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부족은 말과 소를 치며 목초지를 찾아 계절마다 이동하는 초원 유목민이었다. 모두 말을 타고 다셨으며 전쟁을 치를 때도 공통적으로 활 쏘는 기마병을 동원했다. 수부타이가 속한 우랑카이족은 삼림 부족, 혹은 다소 맞지 않는 표현이지만 삼림 몽골족이라 불리는 씨족들 중 하나였다. 연대기 작가들은 우랑카이족을 바이칼 호 서쪽 끝 예니세이 강 상류 침엽수림에 살았던 순록치기 민족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초원지대의 몽골족 장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으며 스스로 그들과 구별되게 살았다. 실제로칭기즈칸은 힘을 얻자마자 몇 차례의 군사 원정을 통해 삼림 부족들을 지배하려 했다.
삼림 부족에 대한 칭기즈칸의 관심은 어떤 친족의식보다는 냉엄한초원의 경제 구조에서 비롯되었다. 사냥과 어로를 하는 우랑카이족은 시베리아에서 모피를 구해 초원에 사는 몽골족에게 팔며 생활했다. 몽골족은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야 했기에 모피를 귀하게 여겼다. 우랑카이족은 사냥할 때 "작고 반질반질한 뼈를 발에 묶어 얼음위에서 아주 빠르게 움직이며 몸을 날려 동물을 잡을 수 있었다." 우랑카이족은 유목민이 아니었다. 즉 그들은 가축을 몰고 철마다 옮겨다니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통나무집을 짓고 동물 가죽과 자작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어 부락생활을 했다. 이처럼 안정적인 생활을 하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금속세공인이 되었고, 그중 몇몇은 유목생활을 하는 몽골족의 야영지로 가서 금속 무기와 가정용 도구를 고치는 일을 했다. 대장장이 자르치우다이도 이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시베리아 타이가 지대는 몽골 초원지대보다 훨씬 더 춥고 눈이 많이 내리며 일조량도 적기 때문에 우랑카이족은 초원지대 사람들보다 동물 가죽을 옷으로 사용할 때가 많았다. - P19

몽골은 금속공들을 살육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몽골로 데려가거나 군대에 배치해 장비를 계속 손볼 수 있게 했다. 러시아에서는 금속공인재 유출이 워낙 심각해 몽골군이 휩쓸고 간 뒤 기술자들을 다시 길러내는 데 두 세기도 넘게 걸렸다. - P38

칭기즈칸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 무관으로 두 사람을 선택한 것을보고 역사가들은 그가 중요한 직책에 맞는 인재를 고르는 안목이 탁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없었다. 제베는 테무진의 부하가 되기 전부터 이미 상당한 전투 경험을 쌓아온 위풍당당하고 저돌적인 장수였다. 타이치우트 씨족과 싸웠던 한 전투에서 테무진이 타고 있던 말이 등에 화살을 맞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타이치우트족이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젊은 전사한 명이 말을 타고 테무진의 막사로 들어왔다. 그가 바로 제베였다. 제베는 테무진에게 자기가 말을 쏘았다고 말했다. 제베의 용감함에 깊은인상을 받은 테무진은 제베를 살려주고 자신의 부대를 지휘하게 했다.
그날 이후 제베는 테무진의 부하들 가운데 가장 용감한 장수가 되었으며 『몽골비사』에서도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다. - P45

테무진은 수부타이의 지성은 물론이고 작전 수립 과정에서 전략과 전술을 지배하는 그의 능력에 점점 더 감동을 받게 된다. 물론 테무진이 칸이 되기 위해 치렀던 수많은 전쟁, 전투, 작전에 수부타이가 얼마나 많은 계획을 세우고 영향을 끼쳤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영향력은 상당히 컸을 것이다. 어쩌면 테무진은 수부타이가 과연 야전 지휘관에 적합한가 하는 의문을 잠시 묻어두었을 수도 있다. 다른 몽골전사들에게 용기와 군인정신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유능한 야전 지휘관은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수만 리나 떨어진 곳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계획하고 조정할 수 있는 무관은 보기 드물었다. 분명 테무진은 전투를 준비할 때마다 수부타이의 머릿속에 든 생각들을 오랜 시간 지켜보았을 것이다. 칭기즈칸이 되어 몽골 제국군을 창설한 뒤에는가장 훌륭한 무관에게 군대를 맡겼다.
이후 칭기즈칸 시대의 군사활동은 수부타이의 전략 설계를 거쳐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활동이 바로 금나라와의 전쟁(1211~1216), 서쪽의 흐와리즘 이슬람 제국과의 전쟁(1219~1224), 러시아 및 서방 세력과의 전쟁(1237~1242)인데 이 사건들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장들에서 자세히 분석하기로 한다. 이러한 모든 군사활동에 수부타이가 출정해 작전을 지휘했다.  - P46

몽골 사회는 봉건주의 체제를 갖췄다. 각 부족은 각각의 칸이 다스렸다. 칸 밑에는 강력한 봉건귀족인 노안이, 노얀 밑에는 기사에 해당되는 바투르가 있었다. 이들은 같은 시기 중세 유럽과 비슷한 군사 귀족 체제를 형성했다. 귀족 밑에는 개개의 자유민이 다수를 이루었으며 자유민 밑에는 노예가 있었다. 때때로 부족과 씨족이 끊임없이 충돌하다가 씨족 전체가 패망해 승리한 부족의 농노로 전락하기도 했다.
각 부족은 부계 씨족으로 나뉘어 저마다 오르두를 이루었다. 오르두는 쉽게 말해 막사를 뜻한다. 이 단어는 서양으로 흘러들어가면서 몸골족의 막사가 침략군과 관계있다고 하여 ‘무리 borde‘라는 단어가 되었다. 그리하여 ‘몽골 군단 Mongol horde‘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예부터 몽골 각 부족 내 씨족들은 노예, 여성, 말, 방목권을 두고 서로 싸웠다. 칭기즈칸이 씨족들을 통일한 뒤에는 법으로 이런 갈등을 금지시키고 그 법을 어기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했다. 그리하여 칭기즈칸은 끊임없이 내적 갈등을 겪었던 몽골 민족 전체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몽골 ‘민족‘은 사실 칭기즈칸이 무력으로 통일시킨 여러 초원 부족들(메르키트족, 케레이트족, 타타르족, 나이만족 등)연합이었다. 대한 자신의 부족 이름이 몽골족이었기 때문에 다른여러 부족도 자연히 몽골족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정체성이 점점 더몽골 민족으로 흡수되어간 씨족이나 부족도 많았다. 칭기즈칸의 부족 토템은 몽골 연합의 민족적 상징이 되었다. 야크의 어깨뼈로 만들어진 이 토템에는 야크의 하얀 꼬리 아홉 개가 달려 있다. 이 영기를멀리서 보면 마치 그리스 십자가 같았다. 위대한 왕이 동쪽의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유럽인들은 몽골의 영기가 그리스 십자가와 비슷하니 하나님이 이슬람 이교도들을 처단할 기독교 전사를 보낸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 P51

몽골군은 거의 기병대로 이루어져 있어 중기병대가 40퍼센트이고나머지 60퍼센트는 경기병대였다. 보병대가 기본적으로 편성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종종 피정복민에 속한 부대들이(심지어는 민간인들까지) 군에 들어와 특정 군사활동에 투입되기도 했다. 이 부대들은 거의소모품이나 마찬가지였다. 몽골은 주요 도시나 요새를 공격하기 전에주로 외딴곳에 있는 방어가 허술한 도시나 마을들을 우선적으로 공격하는 전투 관습이 있었다. 그곳에서 사로잡힌 사람들은 몽골군 앞에서 강제로 총알받이가 되었다.이 ‘보병대‘는 포위망 안에서 부역을 하거나 도시의 누벽으로 보내져 성벽 수비대에게 끔찍하게 살해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포로로 잡힌 군인들 중 지휘관의 눈에 든 사람들은 요새 수비병이 되거나 보급차를 지키는 경비병으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략상 이 보병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적었다.
우리가 몽골군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대부분 적의 입에서 나온것이다. 서양에서는 몽골군에 패한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몽골군의 규모를 부풀려서 디록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다. - P54

유목생활은 군인이 기후 조건과 물 공급, 식물의 생장 등에 대한 지식을 갖출 수 있게 해주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 목동들이 조리된 음식 없이 말의 목 정맥에서 받아낸 피를 마시며 열흘 동안 지내는 모습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몽골 군인은 평소 말안장에서 잠을 잤으며 아주 먼 거리를 갈 때는 말만 바꿔 타면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을 했다. 예를 들어 1221년에 칭기즈칸의 군대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이틀 만에 200킬로미터를 이동했다. 1241년에는 수부타이가 영양 보충도 하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약300킬로미터를 달려 헝가리 도시인 페스트까지 진군했다. 유목생활방식이 몽골인들을 타고난 군인으로 만들어준 셈이다. 이러한 천성이 군사 체계 내의 군율 및 훈련과 결합되었을 때 몽골족은 역사상 가장공포스러운 전사, 즉 악마의 기수들Devil‘s Horsemen이 되었다.
- P57

여러 부족을 좀더 큰 민족적 범주의 군사 조직에 편입시키면 부족의 충성도가 어느 정도 떨어질 수 있다. 민족의 정체성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새로운 몽골식 법령이 필요했고 칭기즈칸은 바로 그 규정인 야사크를 마련했다. 몽골 부족들은 서로 수백 년 동안 싸워왔다.
노예를 취하는 관습이나 소와 말을 급습하는 행위는 지독한 갈등을 초래했다. 또한 결혼 제도는 일부다처제였지만 전통적으로 족내혼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렇다보니 남자들은 다른 부족에서 신붓감을 납치해오는 수밖에 없었고 부족 간 싸움은 더 빈번해졌다. 칭기즈칸은 통일된 부족들이 이런 관습을 따르지 않도록 모두 금지시키고 엄격한 군율로 새 법령을 시행했다. 이 법령은 전투 중 비굴한 행위를 할 경우 처형하는 등 특정 범죄에 대해 여러 처벌도 적용했다.  - P57

 통일 초기에 몽골은 칭기즈칸 이외의 부족에서도 유능한 무관을 뽑기도 했는데, 이러한 성향은 가장 유능한 무관들만 전투 지휘관으로 선발하고 그중에서도 최고의 무관만 고위 지휘관으로선발하는 관행으로 이어졌다. 그런 까닭에 칭기즈칸의 ‘네 마리 충견‘
중에는 칭기즈칸의 혈통인 보르지긴 계열의 몽골족 출신이 없었다.
젤메와 수부타이는 우랑카이족이었고 쿠빌라이는 다른 부족의 왕족이었으며 제메는 타이치우트족이었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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