 대로 흔들렸다. 대위가 말했다. "가라!" "고맙습니다." - P46
우리 바로 옆집에 살던 카라스코바부인은 일찍이 1940년에 독일군에게 잡혀갔다가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풀려났다. 그녀는 4년 내내 페치카르나에 있는 나치 사령부에 감금되어 있있다. 그곳에서 한 일은 사형 집행이 끝나면 바닥에 고인 피를 닦는 일이었다. 4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피를 닦았다. 그곳 최고 집행관은 그녀를 잘 대해주었다. 가끔 훈제 햄을 갖다주면서 <매혹적인 검은 눈의 아가씨여, 왜 울고 있나요?>라는 노래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고, 항상 ‘제발, 부탁해요! 미안하지만‘이라는 말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난데없이 그녀를 풀어주었고, 사과한다는 내용의 공식 서한까지 보냈다. 하지만 이미 카라스코바 부인은 그동안에 겪었던 일로 정신이 온전하지않았다. 독일 노동청은 그녀에게 기관차고에 일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곳에서 그녀가 하는 일은 기름통을 들고 기관차 베어링에 기름질하는 것이었다. - P48
나는 다시 승강장으로 나가 전선에서 오는 병원 열차에 통과 신호를 보냈다. 병원으로 개조된 특급 차량 열차였다. 이병원 열차를 보면서 뭔가 아주 낯설다고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눈빛, 바로 부상병들의 눈빛이었다. 전선에서 경험한 고통, 자신들이 받았고 또 자신들 역시 남에게 주었을 그 고통이 이들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나 보다. 나는 반대 방향으로 가던 독일 병사들보다 이 독일 부상병들에게 좀 더 마음이 갔다. 이들 모두 단조롭기만 한 시골 풍경을 어린아이처럼 열심히 창문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 P76
그는 승강장으로 나가 손짓으로 궤도차를 불렀다. 즈테니치카도 궤도차에 올라 운수국장 옆에 앉았다. 나는 궤도차를 신고한 다음 출발 신호를 보냈다. 그때 조사관 제드니체크가말했다. "체코인들이 어떤 인간인지들 아나? 실실 웃어대는 징글징글한 족속이야!" 궤도차가 5번 선로에 서 있는 폭격 맞은 기차 옆을 지나 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조사관 제드니체크는 부서진 열차지붕과 기관단총에 뚫린 구멍들을 노려보았다. 역장은 2층으로 올라가 소리를 지르며 의자를 바닥에 쾅, 쾅 내리쳤다. 1층역무실 천장에서 석회 가루가 떨어졌다. 그러더니 부엌 환기통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 P78
길고 긴 구름이 달을 스쳐 지나갔다.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멀리서 차광유리를 댄 기관차 불빛이 보였다. 달이 미끄러지듯이 눈구름을 헤치고 나오자 차가운 밤에 눈 덮인 들판이 빛났다. 얼어붙은 눈의 입자 하나하나에 무지갯빛 시계 초침이 달린 듯, 사방에서 째깍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신호기 기둥을 기어올랐다. 다시 구름이 달을 가렸고, 하루살이가 날듯 가볍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신호등을 타고 앉았다. 기관차가 역으로 들어오며 요란스럽게 기적을 울렸다. 진입 신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신호기 가로대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내 손도같이 올라갔다. 신호등이 빨강에서 초록으로 바뀌었다. 진입위치에 가 있는 신호기 가로대는 나를 숨겨주기에 충분했다. 나보다 컸다. - P116
나는 의식을 잃어버리기 직전, 그 마지막 순간까지 죽은 병사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듣지도 못하는 그의 귀에 대고, 특급 우편 열차장이 드레스덴에서 싣고 왔던 비참한 독일인들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집구석에 궁둥이 붙이고 얌전히 앉아 있었어야지!"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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