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는 중국계, 이슬람계, 영국계 인재도 몽골군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입증된 탁월한 군사적역량을 바탕으로 특히 전투 지도력을 갖춘 상급 지휘관을 선발함으로써 몽골군은 당대 최고의 장수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 무관들은 이슬람이나 중국, 서방의 적들을 토벌하는 데 실패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몽골 병사의 장비는 단순하고 투박했지만 숙련된 초원 기병의 손에들리면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일반 병사는 보통 무명으로 된 갈색이나 청색 겉옷(칼라트kalat. 몽골의 튜닉)을 입었고 겨울에는 모피로된 겉옷을 입었다. 모전 안감을 댄 두터운 겨울용 가죽부츠는 표준 품목이었다. 말등자에 늘 발을 걸치고 생활하는 몽골족이 신발에 굽이 없다는 사실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칼라트 위에 중기병은 가슴 부분에 소가죽이나 미늘을 대고 칠을 입힌 가죽을 덮어 만든 쇠사슬 갑옷을 입었다. 경기병은 칼라트와 칠갑옷 또는 갑옷 없이 누비로 된 칼라트만 입었다. 칭기즈칸 이전 시대의 몽골 장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몽골이 통일되었을 때 중국 용병이었던 부족들은 중국의 우수한 무기와 방어구를 들여왔을 가능성이 있다. 미늘 갑옷과 쇠사슬 갑옷은 중국 및 서방과 전쟁을 치른 뒤에야 몽골군에게 도입되었다. 그러므로 몽골족이 금속제 화살과 창촉 만드는 비법을 갖게 된 시기가 상당히 늦은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전통 소재인 불에 달군 나무, 뼈, 뿔 대신 철로 무기를 만들게 된 것은 칭기즈칸이 집권한 후였다. 서하와 첫 전쟁(1207)을 치른 후, 칭기즈칸은 군대에 비단 속옷을 도입했다. 이것은 오늘날 군에 방탄조끼가 도입된 것에 비할 만큼 중요한 혁신이었다. 병사를 향해 화살이 날아와도 비단 속옷은 뚫을 수가 없었다. - P59
중기병은 적군을 말에서 떨어뜨릴 수 있도록 날 끝에 갈고리가 달린 약 3.5미터짜리 창을 사용했다. 몽골 기병은 전투에 나설 때 단거리용활과 장거리용 활 그리고 화살 30대를 담을 수 있는 화살통 2개에 화살 총 60대 정도를 기본으로 갖추었다. 화살은 화살대의 길이와사거리를 결정하는 무게 그리고 화살촉의 종류에 따라 아주 다양했다. - P60
초기 군대가 사용했던 화살은 불에 달군 나무로 만들었지만 그중에는 철갑옷을 뚫기 위해 화살촉을 쇠불림한 것도 있었다. 불화살과 효시---끝에 속이 빈 깍지를 달아 붙인 것으로 쏘면 공기에 부딪혀 소리가 난다. 화살을 쏘아 시작을 알렸다---도 사용했다. 모든 몽골 병사는 올가미와 작은 단검을 지니고 다녔다. 중기병은 이슬람 군대에서 들여온 듯한 구부러진 언월도---옛날 무기의 하나로 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큰 칼---와 서방 군대에서 들여온 듯한 손도끼나 철퇴도 갖추었다. 몽골 무기 중 몇 가지가 있다. 몽골 기병들은 가죽으로 된 안낭----여러 가지 필수품을넣어 말안장 양쪽 앞에 달아두는 가죽 주머니------에 여벌옷과 함께 낚싯줄 조리용항아리, 비상식량, 가죽 물통 두 개, 화살촉을 깎는 줄 바늘과 실을넣어가지고 다녔다. 몽골 안낭은 약간의 방수 효과가 있어 강을 건널때는 종종 말 꼬리에 묶어두기도 한다. 또 다른 방법은 개인 장비 일체를 안낭에 넣고 그 안에 있는 공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머니 입구를 밀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둥그렇게 말아서 단단하게 묶은 안낭은 구명구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 강을 건널 때 몽골 병사는 안남 위에 앉아서 말 꼬리를 붙잡고 가기도 했다. 활은 나무틀에 짐승의 뿔과 힘줄을 조합하여 만든 경기병의 기본무기로 작은 합성만곡궁이었다. 몽골족은 수분으로 인해 활대의 합판층이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칠을 많이 입혔으며, 활은 활집에 넣어 종종 말 옆구리에 매달아두었다. 몽골 활은 시위를 당길 때 드는 장력이 70킬로그램, 최대 유효 사거리는 270미터------원문에는 27킬로미터로 되어 있는데, 저자의 오기인 듯하다------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유의 활은 시위를 최대의 힘으로 당기는 경우가 거의 없고 단거리에서 재빨리 시위를 당겨 툭 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몽골족은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돌 가락지를 끼고 시위를 잡아당겼는데 이 기술은 꽤 유용했다. - P63
몽골족은 프르제발스키 말przhevalsky horse이라는 야생마를 탔다. 이 품종은 평균 키가 13~14 뼘 정도에 다리가 두꺼우며 갑옷 입은 기사가 타던 중세 유럽의 군마보다 몸집이 훨씬 더 작고 힘도 세지 않았다. 이 몽골 말들은 말발굽으로 툰드라의 눈을 긁어내 그 아래에 있는 풀이나 이끼를 찾았고 심지어 나뭇잎을 먹기도 했다." 말이 눈 속에서 먹이를 찾을 수 있었던 덕에 몽골족은 혹독한 추위에도 말을 부릴 수 있었다. 실제로 한겨울에 파미르 고원을 넘어 전투를 치르기도했다! 몽골 병사들은 주로 이용하는 말 외에도 여분으로 세 필의 말을 더 끌고 다녔다. 강행군 중에는 몇 시간 만에 말을 자주 바꿔 타면서 말의 체력을 비축해주었는데, 이 기술은 각 말이 짐을 효율적으로 운반할 수 있게 했다. 몽골 기병들은 식량으로 쓸 젖과 피를 얻기 위해 주로 암말을 몰았다. 병사들은 말이 개처럼 주인을 따르고 주인의 부름이나 휘파람에도 응답하도록 훈련 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말을 돌보고 먹일 사람이 많지 않아도 수많은 말이 군대와 함께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은 몽골 사회에서 거의 신비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고 칭기즈칸은 말을 인간적으로 대하도록 엄격하게 규제했다. 예를 들면 전쟁터를 누볐던 말은 더 이상 활용할 수 없을 때 도살하지 않고 자연으로 방생했다. 보통 몽골 병사들이 휴대하는 ‘비상식량은 주로 가루우유 약 5킬로그램, 수수 가루 암말의 젖과 피를 발효시켜 만든 알코올이 강한 말젖술(쿠미스)2리터 정도였다. - P65
고기는 안장 밑에 두어 말이 움직일때 발생하는 열과 땀으로 부드럽게 절여지도록 했다. 그렇게 안장 밑에서 육포가 된 고기는 쉬는 동안 병사들의 간편한 간식이 되었다. 이것을 본 외국 연대기 작가들은 몽골족이 살아 있는 말에서 고기를 잘라먹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가루우유는 물과 함께 물통에 넣고 섞으면 부드러운 요구르트가 되었다. 양이나 염소, 야크 등의 가축들은군 보급 대열과 함께 뒤따라갔다. 몽골 병사들은 정복한 지역에서 약탈한 음식 외에도 쥐와 이, 심지어 출산한 암말에서 나온 태반까지 거의 모든 것을 다 먹었다. 특히 막 잡은 동물의 장을 배설물만 짜내버리고 날것으로 먹는 이들의 식습관에 이슬람계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못했다. - P66
몽골군은 케시크라는 친위대를 만들어 탁월한 지휘관 및 막료를 임명하는 제도를 마련하고자 했다. 제국 초기에 이 친위대는 겨우1000명 남짓으로 구성되었으며, 칸의 집안사람과 하인 또는 부족 간 전쟁에서 전투 대원으로 활약하며 오랜 신뢰를 쌓아온 동료들이 주를이루었다. 친위대는 원래 칸의 개인 호위무관들이었는데 이것은 친위대를 구성하고 있는 세 부대의 이름에서 드러난다. 주간 대원 위사, 야간 대원 숙위, 전투 대원 전통사가 바로 그들이다. 칭기즈칸이 친위대를 편성한 것은 1206년으로 좀더 강력한 적수를 만났을 때 더 큰 규모의 군사작전들을 일관성 있게 수행할 수 있도록 군대를 재편했던시기였다. 몽골비사에서는 원래 있던 친위대가 1만 명으로 늘어났고 그때 지휘한 무관의 이름이 나야아였다고 설명한다. 얼마 뒤 케시크가 전투 지휘관과 군사전략가를 양성하는 이른바 몽골의 사관학교로거듭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전투 지휘관이기보다 군사전략가였던 수부타이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 P67
친위대는 가장 뛰어나고 영특하며 장래성 있는 몽골군의 지휘관 및막료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케시크 대원 후보들은 그동안 쌓아온 경력을 기준으로 선별한 뒤 하위 지휘 계통에서 기량이 뛰어난 사람을 뽑거나 우수한 사병들을 대상으로 1년에 한 번씩 벌이는 경합을 통해 뽑았다. 선발은 엄격하게 공로에 따라 이루어졌다. 영향력이 큰 귀족의 아들들이 후보가 되기도 했지만 능력이 기준에 못 미치면 최종 선발에서 여지없이 탈락되었다. 앞서 이야기했던 칭기즈칸의 사위처럼 말이다. 케시크에 소속된 모든 무관은 막료 업무를 훈련받았고 교육과 간단한 회의에도 참석했다. 금나라와 전쟁을 치른 뒤에는 공성병기 이용과 관련하여 중요한 점 한 가지가 강조되었다. 친위대 무관이라면 누구나 유사시 곧바로 만호를 지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나폴레옹은 하급 장교들에게 군대를 통솔해야 할 상황에 놓일 때를 대비해 배낭에 육군 원수의 지휘봉을 지니고 다니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전장에서 친위대원의 지시는 천호 이하 지휘관의 명령보다 우선시되었다. - P68
몽골군의 최고 전투 능력은 단연 이동 속도였다. 몽골 만호에게는 며칠 만에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해 적 뒤에 갑자기 나타나거나 적의 후방 깊숙한 요새의 관문에 나타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제배와 수부타이 같은 몽골군 지휘관들이 군대를 운영하면서 그토록 커다란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속도 덕분이었다. 유럽군이나 중국군은 최적의 상황에서도 매복이나 기습으로 몽골 만호를 공격하는 것이거의 불가능했다. 몽골군이 고전하고 있을 때는 거의 매번 적의 추격속도보다 더 빨리 후퇴할 수 있었다. 생포된 중국 무관이 칭기즈칸에게 말하기를, 몽골은 말을 타고 제국을 정복했지만 제국을 말 위에서 통치할 수는 없다고 했다. 칭기즈칸은 제국을 자신의 아들인 오고타이에게 물려주어 통치하게 했다. 그토록 광대한 몽골 제국을 안정된 연락수단 없이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기 1234년, 오고타이칸은 양이라는 제국 연락체제 수립을 공식화했다. 이 체제는 마르코 폴로의 말에 의하면 제국 전체에 걸쳐 종횡으로 약 40킬로미터 지점마다 역참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야간 이동 시 기수는 안장에 몸을 묶어 말이 다음 역에 도착할 때까지 말 등에서 잠을 잤다 - P79
금과의 전쟁 칭기즈칸의 금나라 공격은 끝없는 전쟁을 야기했다. 1211년 초에시작되어 칭기즈칸이 사망할 때까지(1227) 간헐적으로 계속되다가 후계자인 오고타이칸 시대에 분수령을 이룬 뒤, 1234년에 마침내 수부타이가 금의 새 수도인 카이펑부 오늘날 중국 허난 성河南省 동북부에 있는 도시를 점령함에 따라 전쟁은 끝이 났다. 몽골족은 금과의 전투를 통틀어 기나긴 전쟁 기간 동안 패한 전투가 단 두 번에 그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몽골족은 전략적 결정권을 가질 수 없었다. 이처럼 성공적인 전투활동으로 장기전을 치르고도 전략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사례는 몽골 전쟁사를 통틀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먼저, 금은 인구가 약5000만 명에 달하는 대국인 데 반해 몽골 인구는 고작 300만 명이었다. 1211년 금을 침공할 때 동원된 몽골 사병은 최대 12만 명이었다. - P85
칭기즈칸은 금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후방을 봉쇄하기로 하고1207년 서하를 공격했다. 2년전, 몽골은 몇몇 국경도시를 습격하고 국경의 부락 일부를 불태웠었다. 이때가 바로 몽골이 처음으로 요새도시를 만난 시점이다. 그리고 훗날 금나라에서 창병 집단을 처음으로 접한 것도 이때다. 우리는 몽골 기병이 서하의 창보병을 상대로 얼마나 활약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보병대가 몽골군을 쫓아낼 기병 증원군이 올 때까지 적어도 한 번은 탁 트인 지대에서 자신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몽골군이 보병과 방어시설이라는 두 가지 주요 전투 요소를 처음 접한 것도 바로 서하에서였다. 삼림 부족들이 후방에서 싸우기 위해 통나무와 나뭇가지를 쌓아 만든 방어진지 외에 몽골군은 어떤 군사 방어시설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몽골은 모든 부족 군대가 기병대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보병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다. 서하와의 전쟁(1207~1210)을 통해 몽골족은 이 두 가지 전투 형식에 익숙해진 게 사실이지만 둘 다폭넓게 알지는 못했다. 1207 년, 칭기즈칸은 서하의 병력을 약화시키고 영토를 복속시키기위해 대대적인 침공을 벌였다. 그러자 서요가 몽골군의 진로를 차단하고자 5만 명의 군사를 보냈는데 접전을 벌인 끝에 서요의 군대가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두 번째로 보낸 군대는 몽골군과 신속하게 교전을 치르고 두 달 이상 몽골군의 진격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몽골이 중무장한 보병을 상대하는 데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과 서요 기병대가 몽골 기병대에 맞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되어 있었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다. - P55
금의 황제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고 있었고 중도의 거대한 성채 또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곳곳에서 금의 장수들이 몽골로 이탈해 어느새 몽골군을 돕는 46개의 금나라 사단이 생겨났다. 이 많은 부대 중에는 공성부대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므로 몽골이 처음으로 금의 세련된 공성병기와 그 운용 방식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얻은 지식은 훗날 이슬람과 서구와의 싸움에 응용된다. 칭기즈칸은 군대를 세 기동부대로 나누어 금나라 영토 곳곳에 파견했다. 그중 칭기즈칸의 동생 카사르가 이끈 부대는 동쪽으로 이동해 만주 남부 지역을 향했고, 칭기즈칸의 아들인 주치가 이끈 부대는 산시 성의 고원을 지나 남쪽으로 이동했으며, 칸이 직접 지휘한 부대는 금나라의 낮은 평원을 지나 동남쪽으로 이동했다. 이 기동부대들은 반년 만에 90개 도시와 요새를 점령하고 불태웠으며 농촌은 황폐해졌다. 시체들이 벌판에서 썩어가거나 강물에 떠내려갔다. 금은 끔찍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항복을 거부했고 황제는 여전히 수도 성벽 안에서 안전하게 있었다. 중국처럼 땅덩이가 넓은 나라를 본적이 없었던 몽골은 금의 저항력에 당황했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군대로는 방대한 중국 땅을 결코 정복하고 지배할 수 없을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대한 피해를 입은 금의 전력이 크게 약화된 것은 사실이었다. 칭기즈칸은 금이 전력을 회복해 다시 몽골을 위협하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금과 평화협정을 벌여 휴전을 이끌어냈다. 칭기즈칸으로서는 전리품을 가지고 만리장성 너머로 후퇴시키는 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때를 놓친 대칸은 고비사막에 찌는 듯한 무더위가 찾아오자, 돌론노르(둬룬多)로 물러나 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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