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이론을 위시한 현대철학 및 이론은 ‘나‘라는 인식이 어떤 시기를 거치고 나면 깔끔하게 구성되는 의식이나 태도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번 호 편집자가 지적하듯 ‘나‘라는 정체성은 타자와 맞서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과정으로서의 시간성을 갖는다. 정체성은 ‘타자‘를 동일자로 만드는 자기동일화의 무한정한 과정이다. 에세이 「동일화」에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에서 동일화는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정서적 유대에 대한 최초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안정되고 깔끔한 ‘나‘란 어쩌면 불가능한 환상인지도 모른다. 정체성은 끝없이 타자의 문제를 제기하며, 나와 타자 사이의 근본적인 틈새와 차이를 담고 있다. 랭보의 "나는 타자" 선언은 이 주제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 선언의 원문 Je est un autre에는 주어와 동사 일치를 파격적으로 무시하며 ‘나‘에 3인칭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배반과 불복종의 전율을 담고 있다.
차이와 다양성에 관한 세심함이 상대적으로 많이 확산되어있는 2018년의 한국은 이 책의 원저인 저널 <엄브라》가 나온 해인 1998년과는 20년의 시간차만큼 멀어져 있다. 그때와 지금, 무엇이 달라졌는가. 스마트폰 이용자가 늘어나고 소셜네트워크와 유튜브 등의 플랫폼이 확산되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고전적 질문은 자기노출과 현시의 무대 뒤에 어른거린다. "나는 나"라고 외치는 그 무수한 셀피 속 ‘나‘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믿는 그 ‘나‘인가 아니면 또다른 낯선 이미지일 뿐인가. 셀피를 찍는 ‘나‘와 찍히는 ‘나‘, 셀피문화 자체가 ‘나‘의 분리된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또 이처럼 증식되는 ‘나‘들은 각각의 ‘나‘ 사이의 차이와 다양성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는지 묻고 싶다. - P10


혹 우연이라도 이 책을 집어든 독자가 이 서문을 읽게 된다면 다른 무엇보다 다음의 내용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정체성이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불가피한 일종의 가면과도 같은 것이라면, 주체란 그 가면 뒤의 ‘나‘라는 어떤 실체이며, 그 실체의 본질은 ‘틈‘이다. 이주체의 틈으로부터 라깡이 이론화하고 지적이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한 ‘윤리적 행위‘가 빛을 발하고 나온다. 결국 정신분석이론의 핵심은 상징질서에 균열을 내는 행위자는 다름 아닌 주체라는 점이다. 이 주체의 윤리적 행위를 배신하는 것은 어떤 악행이 아니라 기적과도 같은 윤리적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극구 부정하며 자신을 상징질서의 유한한 감옥 안에서 근근이 버티고 살아가는 필멸의 존재로만들어버리는 것이라고 지젝은 지적한다. 지젝의 이 발언에 담긴 메시지가 독자에게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되어 첫 장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다가 이어지는 다른 저자들의 글이 제공하는 지적 모험을 경험할수 있기를 바래본다. - P12

정체성(identity)이라는 개념은 철학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정체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는 일은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적인 탐구를 위한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정체성 개념을 분석할 때 그것의 타자, 즉 차이(difference)의 개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적으로 ‘정체성‘은 한 개체가 자신과 맺는 관계로 정의된다.
정체성은 우리가 ‘차이‘라고 부르는 개체가 다른 개체와 맺는 관계와 정반대이다. 하지만 이렇게 정체성을 규정하면 정체성에 필수적인 술어인 단일성(unity)과 정체성 개념이 결정되는 순간 발생하는 분리(split)를 조정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 P13

어떤 것이 자기 자신과 동시발생한다는 사실은 적어도 두 가지, 즉 단순한 출발점으로서의 자아(self) 도착지점으로서의 그 자신(itself)을 고려하도록 요구한다. 하나를 갖기 위해선 둘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둘 중 무엇이 먼저 오는가?
이것은 또 하나의 오래된 철학적 문제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연히도 지금까지 수많은 방법이 제시되어왔다.
정체성 논쟁에서 정신분석이 기여한 점은 인간의 정체성이 복수성(plurality)뿐 아니라 시간성(temporality)과도 연관된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서 성취된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정체성은 시간 속에서 성취되는 자기 동일화identi-fication의 과정이다. 주체는 시간 속에서 지속적인 진자운동을 통해서 타자를 동일자(the same)로 만드는 무한한 과업의 수행과정에서 탄생한다. 그 결과 정체성은 더 이상 일원성 (one-ness) 또는 완전한 현전(presence)이라는 측면에서만 사유될 수는 없다.
오히려 정체성은 현전과 비-현, 큰 일자 (the One)와 타자 사이의 틈새와 차이로 구성된다. 정체성의 두 극점이 동시에 맞물리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분리에서 무의식이 출현한다.
정신분석을 통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가 함축하고 있는 자족적 성격은 랭보의 유명한 문장 "나는 타자이다 Je est un autre"(역주:랭보가 1871년 5월 조르주 이장바르에게 보낸 편지에 사용한 문장. 주어는 일인칭 나je이지만 동사는 3인칭 est를 사용한 비문법적인 문장을 통해서 ‘나‘라는 주체가 본질적이지 않고 구성된 정체성임을 보여준다.)가 드러낸 곤혹스러움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떤 타자를 얘기하고 있는 것인가?  - P14

에고(ego)보다 앞서 있고 윤리적 책임의 토대가 되는 목소리 없이 비실체적인 타자인가? 아니면 에고가 존경하고 따라하고 싶은 타자, 혹은 에고가 그 자신이 되도록 강박하고 최종적으로 타자를 다른 에고(alterego)로 만들게 하는 징벌적인 타자인가? 그도 아니면 우리 자신처럼사랑해야 할 이웃으로서의 타자인가?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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