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가을

그해 6월에 그는 우리 영지를 방문했다.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의 친구이자 이웃이었다. 6월 15일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했다. 아버지가 서재에서 모스크바 석간신문을 들고 식당으로 달려왔다.
"큰일 났어, 전쟁이야! 사라예보에서 황태자가 암살됐어.
전쟁이 날 거야!"
9월에 그는 전선으로 떠나기에 앞서 작별 인사를 하려고하루 예정으로 우리 집에 왔다. 저녁 식사 후 평소처럼 사모바르가 나왔고, 사모바르의 김으로 뿌예진 창문을 바라보며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자네는 어쨌든 내일 아침에 떠나겠다는 거지.
식사도 하지 않고?"
"네, 만일 허락하신다면 아침 일찍 떠나겠습니다."
아버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자네 원하는 대로 하게, 정 그렇다면 나와 자네 장모는 자러 가야겠네. 우리는 내일 자네를 배웅해 주고 싶으니까…"
둘만 남게 되자 우리는 식당에 조금 더 머물게 되었다.
- P132

그는 묵묵히 이리저리 움직이다 갑자기 물었다.
"잠깐 산책이나 할까?
내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듯 대답했다.
우리는 옷을 걸쳐 입고 식당을 지나 테라스로 가서 정원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너무 어두워서 나는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환해지는 하늘에서 검은 나뭇가지들과 광물질처럼 뿌려진 반짝이는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갑자기 그가 죽게 된다면 어떻게될까? 정말로 나는 짧은 시간 내에 그를 잊게 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잊히는 거잖아…..‘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천천히 말했다.
"괜찮아. 내가 죽는다면, 나는 거기서 너를 기다릴 거야.
너는 살아야지. 세상에서 즐겁게 지낸 다음에 내게로 오면돼."
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침에 그는 떠났다. 엄마는 어젯밤에 만들었던 그 비운의 주머니를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 그 속에는 외할아버지가 전쟁 시에 지니고 있었던 금으로 만든 조그만 성상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터져버릴 것만 같은 절망감 속에서 그에게 성호를 그어주었다. - P133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누군가를 오랫동안 멀리 떠나보낼 때 작별하면서 느끼는 망연함 속에서, 현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나는 뒷짐을 진 채, 흐느껴 울어야 할지 아니면 목청이 터지도록 노래를 불러야 할지,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는 죽었다. 한 달 후 갈리치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3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정말로 많은 것을 겪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면 이성으로도 가슴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과거라고 불리는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마술 같은 이 모든 일들이 정말 길게만 느껴진다.
1918년 봄,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돌아가셨을 때,
모스크바에서 항상 "고귀한 부인 마님, 요즘 살기가 어떠신가요?" 라고 말하며 나를 멸시하던 스몰렌스크 시장의 여자상인 집 지하에 살고 있었다.
조그만 반지나 십자가, 좀먹은 모피 옷깃 같은 것들을 아르바트 거리와 시장에서 팔다가 나는 좀처럼 보기 드문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  - P134

나는 중년의 퇴역 군인인 그에게 시집을 갔고, 그와 함께 4월경에 예카테리노다르로 떠났다.
겨울에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우리는 수많은 피난민무리와 함께 노보로시스그에서 터키로 향하는 항로로 출발했고, 여행 중 바다에서 내 남편은 티푸스로 죽었다. 그가 죽은 후 나에게는 세 사람만 남아 있었다. 남편의 조카와 그의 어린 아내 그리고 그들의 7개월 된 딸아이. 그러나 조카와 그의 아내는 얼마 뒤 내 손에 젖먹이를 남기고 크림의 브란겔로 떠나버렸다. 그곳에서 그들은 연락을 끊고 사라져버렸다.
나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나와 젖먹이를 위해 온갖 힘들고,
험한 일을 하면서 오랫동안 살았다. 그 뒤로 남들처럼 나는 그 애와 함께하면서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불가리아, 세르비아, 체코, 벨기에, 파리, 니스…. 아이는 이제 다 커서 파리에 남았고 완전히 프랑스 여자가 되었다. 그녀는 매우 사랑스러웠지만 나에게는 완전히 무관심했다. 그녀는 마들렌 근처 초콜릿 가게에서 일했다. 은색 매니큐어를 바른 가는 손가락으로 비단 같은 종이 상자에 초콜릿을 넣고 포장해서 금색 실로 묶었다.
나는 니스에서 신이 내게 주신 것보다 더 오래 살고 있다•••. 이렇게 나는 언젠가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고 경솔하게 말했던 그의 죽음을 견뎌냈다. - P135

 그러나 그때부터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을 회상하면서 항상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 삶 속에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스스로 답변한다. 오로지 차가웠던 그 가을 저녁뿐이라고,
과연 그것은 있었던 일일까? 어쨌든 있었던 일이다. 이것만이 내 삶 속에 있었던 일이지. 나머지는 부질없는 꿈이야. 그리고 나는 믿는다. 뜨겁게 믿는다. 어딘가에서 그가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바로 그 가을 저녁의 사랑만큼,
젊음만큼, "너는 살아야지! 세상에서 즐겁게 지낸 다음에 내게로 오면 돼" 나는 살았고, 기뻐했고, 이제 곧 그에게 갈 것이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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