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세계 속 위상을 형성한 역사의 3막

세계 경제에서 중국의 부상은 세 개의 사건과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셋 중 첫째 단계는 덩샤오핑의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라는 구호 아래 진행되었다. 중국의 부상은 특히 1992년 둘째 단계에서 푸렷해졌다.
- P46

첫째 단계는 1978년에 시작되었다. 농업이 개혁되었고 사기업이 중국 경제에 재진입하도록 허용되었으며 외국인이 투자할 수 있는 특별경제구역 (우리가 곧 논의하는 주장삼각지 포함)이 설치되었다. 도시의 제조업에 대해서는 가격 통제가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상당히 비효율적인 국유기업이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다.
둘째 단계는 국유기업의 민영화가 시작된 것이다. 중소기업은 물론 몇몇 대규모 국유기업들이 폐쇄되거나 민간 부문에 매각되었다. 이시기에 민간 부문이 극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금융을 포함해 국가이익에 핵심적이라고 여겨진 분야에서는 대규모 국유기업들이 독점을 유지했다.  - P47

둘째 단계의 성공은 미국의 중국에 대한 무역적자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무역적자는 1978년부터 2000년까지 극적으로 증가했지만, 규모가 확대된 때는 1980년대가 아니라 1990년대였다. 중국으로의 외국인 직접투자 FDI 또한 같은 양상을 보인다. 중국이 경제를 개방한 이후 10년 동안 FDI는 50억 달러가 안 되었다. 1990년대 말에 이르자 FDI는 500억 달러에 육박하게 되었다. 1990년대 말 몇 년 동안에만FDI가 감소했다.
1990년대 말 중국의 상황은 오늘날 중국이 서 있는 상황과 기도하게도 비슷하다. 지금처럼 그때도 중국의 개혁이 힘을 잃는 듯했다.
성장률은 지속적으로 낮아졌고, 하락한 성장률조차 부풀려진 수준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국유기업들은 비효율적이었고 재고가 많이 쌓였다. 지금처럼 그때도 중국의 무역흑자 확대는 중국의 중상주의 정책의 증거라고 널리 여겨졌다. 또는 적어도 외국의 수출 시장에 접근하면서 다른 나라들이 자국 시장에 접근하지는 못하게 하는 비대칭적인처우의 증거로 여겨졌다.
종합해 되짚어 보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중국을 개방하기시작했고, 1992년 이후의 둘째 단계가 중국을 세계 경제와 더욱 빠르게 통합시켰다. 1990년대 말에 이르자 개혁의 힘이 빠지는 게 아닌가하는 우려가 뚜렷해졌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성장을 위한 새로운 방책을 추진했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었다.
중국의 WTO 가입에 앞서 미국은 2000년 중국에 대해 입법을 통해 영구정상무역관계PNTR: Permanent Normal Trade Relations 지위를 부여 했다. - P48

 이는 미국의 최혜국대우 NIN에 해당하며, 중국의 WTO 가입을 보장하는 절차 중 하나였다. 중국은 1995년에 출범한 WTO 체제에 수년간의 긴 협상 끝에 2001년에 진입했다.
WID 회원국 자격 획득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  사이의 시기에 중국은 경제•정치적으로 초강대국의 기반을 다졌다. 세계 경제의 힘과 ‘상품 슈퍼사이클‘ 및 신흥시장을 둘러싼 열띤 분위기, 세계화의 이익에 대한 칭송 등은 모두 정도는 달라도 이 시기 중국의 확장에서 파생된 현상이었다.
중국의 WTO 가입은 자유화와 개방의 긴 조건을 전제로 승인되었다. 미국이 부과한 전제조건은 대부분 중국 시장에 대한 더 큰 접근 가능성과 중국 시장의 투명성이었다. 중국은 대략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을 효구받았다.
--수입관세를 5년 이내에 10% 아래로 인하하고 몇몇 농산물에 대해서는 0%에 가깝게 인하
--비관세장벽 완화 또는 철폐,
--통신과 은행을 포함한 몇몇 핵심 분야 
--개방세계 지적재산권 보호 

중국에 부과한 이 같은 전제조건은 전무후무하게 가혹했다. 이를 검토한 N. R 라디K. R. Lardy는 중국의 WTO 가입 전에 발표한 논문(2001)에서 왜 중국의 지도부가 WTO 가입을 추구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WTO에 받아들여진 이후 10년간 중국의 양적·질적 성장을 보면 외국 시장으로 더 접근하려 한 중국 지도부의 전략은 주효했다. - P49

WTO 가입 전 중국이 처한 상황을 더 살펴보자. 1990년대 말에 이르러 중국의 개혁이 힘을 잃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고공 행진하던 성장률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대부분 시기에 매년 하락했고, 재고는 걱정스러운 수준으로 쌓였으며, 국유기업의 비효율이 공개적으로 거론되었다. 1999년 4개 대형 자산운용회사 (결과적으로 배드뱅크)가 설립되었는데, 은행의 부실채권 중 큰 물량을 인수해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국제결제은행BIS(2002)은 "4대 국유은행의 부실채권 총액은 3조 4,000억 위안(미화 4,100억 달러)으로 2001년 말 그들의 대출 총액의 42%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이어 "이는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한국과 인도네시아의 피크 부실채권 비율의 40~60%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그들 4대 은행이 은행 부문 대출 총액의 65%를 차지했다는사실을 중국의 은행 부문 전체에 적용하면, 중국 경제 전체의 부실채권은 5조 7,500억 위안으로 2001년 중국 GDP의 50%를 넘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다시 살펴보면, 왜 중국 지도부가 긴 전제조건 목록을 감수하고 WTO 가입을 추진했는지 명확해진다. 한편 자본 배분실패와 부실채권이라는 측면에서 당시 중국의 상황이 지금과 비슷하다는 특징도 분명하다.
전제조건 목록을 일별하면 중국이 주요 관세장벽을 낮추고 외국기업들이 진입하도록 자국 시장을 개방한 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한 분야는 자국 기업의 역량이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중국은 자국 기업의 역량이 강하거나 확보된 영역에서는 비관세장벽을 유지하고 대체로 외국 기업이 중국에서 성공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반면 미국은 중국에 PNTR 지위를 부여한 이후 새로운 시장 접근양허를 추가할 수 없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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