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해설
최초의 민중 소설 - 노동자의 언어로 전하는노동자의 이야기


1. 에밀 졸라에밀 졸라Emile Zola(1840~1902)와 관련하여 문학적 사실 외에 늘 특징적으로 언급되는 전기적 사실은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죽었다는 것, 토목 기사인 아버지의 사업 관계로 세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유소년기를 남프랑스의 중소 도시 엑상프로방스에서 보냈다는 것, 이 시기에 미래의 위대한 화가 폴 세잔과 죽마지우가 되었다는 것,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지만 아버지가 이탈리아인이었기에 스물두 살 때인 1862년 프랑스로 귀화했다는 것, 드레퓌스 사건(1894~1906) 때 진실과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했다는 것 등이다. 특히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라는 명제로 요약되는 프랑스 사회의 지적 전통을 마련한 직접적 계기가 된 드레퓌스 사건에서 졸라가 보여 준 영웅적이고 양심적인 행동은 그의 전기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일 것이다.
프랑스 문학사에서 일반적으로 졸라의 좌표는 19세기 후반 사실주의를 뒤잇는 자연주의라는 지점에 설정된다.  - P629

프랑스 문화사를 아주 짧게 개관하면서 이 지점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해 보자. 유럽의 경우 고대 문화, 중세 문화, 르네상스 문화까지는 개별 국가의 문화라기보다는 주로 그리스 로마 문화와 기독교 문화에 의해 종합적으로 규정된다. 유럽 각국이 자국의 문화를 본격적으로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중앙 집권화가 일정하게 이루어지고 독립 국가의 윤곽이 뚜렷해지는 17세기에 이르러서이다. 프랑스의 경우 17세기는 코르네유와 라신이 주도한 고전 비극의 시대라고 할 수 있고, 18세기는 볼테르, 디드로, 루소가 이끈 계몽 철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는 인쇄술의 발달로 문학이 황금기를 맞았던 시대로서 바로 이때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파르나스파(派), 상징주의, 데카당스 등 오늘날까지 중요하게 탐구되는 문예 사조가 모두 나왔고, 소위 <세계 문학전집>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위고,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졸라 등이 탄생했다. 알다시피 20세기는 실존주의와 누보로망이라는 흐름이 있었고 프루스트, 지드, 말로, 카뮈, 로브그리예 Alain Robbe-Grillet 등이 활약했지만, 중후반으로 갈수록 사르트르, 레비스트로스, 푸코, 데리다 등 인문학자들이 더욱 돋보였던 시대로 여겨진다. 요컨대 졸라는 자연주의문학의 대표자로서 19세기 종반의 가장 중요한 프랑스 소설가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주의는 사실주의가 극단화한 형태로서 연구자에 따라서는 자연주의를 따로 분류하지 않고 사실주의에 통합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 소설에 초점을 맞출 때에는 양자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옳은 태도일 듯하다. 왜냐하면 졸라, 모파상,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 폴 알렉시 - P630

 Paul Alexis, 앙리 세아르Henry Céard, 레옹 에니크LéonHennique 등 19세기 후반 일군의 작가들이 자연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사실주의 작가들과의 차별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졸라는 사실주의의 골간이 <과학적 방법론의 문학에의 적용〉에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이를 계승하고 심화했는데, 자연주의의 본질은 다름 아닌 <자연 과학적 방법론의 문학에의 적용에 있다. 그가 적용하려 했던 자연 과학적 방법론은 그 당시에새롭게 소개된 <유전론>과 <환경 결정론>으로 요약된다. 소설 속에 한 사회 전체를 재현하여 그 사회를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것, 그것은 발자크 이후 프랑스 소설가들의 꿈이었던바, 졸라는 역사와 과학과 문학의 행복한 결합을 통해 그것을 실현하려 했고, 그 결과물로서 <루공-마카르 LesRougon-Macquart) 총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물론 <루공--마카르> 총서 (1871~1893) 이전과 이후에도 졸라는 소설을 썼지만, 그래도 졸라 문학의 정수가 환경 결정론과 유전론을 횡축과 종축으로 한 <루공---마카르> 총서에 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개별 소설의 제목이 아니라 20권의소설을 총칭하는 <루공-마카르>라는 제목은 아델라이드 푸크라는 여자를 정점으로 하는 한 가족으로부터 유래한다. 아델라이드 푸크는 먼저 루공이라는 농부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으며, 3년 후 남편이 죽자 마카르라는 주정뱅이 밀수업자와 관계하여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는다. 말하자면<루공---마카르>는 아델라이드 푸크의 자손들의 이야기인즉,
적통인 루공 가계는 대개 정상아들로 구성되어 있고, 사생아혈통인 마카르 가계는 대개 비정상적 기질을 가진 아웃사이더들로 구성되어 있다. - P631

유전과 환경의 문제는 <제2제정하의 한가족의 자연적·사회적 역사>라는 <루공----마카르>의 부제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서 <자연적 역사>는 유전의 영향을, <사회적역사는 환경의 영향을 함축한다. 유전과 환경을 날줄과 씨줄로 하여 <루공----마카르>는 쿠데타, 부동산 투기, 은행 증권 조작, 자본 집중 등 제2제정 사회의 온갖 부패상을 그리고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 볼 때 <루공----마카르>는 한마디로 제2제정사회의 타락 백서라고 할 수 있다.
졸라의 소설은 노동자, 여성, 알코올 중독, 살인, 신경증 등사회적 소수자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20세기 후반 푸코의 활약으로 광기와 비정상이 담론의 중심부로 들어선이후 졸라 소설에 대한 연구가 폭증했다. 그러나 이런 위반의 문제 못지않게 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졸라 소설의 본질적인 특징은 돌과 나무로 형성된 건축물이 철과 유리로 형성된건축물로 바뀌는 서구 문명의 이행기를 적실하게 담아냈다는데 있다. 20세기 말에 활성화된 미국 문화 학계의 학제적 연구에서 졸라의 소설이 빈번한 탐구의 대상이 된 것은 이처럼그의 소설이 문화 정보의 풍요로운 보고(寶庫)였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진정한 문학적 참여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증언과 진단에 있으며, 그런 면에서 프랑스 문학사상 단연 돋보이는 작가는 졸라라고 말한 바 있다. 문학의 본질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제기에 있다면, 문학의 본질이 미담을 미담으로, 추문을 추문으로 만드는 데 있다면, 21세기에도 졸라의 소설은 여전히 탐독할 가치가 있다. - P632

2. 목로주점의 안팎

프랑스 제2제정 말기와 제3공화정 초기는 19세기 산업화의최절정기로서 지방의 노동자 농민이 활발하게 파리로 유입되던 시대이며, 특히 파리 북부의 빈민가에서 노동자들의 사회정치적 운동이 고조되던 시대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졸라로 하여금 노동자를 주요 등장인물로 하는 소설을 구상하게 했다. 졸라에 앞서 공쿠르 형제가 제르미니 라세르퇴GerminieLacerteux의 서문에서 문학에의 민중 도입을 주장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새로운 모티프에 대한 호기심의 반영일 뿐이었다. 졸라의 의도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발자크식으로 동시대사회 전체를 그리고자 한 졸라는 노동자의 언어로 노동자의삶을 통째로 이야기하는 소설을 쓰고자 했다. 졸라의 초안은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마디로 민중의 삶을 그 오물, 자포자기의 삶, 상스러운 언어 등과 함께 정확하게 그릴 것>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루공---마카르>의 대표 소설이자프랑스 노동 소설의 백미인 목로주점 L‘Assommoir』이다.
<루공---마카르> 제7권으로서 1877년에 발표된 목로주점은 유전론과 환경 결정론이 적용된 자연주의적인 노동 소설이다. 시조 아델라이드 푸크의 손녀로서 마카르 혈통인 제르베즈는 비정상적 신경증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아 게으름,
섹스, 알코올 등 위반의 쾌감에 쉽게 굴복한다. 더욱이 제르베즈가 사는 파리 북부 빈민가는 이런 유전적 약점을 악화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위생적으로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을 갖고 있다. 요컨대 목로주점은 유전과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한 노동자에 대한 탁월한 임상 보고서이다. - P633

「목로주점」에서 제르베즈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졸라가 <목로주점>이란 제목에 앞서 <제르베즈마카르의 단순한 생활>을 가제로 상정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열세 장으로 이루어진 목로주점은 1850년에서 1869년까지 전개되는 제르베즈의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인데, 제르베즈를 중심으로 볼 때 그 서사 구조는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하나의 건축물을 연상시킨다.
1장에서 6장까지 여섯 장은 제르베즈가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연인에게서 버림받은 후 새로운 연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세탁소 여주인으로 성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7장은 목로주점의 정점이자 제르베즈의 생활의 정점인데, 여기서 그녀의 성공이 온 동네 사람들에게 과시되는 생일잔치 즉 그유명한 거위 요리 파티가 펼쳐진다. 8장에서 13장까지 여섯장은 환경과 유전의 영향으로 제르베즈가 게으름과 알코올중독에 빠져 가게의 파산을 겪고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목로주점》의 서사 구조가 하나의 건축물을 연상시킨다는 것은 이처럼 7장을 정점으로 하여 상승 국면을 담은 전반 여섯 장과 하강 국면을 담은후반 여섯 장이 서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성(性)과 술은 빈자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낙원으로서 주인공을 파멸시키는 두 계기를 이루지만, <목로주점>이라는제목이 시사하듯 이 소설에서 좀 더 근본적인 드라마는 역시 알코올 중독의 드라마이다. <목로주점>을 뜻하는 프랑스어 <assommoir)는 원래 보통 명사로서 짐승을 도살하는 데사용되는 <도살용 몽둥이>라는 뜻과 <불순한 술을 파는 술집 또는 술집 주인>이라는 뜻을 지닌다. - P634

 이를테면 이 소설에서 <I‘Assommoir>라는 제목은 <저급한 술집>과 <도살용이라는 두 가지 뜻을 두루 함축하여 <알코올로 사람을 죽이는 술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거리 이름 <구트도르Goutte-d‘Or> 또한 알코올 중독의드라마와 관련된다. <goutte-d‘or〉는 〈황금 물방울>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다름 아닌 싸구려 증류주를 가리키는데, 소설은 제르베즈가 <황금 물방울>의 제물이 됨과 동시에 막을 내린다.
목로주점은 제2제정 사회의 벽화를 완성하기 위해 우발적으로 급조한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수년에 걸쳐 작가의 머릿속에 있던 작품이며, 경험에서 자양을 얻은 작품이다. 일곱 살 때 토목 기사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졸라는 홀어머니와 수없이 이사를 하며 어렵게 살았고, 특히 파리에 올라온1859년부터 <아세트 Hachette> 출판사에 입사하는 1962년까지는 돈도 연고도 없이 파리 빈민가의 꼭대기 층, 지붕 밑다락방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 그는 하층민들의 풍속에 대해 개괄적 지식을 얻었다. 그리고 《목로주점》의 집필을 위해 직접 노동자 여성들의 사진을 찍었고, 평상복, 작업복 등 의복을 조사했으며, 샤펠 대로, 푸아소니에 가, 구트도르 가 등에서 가게와 건물의 양상, 퇴근 시간 거리의 움직임, 카바레와 싸구려 댄스홀의 장식 등을 유심히 관찰했다. 졸라의 말대로「목로주점」에서 노동자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면, 그것은 바로 이 체험과 현장 조사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목로주점」에 드리워진 진짜 <민중의 냄새>,
그 냄새의 바탕은 뭐니 뭐니 해도 민중의 언어에 있다.
- P635

3. 목로주점」의 언어의 현대성

졸라는 서문에서 목로주점을 일컬어 <민중의 냄새가 나는 최초의 민중 소설>이라고 했다. 물론 졸라 이전의 소설에서도, 예컨대 발자크, 위고, 상드, 플로베르의 소설에서도 노동자가 등장했고, 노동자의 비극이 그려졌다. 그러나 그 언어는 여전히 작가의 언어요. 전통적인 문학 언어였다. 목로주점은 서술자와 등장인물이 모두 민중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최초의 소설이다. 당시에 민중언어의 사용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목로주점에 대한 공격도 찬사도 모두 민중 언어의 노골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서문에서 졸라가 안타까워한 것 또한 문학에서 민중 언어가 가지는 전환기적 가치의무시였다.
나의 죄는 민중의 언어를 모아서 그것을 무척 공들여 만든 거푸집에 붓는 문학적 호기심을 가졌다는 데 있다. 아!
형식, 거기에 대죄가 있다니! (서문 중에서)

「목로주점에서 사용된 노동자의 은어나 민중적 표현을알기 위해 졸라가 주로 의지한 책은 알프레드 델보AlfredDelvau의 가공하지 않은 언어 사전 Dictionnaire de la langueverte』과 드니 풀로 Denis Poulot의 숭고미 또는 1870년 노동자의 현실태와 가능태Le Sublime, ou Le travailleur comme ilest en 1870 et ce qu‘il peutetres였다. 이 책들에서 그는 <장화,
<불고기 병정>, <술고래> 등 민중의 별명, <기침하는 졸병〉,
<코흘리개 꼬마>, <광기의 그랑 살롱> 등 술집 이름, 다량의 민중적 어휘와 표현, 파리 노동자 은어로 된 술집에서의 대화 등을 빌려 왔다. - P636

목로주점은 별명, 조롱, 욕설 등 가공하지 않은 노골적 언어가 어떻게 집단 내의 결속과 다른 집단과의차별화를 야기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시인 말라르메는 목로주점의 민중 언어를 졸라가 문학에 부여한 절대적 참신성이라고 격찬한 바 있다. 목로주점」이 보여 준 언어의 현대성은민중 언어의 사용뿐만이 아니라 <자유 간접 화법 style indirectlibre>의 사용에서도 드러나는데, 자유 간접 화법이란 서술자의 목소리와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결합한 형태를 일컫는다.
예컨대 목로주점 7장에 나오는 제르베즈의 생일 파티 장면을 보자.

술잔은 단숨에 비워졌고, 마치 폭우가 쏟아지는 날 빗물이 홈통을 따라 내려가듯 술이 목구멍을 따라 콸콸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포도주의 비야 이건 어라! 처음엔 낡은 술통맛이 나더니 자꾸 마시니까 고소한 개암 냄새가 나네. 와! 빌어먹을! 예수회 수도사들이 탓해 봐야 소용없어,
어쨌거나 포도즙은 정말 멋진 발명품이야! 좌중이 웃으며옳소! 하고 외쳤다. (307)

술의 향연에 대한 서술자의 서술이지만, 보다시피 어투는노동자의 어투 그대로이다. 졸라의 자유 간접화법은 이처럼 서술자가 자신의 의식과 언어에 노동자 집단의 의식과 언어를 실어 한꺼번에 전달하는 말의 경제를 실현함으로써, 달리 말해 발언자의 복수성을 구현함으로써 텍스트의 울림을더 풍요롭게 한다. 비평가 자크 뒤부아Jacques Dubois가  - P637

《목로주점》의 서술을 서술자의 독창이 아니라 <민중의 합창>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소설의 서문이 보여주듯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은 욕설 은어, 상투어 등을 그대로옮겨 놓은 목로주점의 언어의 자연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민중의 어휘를 소설에 활용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민중의 어휘와 통사 구조로 서술을 하는, 즉 독자의 목소리로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언어의 실험은 졸라의 작품 세계에서도 독특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념비적 시도였다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 시각이다.


4. 「목로주점」에 대한 평가

《목로주점》은  졸라의 이름을 문단에 확고히 각인시키고 그를 명실상부한 자연주의 유파의 수장으로 만들어 준 출세작이다. 그러나 출간 당시에는 찬사보다 비난이 월등히 우세한 문제작이었다. 1876년 4월 13일 <파리 풍속 연구Etude demæurs parisiennes)라는 부제와 함께 급진 공화파 신문비엥 퓌블럭Le Bien Public에 호가 연재되자 즉각 보수과 논객들의 공격이 쏟아졌다. 민중의 참상을 담았다고 하여졸라는 <문학적 코뮌의 두목>이라고 공격당했고, 목로주점]은 <책상 위에 굴러다니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할 책>으로 규정되었다. 「르비엥 퓌블릭」은 가장 대담한 부분의 삭제를단행했지만 결국 6장까지 연재한 후 연재를 중단했고, 「라 레퓌블릭 데 레트르La République des Lettres」가 나머지를 연재했다. - P638

라 레퓌블릭 데 레트로, 역시 몇몇 대담한 대목을 완화했음에도 <동물적 악취>, <오물>, <포르노그래피 > 등 혹독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1877년 1월 말에 목로주점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자 비난의 일기는 한층 더 뜨거워졌다. 우파도 좌파도 낭만주의자도 사실주의자도 목로주점」을 공격했다. 목로주점」에서 <끔찍한 음란>과 <역겨운 불결함>을 읽은 우파는 싸구려 발자크> 졸라의 부도덕과 외설성을 문제 삼았다. 민중의 참상보다는 민중의 미화를 원했던 좌파는 목로주점에서 민중에 대한 <잔혹한 경멸>을 읽었다. 낭만주의자 위고는 설령 <진실>이라 할지라도 빈곤을 구경거리>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
고 하면서 목로주점을 <불량한> 소설로 규정했다. 졸라와같은 계열에 있던 사실주의의 주요 작가들도 흔쾌히 졸라의 편에 서지는 않았다. 샹플뢰리Jules Husson Champfleury는「목로주점」과 같은 소설들을 가리켜 <천박한 소설들의 눈사태>라고 했고, 졸라를 뜻밖의 횡재를 한 벼락출세자>라고 여겼던 에드몽 드 공쿠르는 <글쓰기에 대한 명백한 포기>라는표현을 통해 문체의 결여를 비판했다. 반대자들의 비난은 내용의 비도덕성, 문학 언어의 타락, 노동자 참상의 과대 포장으로 요약된다.
일방적 비난의 분위기 속에서 플로베르는 <체계>와 <원칙>에 대한 강박 관념을 비판하면서도 졸라의 진실 묘사와 이야기꾼으로서의 힘을 상찬했다. 전술한 대로 말라르메는 경탄할 만한 언어학적 시도>, <가난한 악마들이 만든 (・・・・…) 가장아름다운 문학적 언어>를 지지했다. 자연주의 계열의 후배들은 선배의 출세작에 당연히 열광했다.  - P639

모파상은 문체가 지닌 <엄청난 힘>에 감동했고, 위스망스는 <눈보라 속에서 만나서로 한마디 말 없이 자기 길을 따라 헤어지는 제르베즈와 브뤼영감>보다 더 감동적이고 위대한 묘사를 알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보수파 작가 진영에서는 드물게 부르게 Paul Bourget가 목로주점의 작가를 <세기말의 발자크>라고 격찬했다.
지지자들의 찬사는 이처럼 진실 묘사와 새로운 언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졸라는 목로주점을 이런 말로 플로베르에게 헌정했었다.
<나의 위대한 친구 플로베르에게 취향에 대한 증오와 함께>이 헌사는 졸라가 <고상한 취향>을 강조하는 보수적 전통 비평을 얼마나 경멸했는지 잘 보여 준다. 또한 진보의 비난에대해 졸라는 <상처>를 알아야 <치료>도 가능하기에 <유토피아>를 꿈꾸기 전에 해야 할 일은 <현실>을 정확하게 탐구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어쨌든 늘 그렇듯 뜨거운 논쟁은 상업적 성공, 공쿠르의 표현에 따르면 <전례가 없는 엄청난 성공>을 몰고 왔다. 첫해에만 38 판이 찍히고 4년 동안 91 판이 찍힌목로주점은 현대적인 대량 인쇄의 문을 연 최초의 소설이라는 점에서도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작품임이 틀림없다. 결국「목로주점 덕분에 졸라는 파리 근교 메당에 자신의 집 ---- 이집은 오늘날 <졸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을 마련할수 있었고, 거기서 위스망스, 모파상, 세아르, 에니크, 알렉시등과 함께 정기적 모임을 가짐으로써 자연주의 유파를 형성할 수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목로주점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고,
졸라 또한 적어도 19세기 중반의 최고 소설가로 평가받게 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 P640

(자연주의에 대한 평가의 불일치 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프랑스 문학사 책을 펼쳐도 졸라가발자크나 플로베르에게 버금갈 정도의 자리를 할애받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드는 1934년의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목로주점을 다시 읽었다. (・・・・) 나는 졸라가 매우 높은 자리에 군림할 만한 작가라는 사실을 새롭게 확신한다. 경향과 무관하게 예술가로서 말이다. 게다가 1955년에르네 클레망René Clément 감독이 영화로 만든 이래 목로주점이 열 번이나 영화화되었다는 사실은 이 소설에 대한 문화계의 지속적인 관심을 입증한다. 심지어 소설가 레몽 크노Raymond Queneau는 목로주점」을 샹송 가사로까지 각색하지 않았던가. 여하튼 목로주점』의 탄생 이후 전개된 숱한논쟁을 고려할 때, 졸라의 무덤 위에서 읽은 아나톨 프랑스의조사(弔야말로 졸라에 대한 가장 종합적인 평가가 아닐까싶다.

사람들은 찬양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사람들은 칭찬했다. 사람들은 비난했다. 격찬과 비난은 하나같이 격렬했다・・・・・・ 그런 가운데 작품은 점점 위대해져 갔다. - P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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