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지도자였던 시절의 푸틴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첫 임기였던 2000년대 초반에 푸틴은 누구보다 민주주의를 강조했던 지도자였다. 미국과 친분을 쌓으려 노력하며 러시아를 나토에 가입시키려고 했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미국 뉴욕에서 테러가 일어났을때 부시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건 이가 바로 푸틴이었다. 미국이 선포한 ‘테러와의 전쟁‘을 무조건 지지한다면서 러시아 영공을 미군에게 곧바로 열어 줬고, 미군이 러시아와 키르기스스탄의 군 공항을 이용하도록 도왔다.
러시아 국민들의 삶은 거시적으로 보든, 미시적으로보든 이전보다 훨씬 개선되기 시작했다. 푸틴 대통령 첫 임기 때인 2000~2004년 러시아 국내 총생산(GDP) 성장률은연간 평균 7퍼센트대였고, 빈곤률은 절반 이하로 내려갔다.
러시아의 경제 규모는 2000년에 전 세계 23위에 불과했지만, 2007년에는 11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 P141

2004년 대통령 선거. 푸틴의 재선은 기정사실이었다.
실제로 푸틴은 71.3퍼센트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2위였던 공산당 후보는 13.6퍼센트의 지지를 받는 데 그쳤다. 비록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흠집들이 있었지만 국내외언론은 러시아의 선거 과정이 나름 투명했다고 평가했다.
푸틴이 반서감정이 보이기 시작한 시기는 두 번째 임기 때였다. 2007년에 독일 뮌헨에서 열린 유럽 안보회의에서 푸틴은 처음으로 미국에 맞섰다. - P143

 그는 ‘세계의 경찰관‘을 자처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미국이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의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치 부하 직원을 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푸틴의 비판 연설에는 배경이 있었다. 2002년 미국이 탄도탄요격미사일협정(Anti-Ballistic Missile Treaty)을 사전 통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파기한데다, 1990년대에 약속한 나토의 동진 금지 약속을 어기고, 구소련이었던 발트 3개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을 비롯해 폴란드와 체코 등 동유럽 국가의 나토 가입을 적극 찬성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침공을 추진했고, 북아프리카와 중동에 위치한 나라들의 국내정치에 개입해 소위 ‘아랍의 봄‘을 부추겼다고 보았다.
푸틴의 미국 비판은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러시아 사람들은 미국의 패권주의에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강한 지도자를 환영했다. 강대국 소련이 붕괴되면서 1990년대 내내 국제 사회에서 온갖 망신과 굴욕을 당했던 러시아국민들은 이제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 수 있게 됐다.
- P144

메드베데프는 2008년 5월 대통령 취임식을 치르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푸틴을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대통령 메드베데프의 첫 번째 지시였다.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실제 권력을 누가 쥐고 있는지는 너무나 명확했다.
2008년 8월 조지아가 남오세티야를 무력으로 침범해 합병하려고 하자, 이에 대응한 사람은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아니라 푸틴 총리였다. 2010년대 초반에 미군이 시리아에 진입했을 때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미군을 지지했다. 하지만 몇 시간도 안 돼 푸틴 총리는 대통령의 말을 뒤집고 미국을 비판했다. 2000년부터 매년 대국민 소통방송은 대통령이 했지만, 2008년부터 2012년까지는 총리가 했다. 메드베데프에게는 ‘주머니 대통령(pocket president)‘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2011년 러시아는 대단히 큰 정치적인 위기에 휩싸였다.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에서 친푸틴계인 ‘통합러시아당‘이 승리하자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곳곳에서 투표 부정행위가 발각되어 부정 선거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많은 국민이 스마트폰을 사용한 시대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듬해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혹시 푸틴이 다시 출마하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 남오세티아는 러시아와 조지아 북부지역이 있는 자치공화국으로 친러시아파인 남오세티아와 친미파가 대통령인 조지아의 분쟁에 러시아가 끼어들어 조지아를 공격. 프랑스의 중재로 마무리. 2022년 남오세티아는 투표를 거쳐 러시아로의 합병을 결정할 예정 - P147

2013년 러시아의 이웃 국가인 우크라이나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빅토르 야뉴코비치가 민간인 대량 학살 혐의로 형사 입건 위기에 처하자 해외로 도피했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문제는 이 정부가 반(反)러시아 성향을 보였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럽 연합 및 나토 가입, 미국과의친선 등을 발표했다. 소련 시절부터 크림반도에 항상 주둔하던 러시아 해군 기지의 철수를 명령했고, 그 자리에 나토의 군사 기지를 설립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방송이나 학교 등에서 러시아어 사용을 금지했다. 상황은 매우 빨리 악화됐고, 두 나라는 단교 단계에까지 갈 뻔했다.
- P148

푸틴 대통령은 2014년 3월 크림반도에 소속 부대 마크를 뗀 러시아군을 진입시키고, 크림반도 독립 여부를 묻는국민 투표 실시를 선포했다.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군사 개입을 부인하면서 서방 세계가 개입을 미루는 사이, 속전속결로 이뤄진 투표에서 크림반도 국민 90퍼센트 이상이 러시아에 속하기를 바랐다. 푸틴은 곧바로 합병 절차를 진행하고, 공식적으로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병합했다.
이 사건은 어마어마한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을 비롯한모든 서방 국가들이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고는 러시아정치와 경제 분야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국제 무대에서 러시아가 하루아침에 외톨이로 전락한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내에서는 계속 하락하던 푸틴의 지지율이 쭉쭉 치솟았다. 2013년 말, 30퍼센트대로 하락했던 지지율은 2014년 3월과 4월에 89퍼센트까지 치솟았다. 2000년푸틴이 처음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보다 더 높은 지지율이었다. ‘강한 러시아가 미국의 코를 주먹으로 친 사건‘은 러시아 국내 분위기를 축제로 만들었다.
푸틴은 지지율을 의식한 듯 강한 모습을 국민들에게몇 번 더 보여 줬다. 2015년 러시아군을 시리아로 보내고미국이 이기지 못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고 선언해 지지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2016년에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 개입해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 P150

러시아 언론은 " 이제 러시아는 무릎에서 일어서고 있다"는 표현을 써 가며, 러시아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위대한 나라가됐다는, 친정부 성향의 립 서비스를 아끼지 않았다.
세계와 밀고 당기는 게임에 너무 몰두했을까. 푸틴이러시아 내정에 신경을 덜 쓰는 게 점점 명확해져 갔다. 아니, 국내 지지율을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2000년부터 연금 수령 나이를 절대 올리지 않겠다고 했던 정부는 갑작스레 연금 수령 나이를 올렸다. 또한 쓰나미처럼 몰려온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때 푸틴은 감염병을피해 벙커에 틀어박혔다. 그러고는 코로나19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팬데믹 대응은 각 지자체별로 이루어졌고 결국 셧다운까지 이어졌다. 레바다기관 조사에 따르면, 2020년 5월 푸틴의 지지율은 25퍼센트까지 떨어졌다. 그 이전에 푸틴의 가장 낮은 지지율은 크림반도 점령 이전에 기록된 30퍼센트였다. 반민주주의적 행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반정부 언론에 압력을 가하거나 폐간시켰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 인터넷을 통제하는가 하면, 반정부 인사 살해를 시도하는 등 독재적인 성격을 보여 줬다. 또한 2020년 7월에는 자신의 다섯 번째 대통령 출마를 가능케 할 개헌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여기서도 부정행위, 결과 조작, 투표 절차위반 등이 발각됐다. - P151

러시아는 독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법률까지 만들었다. ‘권력비판금지법‘이다. 유신 시절 한국의 ‘국가모독죄‘를 연상시키는 법이 2019년 3월에 러시아에서 만들어진것이다. 이 법은 대중들에게 겁을 주려고 만든 법이라서 실제로 적용된 사례는 없었다. 하지만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 법으로사람들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표면상의 언론의 자유조차 사라져버렸다.
정부에서는 해외 대기업의 로비를 막겠다며 만든 ‘해외 에이전트 금지법‘을 만들었다. 이름만 보면 자본으로부터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언론의 자유를 완벽하게 망가뜨리는 법이다. 이 법에 따르면, 언론이 해외에서 재정 지원을 받을 경우 보도 때마다 후원받은 사실을 알리고, 이 기사를 읽지 말라는 메시지를 넣어야 한다. 게다가 해외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으면 아예 러시아 내에서는 광고 수주가 금지되고 국가 지원도 끊긴다. 해외 거주 러시아인이 언론사를 후원해도 해외로부터지원을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
이 법은 인터넷 언론, 심지어 일반인에게도 적용된다.
해외로부터 어떤 명목으로든 100원이라도 입금을 받으면 정부가 개입할 수 있게 된다. 아마존에서 물건을 구매해도 이 법의 적용을 받는다. 물건이 해외에서 들어오면, 내가 구매를 했든 아니든 해외에서 지원을 받는 것으로 간주된다. - P157


따라서 나의 SNS도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즉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법이지만 이것이지금 러시아의 현실이다. 누구든 마음대로 재갈을 물릴 수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시절의 완전한 독재와 1990년대 생지옥과 같은 자유를 경험한 러시아 국민은 작금의이 상황을 최고의 상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보수적인러시아 어르신들은 정부가 언론을 박살내든 정치인을 탄압하든 한 가지만 생각한다. ‘어게인 1991‘은 절대 안 된다고말이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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