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싶었기 때문이다. 첫페이지부터 계속해서 반과거 시제를 쓴 이유는,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예전의 기다림이나 전화벨소리, 만남을 대신하고 있는 나의 고통을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 P52

(지금도 첫 페이지를 다시 읽으면 그 사람이 내 집에 머무는 동안 입고 있다가 떠날 때 벗어놓은 목욕 가운을 바라보고 만지면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고통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글은 나에게, 그리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항상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내게만 의미가 있었던 목욕 가운은 언젠가는 나에게조차 아무 소용이 없어져 헌옷 더미 속으로 던져지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쓰다보니목욕 가운을 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P53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서서히 스러지기 시작한다. 살아 있는 텍스트였던 그것들은 결국은 찌꺼기와 작은 흔적들이 되어버릴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겠지.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람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갈망했던 지난해 봄 그 사람을 떠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람에게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글에는 자신이 남겨놓고자 하는 것만 남는 법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고통을 연장시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내가 글을 써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한 그런 건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그 필요성의 극에 다다른 지금, 써놓은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하다. 열정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갈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감정들이다. 그것은 출판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세인들의
‘정상적인 가치 기준과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글은 자서전입니까?" 하는 유의 질문에 대답해야만 하고,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다는 식으로 억지로 정당화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 P59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 P66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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