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녀제도의 설치 과정
조선 건국 후 14년이 지난 태종 6년 (1406) 3월에 처음으로 의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날 제생원(濟生院, 조선시대에 약재를 실어 바치는 일을 받았던 관아)의 지사로 있던 허도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부인이 병이 있는데 남자 의원에게 진맥하여 치료하게 하면 혹 부끄러움을 머금고 나와 그 병을 보여주길 좋아하지 않아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바라건대 창고나 궁사, 관아의 어린 여자아이 열 명을 골라 맥박과침, 뜸의 법을 가르쳐서 이들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면 전하의 생명을 아끼는 덕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국가 정책 면에서 여성을 남성과 격리하기 위해 내세운 변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논의를 통해 마침내 여성 직업인으로서 의녀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없었던 의녀 제도를 신설해 의녀 양성을시작한 것이다. 여성들은 1차적으로 여성에게 진료를 받게 되었다(물론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남자 의원에게 진찰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의녀는 여성을 진찰하고 치료하기 위해 의술을 배워 익혔고 그 후에는 필요한 의료기관에 파견되었다. - P15
이후 태종 18년 (1418) 6월, 제생원에서 의녀 다섯 명으로는 부인병을 치료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다시 의녀를 뽑아줄 것을 요청했다. 의녀를 더 두었다. 제생원에서 올린 문서에 의하여 상기를 "의녀는 모두 일곱 명인데, 재주와 기예를 이룬 자는 다섯 명이므로 여러 곳에 나누어 보내면 매번 부족합니다. 바라건대, 각사의 여종의 딸 가운데 열세 살 이하인 자 열 명을 더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종 대에 의녀로 양성하기 위해 뽑은 열 명의 여자아이 중에서 의녀로 성장한 사람은 일곱 명이었다. 그중에서도 제대로 의녀 노릇을 할 수 있는자는 다섯 명뿐이었다. 의녀 자격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탈락자도 많이 생겨났다. 겨우 다섯 명만으로 여성의 질병을 진찰하고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수한 계층의 여성, 즉 궁궐 안의 여성만대상으로 한다 해도 손이 모자랐을 것이다. 태종은 다시 열세 살 이하의 여종 중에서 열 명의 의녀 후보생을 뽑도록 했다. 조기교육을 했다고 볼수 있지만 열세 살 이하라는 조건으로 보아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세종 대에 들면서 남녀유별은 더욱 심화되었다. 세종은 조선시대 최고의성군聖君으로 역대 가장 훌륭한 왕으로 받들어지고 있지만 여성에 대한 통제를 심화한 왕이기고 하다. - P16
조선시대 여의는 남자 의원에 대비되는 여자 의원이 아니라 단순히 의녀를 지칭하는 또하나의 이름이었다. 허도는 지방 여성들을 위한 의녀를 양성해서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의 부녀자도 치료 혜택을 받게끔 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세종은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부터 시행하라고 하였다. 피교육자는 너무 어려도 안 되고 나이가 많아도 안 된다. 가장 적당한대상은 어린아이다. 지금도 일고여덟 살에 초등교육을 시작한다. 지금처럼 어린 여자아이 중에서 총명한 아이들을 가려 교육했다. 그러나 세종 5년1423 12월 4일, 허도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계수관의 관비 중에서 열살 이상 열다섯 살 이하의 영리한 여자아이 두 명씩을 선택해 외방의 의녀로 키우자고 하였다. 나이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지방에서 서울로 차출되는 경우에는 조금 더 성숙한 아이들로 올려 보내게 하였다. 이들은 의녀교육을 받는 동안 객지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너무 어려도 곤란하였다. 이리하여 열 살을 전후한 여자아이들을 대상으로 의녀 교육이 시작되었다. 의녀 제도는 여성의 질병 치료의 편이성을 위해 시행되었지만 의녀가 여겅만 돌본 것은 아니었다. 의녀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돌보아야 했다. 의녀에게는 남녀유별의 내외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 P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