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마·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1862~1944)추상화의 선구자였지만 오랫동안 오판되고 은폐됐던 여성 화가. 201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블록버스터 전시 <추상의 발명, 1910~1925>에도 아프 클린트는 포함되지 않았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돈 한푼 없이 오직 작품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독창적인 작품은 100년 만에 재평가되면서 미술계를 뒤흔들고 있다. 만약 루돌프 슈타이너가 아프 클린트 작품의 가치를 알아봤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그녀는 ‘추상미술의어머니‘로 미술사에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 P17

마리드니즈 빌레르(Marie-Denise Villers, 1774~1821)
뛰어났으나 쉽게 잊혔던 위대한 여성 화가의 전형이 그림에 대해서는 "지금껏 여성이 그린 가장 위대한 그림‘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이 또한 여성 화가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담은 평가일 것이다. 빌레르는 1799년부터 1802년까지 파리 살롱전에 지속적으로 출품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그림은 1814년에 완성한 것이고, 1821년 47세로 사망할 때까지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생애 마지막 7년 동안 빌레르는 전혀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설령 그렸다 해도 쉽게 손실되었거나 다른 남성 화가의작품으로 오인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그림도 작가의 이름이 알려지기까지 194년이나 걸렸으니 말이다. - P25

카를 슈피츠베크(Carl Spitzweg, 1808~85)
위트 있는 풍자로 독재자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화가 슈피츠베크의 그림은 너무 인기가 많아 갖고 싶어하는 수집가들이 많았다. 공급은 한정되어 있는데 수요가 많다보니 위작이 많이 제작되었다. 1930년대 후반에만 54점의 그림이 독일에서 위조되었다. 토니라는 이름을 가진 복제화가가 그린 것으로 그는 ‘슈피츠베크 이후‘라고 서명했지만, 나중에 사기범들이 서명을 삭제한 뒤 인위적으로 그림을 숙성시켜 진본으로 판매했다. 이후 체포된 사기범일당들은 법원에서 사기죄로 최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 P41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1471~1528)이름 앞에 ‘최초‘라는 수식어가 가장 많이 붙는 화가 뒤러는 독일에서 발달한 인쇄술을 순수미술에 도입해 복제예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화가다. 이뿐만 아니라 최초의 자화상과 최초의 누드 자화상을 그린 화가였고, 장인이기보다는 지식인이길 원했던 최초의미술가이자, 미술에 이론적 접근을 시도한 최초의 화가였다. 이렇게 그는 미술사에 최초로이룬 것이 가장 많은 시대를 앞선 예술가이다. - P45

음악이 소리의 시인 것처럼, 그림도 시각의 시이다.
주제는 소리나 색의 조화와 아무 관련이 없다.


_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 P47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
19세기 말 유럽에서 가장 유명세를 탄 미국인 화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했던 그는 주제보다 선과 구도, 색채의 배열을 중요시했다. 작품 제목에도 ‘조화‘ ‘배열‘ ‘교향곡 ‘야상곡‘ ‘변주곡‘ 등 미술과 무관하며 오히려 음악과 관련된 이름을 붙였다. 자유로운 보헤미안의 삶을 누린 휘슬러는 생전에 작품을 많이 팔진 못했지만, 평생 아들을 물심양면으로 보살펴준 어머니 덕에 화가로 성공할 수 있었다. 휘슬러는 화가와 평론가 사이에 벌어진 가장 유명한 재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877년 전시에 출품한 자신의 그림에 존 러스킨이 악평을 쏟아내자 그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오랜 논쟁 끝에 휘슬러가 승소했지만 그가 받은 손해배상액은 단돈 1파딩이었고, 막대한 변호사 비용으로 인해 파산했다. 화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전 재산을 걸었던 것이다. - P49

미카엘리나 바우티르(Michaelina Wautier, 1617~89)
믿을 수 없을 만큼 용감했던 화가, 평생 30점 정도의 그림을 남겼고, 그중 넉 점은 판매까지 성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바우티르는 신화나 역사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능력, 화가로서의 자의식, 해부학적 지식, 뛰어난 표현력, 자신감과 용기를 가졌던 위대한 화가였고 더 일찍 재조명되었어야 했다. 다행히도 최근 들어 전시와 연구를 통한 바우티르작품에 대한 재발견과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벨기에 여성 미술사학자 카틀레이너 데스티헬렌의 공이 크다. 오랫동안 반다이크의 그림으로 알려졌던 바쿠스의 승리를 1993년 바우티르의 그림으로 밝혀낸 이도 스티헬렌이었다. 스티헬렌은 2018년에 남동생 샤를 바우티르의 작품으로 알려졌던 그가 원하는 모든 이 Every-one His Fancy (c. 1655)도 미카엘리나 바우티르의 작품임을 밝혀냈다. - P53

알베르트 에델펠트(Albert Edelfelt, 1854~1905)
국제 미술계에 핀란드 화가의 존재감을 드러낸 첫 화가. 에델펠트는 아름다운 핀란드의 자연과  일상을 사실적으로 담은 그림을 통해 핀란드 미술과 문화를 해외에 알리려고 평생 노력했다. 한여름 바닷가에서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핀란드인의 일상과 조국 독립의 소망까지 드러낸 이 그림도 마찬가지다. 이 그림이 그려진 지 33년 후, 핀란드는 비로소 독립할 수 있었다. - P79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 1887~1914)요절한 다작의 화가. 마케는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독일 표현주의의 기수로 인정받았다.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후 본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지금도 본에 가면 그가 살았던 집을 개조한 미술관인 ‘아우구스트 마케의 집August Macke Haus‘이 있다. 이곳에서 사는 3년 동안 마케는 무려 400점이 넘는 회화를 완성했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에 버금가는 다작이 아닐 수 없다. 젊은 나이에 요절했음에도 그의 작품을 유럽 곳곳의 미술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14년은 벨 에포크의 마지막 해이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다. 마케는 이 그림--모자 가게 앞 양산 쓴 여인--을 끝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집 명령을 받고 입대했다가 한 달 만에 전선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27세였다. 전쟁은 전도유망한 젊은 화가의 생명을 잔인하게 앗아가버렸다. - P83

페리 커샷(Mary Cassatt, 1844~1926)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열린 총 여덟 번의 인상주의 전시회에는 약 55명의 미술가가 참여했는데, 그중 여성 화가는 단 세 명이었다. 유일한 미국 여성이었던 커샛은 4회 전시부터 참여했다. 20대에 살롱전에 입상한 실력파였지만 멘토이자 동료 화가였던 드가의 초대로 인상주의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다른 여성 화가들처럼 모성애나 여성들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 그림을 주로 그렸지만 50세에는 시카고의 여성빌딩 내에 가로 18미터가 넘는 대형 벽화를 의뢰받아 제작했다. 스스로 수확한 지식과 과학의 열매를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여성들을 주제로 그린 거대한 벽화가 그녀의 페미니즘적 시각을 잘 대변한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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