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는 초야권(初夜權)을 누렸는데, 15세기 초까지 심지어 신부와사제, 그리고 주교도 마찬가지로 그 권리를 행사했다. 그들은 소녀들에 대한 권리를 가졌으며, 이를 이용해서 미혼모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망나니권 (le droit de havée), 9 판매권, 측량권, 영지 매매권 등을행사해서 영지에서 거래되는 모든 것의 일부분을 그들이 취했다. 잔재권 (Le droit des Epaves) 으로 모든 유기 가축을 차지했고, 그들의 땅을지나는 통로와 강에 대한 통행세, 겨울에 불을 지피는 농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인 호별세 (le droit de fouage), 임의 몰수권, 사냥 및 어업세,
기타 잡세 및 인두세, 재미를 위한 농지 유린권을 행사했고, 무역을가로막는 외국인 재산 몰수권 및 파선권(破船權) 등을 가졌다. - P13

백성은 죽기 전에 사제의 재산을 늘려주려 하지 않으면 교회 축성지에 묻힐 수 없었다. 혼례를 치르지 않고, 사제에게 결혼 음식을 바치지 않으면 결혼할 수 없었다. 엄청난 특권을 가진 성직자는 십일조를 정확히 납부하지 않는 사람, 교구를 위해 유산을 남기지 않은 사람, 그리고 수도사가 자식을 출가시키라는 명령을 전할 때 따르지 않는 사람을 파문할 수 있는 권리도 행사했다.
가문의 장자가 아닌 사람들은 장자권(長子權) 때문에 어려움에 처했다. 성관(城館)은 종종 강도들의 소굴이었다. 루이 성왕 시대에,
행인을 더 이상 강탈하지 않고 위조화폐를 더 이상 발행하지 않기로했던 영주들은 모두 이전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토지 예속 농노들은 불행을 타고 태어난 초가집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법도, 치안도, 사법도, 풍습도 없어 프랑스에는 온통 강도짓과 미신, 광신,
특권 그리고 불행이 가득했다. - P14

평민들은 잔인한 형벌에 시달리는 데에 반해 특권을 가진 영주들과 성직자들은 이런 형벌과는 무관했다. 이들은 교회 규범에 정해진 처벌만 받고, 사제들에 의해서만 재판받았다.
이런 사실은 이 혐오스러운 시대의 실상을 잘 말해 준다. 재판받는 죄인은 이 세상에서는 화형에 처하고, 저세상에서는 영벌(罰)에처해졌다. 1397 년이 되어서야 이런 가혹한 일을 없애고, 죄수에게도 성례를 허락했다.
종교 축일에도 잔인한 풍습이 느껴진다. 성 요한 축일의 환희의 불은 40마리 정도의 고양이를 불태워 죽이지 않으면 꺼지지 않았다.
14세기 초에도 여전히 성직(聖職) 취득 헌납금(取得 獻納金)이 정착되고, 대사(50년 동안 성지순례로 로마의 성 베드로와 성 바울 성당을 15번 방문한 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가 제도화되었다. 이 세기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사제의 동거를 진지하게 반대했다. 당시 여자들이 남자 수도원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고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기에 북쪽 지방에서 비밀재판이 전례 없이 많이 행해져, 생쥐와 벌레조차도 파문되었다. 이런 파문은 이후 세기 그리고 심지어 우리가 사는 세기(1820년)에도 반복되었다.
1314년 2월 2일 발루아 백작령 의회는 뿔질로 사람을 죽인 황소를 교수형에 처하는 재판관들의 판결을 확정했다. 1444년까지 여전히 광인(狂人) 축제 그리고 비슷한 수많은 광란의 축제가 열려 당나귀와 창녀들이 사제 제의를 입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 찬양을 받았다. - P26

영주가 우리의 재판을 시작하려는 순간, 하인이 와서 이르기를 영주의 봉신으로서 그에게 복종하는 이웃 봉토의 후계자가 저택 대문에 와있으며, 주군인 그에게 예의를 갖추고자 한다고 알려왔다. 관례에 따라 그를 즉시 맞아들였다. 그리고 우리를 영주의 무장 사병들과 함께 안마당 구석에 서도록 하고, 저택의 모든 하인들도 불러모았다. 또한 부역에 가지 않은 모든 농노들을 동원했다. 영주로서는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식을 치르는 것이 권위를 높이는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봉신으로서는 가능하다면 주군 혼자만 만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는데도 말이다.
모든 준비가 갖춰지자, 봉신이 입장했다. 그는 자기 영지에서 하던대로 붉고 흰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같은 색의 모자를 쓰고 있어 오른쪽 절반은 흰색이고 왼쪽 절반은 붉은색이었다. 목에는 노루 뿔을 매단 새끼줄을 두르고 두 다리 사이에는 말 탄 듯 장대를 끼우고 있었다.
남자는 영주에게 다가가면서 양손으로 장대 두 끝을 잡고, 커다란호박을 머리에 인 채였는데, 호박은 만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의봉토 출신 여자 4명이 염소젖이 든 항아리를 갖고 그의 뒤를 따랐다. - P42

나는 이 행렬과 광경을 놀란 눈으로 보고 아버지와 형들에게 종종 이이야기를 꺼내었으며, 아직도 그 기억이 머릿속에 가득 남아 있다.
봉신은 영주 앞에 이르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떨어뜨리지 않고 머리에 이고 있던 호박을 장대 끝을 잡고 있던 손의 손가락으로 지탱할 수 있었다. 동시에 영주가 그에게 물었다.
봉신, 무엇을 바라는가?"
봉신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호박을 두 손으로 잡아 자기 앞에 놓고금으로 된 작은 십자가를 그 위에 놓으며 대답했다.
"전하, 전하의 어진 봉신이었던 제 부친의 별세로 비천하나마 소생이 전하의 봉신이 되고자 합니다. 여기 와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전하가 나의 주군 되심을 아뢰고, 내가 가진 모든 것과 갖게 될 모든 것은전하의 허락을 받아야만 나에게 속한다는 것을 고하며, 이 빛나는 황금 십자가와 하늘, 땅, 기품, 성(聖) 게오르기우스의 장검, 나의 생명 그리고 이 성스러운 채소의 이름으로 전하의 충직한 봉신이 될 것입니다. 또한 전하를 위하여 모든 정성과 거느린 사람들의 몸과 목숨그리고 재산을 사용할 것이며, 내게 할당된 전하의 따님 결혼 지참금을 지불할 것이며, 포로가 된 전하 아드님의 몸값을 갚는 데 기여할것이며, 필요할 경우 전하를 위한 인질이 될 것이며, 저에게 부과하는 과금과 세금 납부를 이행할 것을 맹세합니다. 상반된 생각을 갖는다면 나는 배반자요, 저속한 자이며 극형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함을 언명합니다."
영주가 크게 소리쳤다.
"배반자, 저속한 자, 극형!" - P43

그러자 모인 농노들도 큰 소리로 따라 했다.
"배반자, 저속한 자, 극형!"
이 말이 끝나자 봉신은 주먹으로 호박을 내리쳤고 호박이 깨지며그 속에서 자고새 1마리가 나왔다. 자고새는 날지 못하도록 날개 끝이 잘린 채였다. 영주가 양쪽에 거느리고 있던 개 2마리가 자고새에달려들었고, 그러는 사이 영주는 봉신의 장대를 낚아채고 역시 봉신에게 달려들었다.
잠시 후, 개 1마리가 자고새를 잡았으나, 영주는 봉신을 잡지 못하니 봉신이 멈추었다. 이제 영주도 멈춰 서서 개가 물고 있던 자고새를빼앗아 봉신에게 저녁 식사용으로 주었다. 만약 개가 먹이를 잡기 전에 영주가 봉신을 잡았다면, 자고새는 그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자고새를 받은 봉신은 영주에게 동전 3개를 바치고 물러났다. 그러자 영주는 처녀 4명이 가져온 항아리에 든 염소젖으로 얼굴과 손발을 씻었다.
비록 영주들에게는 신성한 것이지만 어리석은 이 의식, 법과 같은힘을 지닌 이 우습고 역겨운 관습을 눈으로 보고 있노라니 인간 정신의 보잘것없음에 한숨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인간이란 사방의 비천한 것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스스로 대단해진다고 생각하고, 그가 지배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천하게 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비천해질 뿐이다.
봉신이 물러나자, 영주는 오른쪽에 재판관, 왼쪽에는 집행관을 거느리고 높은 자리에 앉았다. 그는 우리 모두를 자기 앞에 오도록 하고, 성전기사에게 그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자기 영지의 농노가 되는 데에 동의하는지 물었다. - P44

낯선 남자는 자신이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말할 수 없지만 로렌 지방에 있는 가족에게 간다고 대답하면서, 자신은 귀족 신분이기 때문에 자신을 종살이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영주가 되물었다.
"자네가 귀족이라는 것을 누가 내게 증명할 수 있을 텐가? 도대체언제부터 프랑스 귀족이 자신의 땅을 벗어나 홀몸으로 다니는가? 자네가 영주라면 거느리는 집행관과 무사, 사냥매와 개를 데리고 다닐것이다. 자네 가문의 기(旗) 나 기장(章)을 보여라."
"나의 모든 귀족 표시 가운데 남은 것은 내가 가진 장검뿐이오."
외삼촌의 주인이 대답했다.
"네 손에 가진 장검 하나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 농노가 되든지 아니면 네가 누군지 떳떳하게 신분을 밝혀라."
"내가 누군지 알 필요 없소.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을 것이오. 당신들이 감히 나를 붙잡을 수 있는지 두고 보시오!"
이 말과 함께 성전기사와 그의 좋은 손에 칼을 들고 밖으로 도망쳐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저택의 도개교가 올려지고, 그들뒤에 사나운 개 6마리와 무사들을 풀었다. 저항은 오래가지 않았다.
긴 미늘창으로 무장한 영주의 무사들은 두 남자의 장검을 상대했다.
장점은 미늘창을 휘두르는 사병들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이런 싸움을 위해 훈련된 개들과 무사들은 힘을 모아 두 낯선 남자에게 여기저기상처를 입힌 다음 큰 어려움 없이 칼을 땅에 내려놓도록 만들었다.
무사들은 두 남자를 포승줄로 꽁꽁 묶어 재판대로 다시 데려갔다. - P45

"고문을 준비하도록, 이들을 반역자 취급해서 처단해야 해. 그러기전에,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야겠어."
영주가 말했다.
먼저 성전기사를 취조했다. 그는 불굴의 용기로 취조를 견디면서한마디도 실토하지 않았다.
영주의 하수인들은 그에게서 아무런 수확도 얻어내지 못해 실망한나머지, 불행한 내 외삼촌에게 같은 방법의 고문을 가했다. 외삼촌도이를 악물고 주인을 따라 했다. 하지만 초주검이 되어 힘이 바닥난 상태에서 파문당한 성전기사를 모시고 있다고 털어놓고 말았다.
"아! 맙소사!"
성전기사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뭐라고! 성전기사였다고?"
영주가 말했다.
"그가 죽었다니 안타깝다. 저놈을 산 채로 프랑스 국왕 앞에 끌고 간다면, 왕의 환심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저놈 시체를 소금에 절이도록. 궁정에 가져가도록 하지. 저 시체를 갖고도 챙길 몫이 있을것이다."
그러는 사이, 영주는 판결을 내려 나의 외삼촌은 파문당한 자를 모셨다는 죄로, 나의 어머니는 그를 집으로 맞아들였다는 죄로 교수대에 매달려 죽도록 했고, 이 날벼락 같은 명령은 당장 실행에 옮겨졌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우리 네 아들에게는 평생 발목에 쇠고랑을차고 다니며, 죽을 때까지 가장 고된 종살이를 하면서 고통 속에 죽어가도록 했다. - P46

앞에서 말했듯이 그 당시 나는 4살이었다. 사람들은 내 나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 아버지, 형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무거운 쇠고랑을 채웠고, 땅 파는 일을 시켰다.
3년의 세월이 끊임없는 고통과 땀 그리고 가난 속에서 지나갔다.
참으로 끔찍하게 죽음에 던져진 어머니를 밤낮으로 애도하던 나의 아버지는 헤어날 수 없는 절망 속에 빠졌다. 그나마 목숨을 부지했던 것은 우리를 지키려는 마음 때문이었으며, 자살하는 사람은 영원히 지옥 불에 떨어진다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했다.
마침내 어느 날, 우리가 쇠고랑을 차고 살도록 만든 영주는 가까운숲에 사냥놀이를 가고 그의 재판관은 십일조와 봉건세를 내지 못하는불쌍한 사람들에게 판결을 내려 처벌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와함께 무척 힘든 부역을 하는 중이었는데, 맏형인 가스파르가 우리를불렀다. 그에게 다가가니 더위와 피곤으로 기진맥진한 아버지는 흙먼지 위에 몸을 뻗어 누운 채였다. 형 가스파르는 그때 14살이었고총명한 소년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도망을 가자고 제안했다.
"저런! 얘들아, 우리가 어디로 간단 말이냐?"
아버지가 말을 가로챘다.
"어딜 가나 여기서와 같은 취급을 당할 거야. 세상 사람들은 온통주인과 종이야. 힘 약한 사람은 힘센 사람의 노예가 되기 마련이란다. 하느님도 그것을 원하신단다. 사제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말이다." - P47

폭군들이 멀어지자, 우리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나는 더 이상 몸을가눌 수 없었고, 아버지는 나를 등에 업었다. 여전히 걸어야만 했기때문이다. 통행세를 내면서 강을 건너고, 배를 타고 길을 걷고, 다리를 건넜다. 다음 날 저녁이 되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가진 돈이 없는상태였다. 하루하고 반나절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통행세를 11번이나바쳤다.
우리가 떠나온 영지에서 약 7~8리의 정도 떨어져 있는 외브쿠르(Heubecourt) 4 땅에 도착한 때였다. 우리는 입구를 통과하기 위해 우리의 폭군 영주의 기장을 보여 주어야 했는데, 그 문장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는 문장을 증거로 내밀며 교회 일을 위해 왔다는 핑계를 댔지만 소용없었다. 돈을 내야만 했다. 우리에게 더 이상 가진 돈이 없었기 때문에, 문을 지키던 사람들은 우리를 외브쿠르 영주의 농노라고 선언했다. 세금을 내지 않고 영지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과 물건의 소유권을 영주에게 허락하는 외지인 소유재산 몰수권을 내세운 것이다. - P50

내 아버지와 형들이 영주의 번영과 오귀스탱 신부의 행복을 환호하며 벌어 주는 것을 보니 돈 많은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행복해질수 있고 원하기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조그만 선행을 베풀기만 해도 사방에서 좋아하기 때문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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