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림 분지에 누워 있는 거대한 사막은 죽음의 사막이란 뜻을 가진 타클라마칸 사막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가장 실크로드다운 실크로드가 바로 이 사막의 둘레로 난 길입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내부를 횡단하는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가장자리에 박혀 있는 오아시스와 오아시스 사이를 조심스럽게 건너가는 여행일지라도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만나는 것 중 가장 무서운 것은 카라부란, 즉 검은 모래 폭풍입니다. 이것이 한번 불면 사막의 모래 언덕들마저 이동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막을 움직이는 사막이란 뜻의 유사(流)라고도 부릅니다.
- P47

실크로드를 우리말로 옮기면 비단길입니다. 중국의 장안에서 로마까지 낙타 떼가 등에 비단을 짊어지고 지나가는 모랫길을 의미합니다. 실크로드란 용어는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처음사용했습니다(51쪽 지도 참조).
그런데 대상들이 낙타 등에 비단만 싣고 다녔던 건 아닙니다. 도자기 · 옥 · 보석 · 향료 · 모피·차·포도 · 호두· 석류 · 타조·코끼리·말·매·소금·약물·유리 · 안료 · 금과 은 따위를 싣고 다녔습니다. 여기에 목록을 다 적자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실크로드를 통해 오고 간 것은 물품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악사와가수, 춤추는 무희,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마술사, 화가와 조각가, 건축가, 여러 종교의 선교사와 순례자, 그리고 군인들.……. 이렇게 보면 실크로드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거대한 교역의 통로이자 동서간 문명 교류의 대동맥입니다.
사실 리히트호펜은 실크로드를 중앙아시아에 한정해서 사용했습니다. 즉 타림 분지(타클라마칸 사막)를 경유해 서북 인도로 가는 길과 소그디아나 로 가는 길을 가리켰습니다. 바로 이 길은 실크로드의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데,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오늘날 여행사의 안내로 모두 이 길을 지나다닙니다. - P53

* 다음은 실크로드 개척에 관련된 장건의 약전이다

기원전 139년 무제의 밀명을 받고 장안에서 출발.
이후 10년간 흉노 땅에 붙잡혀 있음.

기원전 127년 탈출에 성공하여 월지 도착.

기원전 120년 장안 도착, 13년 걸린 1차 여행을 마침.

연대 미상. 미얀마 쪽으로 해서 가려는 2차 여행 실패,

기원전 119년 오손에 파견됨. 3차 여행,

기원전 115년 귀국.

기원전 114년 생애를 마감.
(雪 主編, 『中國網之路辭典』에 근거합).
- P80

장건 이후 문전성시를 이룬 실크로드
장건은 돌아와 1년 뒤에 죽었다. 그러나 그가 파견한 부사들이 대부분 그 나라 사람들과 함께 돌아오니, 이때부터 서북쪽의 각 나라들이 비로소 한나라와 통교하기 시작했다. 이는 장건이 개척한 길이므로, 그 후에 사신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관직명을 따라 박망후 (외국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고 안목이 넓다는 뜻)라고 칭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장건을 앞세워야만 외국에서 신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80

한나라는 이란 · 아라비아 · 로마 · 인도 등지로 사절들을 파견하였다. 100여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사절단을, 한 해 동안 많으면 10여 차례, 적으면 5~6차례 보냈다. 먼 곳으로 간 사람은 8~9년, 가까운 곳으로 간 사람도 몇 해가 지나서야 돌아왔다.
서방의 상인들도 계속 한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들어왔다. 무제는이들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먼 여행의 노고를 위로하고, 창고에 쌓인 진귀한 물품들을 보여 주어 외국 상인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그들은 상아 · 산호 · 호박 · 석면 · 향료 · 유리 · 양탄자 따위를 중국으로 가져오고, 중국에서 비단 · 도자기·철·칠·계피·대황 그리고 혁대 고리나 거울 등의 청동 제품을 가져다가 서방에 팔았다.
- P81

이렇게 해서 뚫린 동서의 길, 이것이 바로 장건이 개척한 실크로드입니다. 새로 길을 뚫어 낸다는 뜻의 ‘착공(空)‘을 써서, 중국 역사책에는 이를 ‘장건의 착공‘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실크로드는 처음부터 무역과 문화 교류를 목적으로 해서개척된 길이 아니라, 흉노와의 항쟁 속에서 협공할 파트너인 월지를 찾아 떠난 결과 뚫린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크로드 형성의 축은 정주 제국들 사이의 교역이 아니라 유목 제국과 정주 제국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대립의 틈바구니에서 강대국의 각축장이 된 대표적인 오아시스왕국이 있습니다. 바로 누란 왕국입니다. 신비로 가득 찬 오아시스왕국 누란의 유적을 발견했을 때, 즉 20세기 초 실크로드 탐험에 나섰던 유럽의 학자들은 서양 미술이 동양으로 전파된 결정적 증거를 발견했다고 기뻐했습니다. 실크로드 때문에 오히려 나라의 운명이 수없이 곤두박질쳤던 누란의 애환 따위는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 P82

흉노가 일으킨 세계사의 대변

동서양에서는 흉노를 훈이라 불렀습니다.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은 바로 훈족의 침입이 일으킨 도미노 현상입니다. 이 사건이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절반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면, 반대편 동쪽 절반에서는 그보다 수세기 전에 월지의 패주(敗)로 인해 대규모의 민족 이동이 일어났습니다. 시대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것은 모두 흉노가 일으킨 세계사의 대변동입니다. 게르만족의 이동이 유럽의 형성에 기여했다면, 월지의 이동은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불교 문화에 기여했습니다.
월지는 아프가니스탄 지방을 점령한 뒤, 다시 인도 서북부로 내려가서 찬란한 쿠샨 왕조를 세웠는데, 바로 이 월지인들이 불상을 탄생시켜 우리 나라의 절에서도 모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의 10장문물2 불교와 불상 참조).
- P85

누란 왕국의 역사

누란 왕국이 역사 속에 처음 알려진 것은 기원전 176년 흉노의 묵특칸이 한나라 3대 황제인 문제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입니다.
하늘의 가호로 단련된 정예 병사와 강건한 말로써 월지를 쳐부수어 이를 모조리 죽이거나 항복시키고 누란 · 오손 · 호계 등 인접한 스물여섯나라를 평정하여 이들을 모두 흉노에 병합하였소.
이때 누란은 처음으로 흉노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누란은 평화로운 나라였습니다. 갈대 사이를 헤치고 강줄기를 따라 들어가면 모래 위에 비단처럼 호수가 펼쳐집니다. 바로 롭 호수입니다.
- P87

스키타이

파미르 동쪽 세계에서 흉노와 한으로 대표되는 유목 제국과 정주제국의 각축이 있었다면, 파미르 서쪽 세계에서는 유목 세력인 스키타이족이 서방의 정주 세력과 상쟁하면서 힘의 각축을 벌였습니다.
그리스에서 스키타이‘라고 부른 이들을 이란인은 ‘사카, 인도인은 ‘샤카‘, 중국인은 ‘새(塞)‘라고 불렀습니다.
- P109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키타이는 아시아 유목민으로서 같은 스키타이 계통인 마사게타이인의 공격을 받고(스키타이 미술품이 다수 출토된) 흑해 연변의 초원으로 쫓겨왔다고 합니다. 현대의 학자들은 스키타이의 원래 고향을 천산산맥 북록의 오손이 살던 거주지에서부터 아랄 해의 동남 해변에 이르는 광대한 초원 지대 어디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곳은 바로 장건의 여행 목적지였던 오손 · 대하 · 월지 등 이들 역시 스키타이의 일파 - 유목민들의 초원입니다.
흉노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스키타이는 결코 정주 사회와 같은 국가를 형성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몽골 제국이 등장하기 전의 초원 유목민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된 현상입니다. 예컨대 6세기의 투르크 제국을 봐도 이를 국가라기보다는 투르크란 이름 아래 모인 유목 부족(혹은 씨족)의 연맹체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불같이 일어나면 금세 제국이 되었다가 불길이 사그라들면 곧바로 부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유목 제국은 전통적으로 늘 영토를 삼분하여 다스립니다. 우두머리는 중앙을, 서열 2위는 좌익을, 3위는 우익을 맡습니다. 전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삼분법은 초원 제국이 구심력을 상실할 때는 영토가 분할되는 구조로 작용합니다. - P112

왕령 스키타이의 영토도 마찬가지로 세 개로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세 명의 왕이 다스렸는데, 이들 사이의 서열 관계는 언급이 없어 지금은 알 수가 없습니다.
스키타이의 통치 구조를 알기 위해서는 신화 속의 네 가지 성물이 갖는 상징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술잔은 왕령 스키타이를, 전투용 도끼는 유목 스키타이를, 쟁기는 농경 스키타이를, 멍에는 농민 스키타이를 가리킵니다. 이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대응하는 신분구조이며 스키타이가 인도 아리안족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됩니다.
왕령 스키타이는 나머지 세 신분이 거주하는 영토와 소속민들까지 지배 하에 두고 있었습니다.
- P113

스키타이의 전쟁 풍습
"스기타이를 공격하는 자는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갈 수 없고, 스키타이가 충돌을 피하려 들면 어느 누구도 그들을 사로잡을 수 없는 것이 스키타이의 삶의 방식"이라고 헤로도토스는 『역사』에 기록하였습니다.
특히 등자를 발명한 스키타이인들은 고대 사회의 가장 뛰어난 전투 군단이었습니다. 등자를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말 위에서 두 손을자유롭게 놀릴 수 있었고 몸을 백팔십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등자가 없는 정주민의 기마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전투력을 갖췄던 것입니다.
스키타이인들은 포로의 머리 가죽을 손수건처럼 만들어 말에 달고 다녔습니다. 
- P114

페르시아인들에게 유목민은 악 중의 악이었습니다. 조로아스터는 그의 교리에 유목민을 악인으로 명확히 규정했습니다.

농부가 아닌 사람은, 오 아후라 마즈다(최고신)여, 아무리 성실하다 해도 이 좋은 종교에 참여할 자리가 없나이다.

여기서 농부는 단순히 신분이나 직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목민에 대립되는 개념의 농민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을 악 중에서도 최악을 대변하는 존재로 본 조로아스터는 유목민의 침략으로 자신이 집무하던 불의 제단에서 최후를 마쳤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우주를 선과 악, 빛과 어둠으로 나눈 이원론의 종교인데, 이 구분법은 당시의 농경 사회와 유목 사회에 대한 페르시아인의 깊은 감정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종교 사상은 문명과
야만에 대한 모든 정주민의 유규한 관념을 가장 잘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117

헤로도토스(BC 484~425)는 다리우스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스키타이가 먼저 침략하여 아시아를 정복했기 때문에 복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헤로도토스가 말하는 스키타이의 침략은 오늘날의 역사 지식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기원전 6세기의 스키타이는 그들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습니다. 이미 이들은 흑해 북변의 우크라이나 지대에 근거지를 두고서 남유럽 쪽으로는 도나우 강 하류의 그리스 북부와 불가리아, 동유럽 쪽으로는 헝가리 · 슬로바키아 · 폴란드 남부, 아시아쪽으로는 터키 · 시리아 · 이라크 · 이란까지 진출하여 세력을 부식하고 있었습니다.

- P118

무릇 정주 제국이 초원으로 원정을 갈 때는 대규모 보급 부대를 데리고 가는데, 유목 제국 군대는 아슬아슬하게 도망을 가면서 이들이추격하도록 유인해 놓고는 쫓아오는 본대와 뒤처지는 보급 부대 사이를 적시에 끊어 놓습니다. 그러면 식량난에 빠진 본대는 퇴로를 찾기 바쁜데, 유목 제국 군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결정타를 가해 적의 대군을 순식간에 와해시킵니다. 한편 보급 부대의 물자는 그대로유목 전사의 전리품이 되어 이들의 전투력에 막대한 기여를 합니다.
서방의 정주 제국 군대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했던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도 초원을 정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스키타이는기원전 3세기 중엽 동쪽에서 서진(西進)해 오는 또 다른 유목민인 사르마트에게 본거지를 빼앗기고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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