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 스타킹 한 켤레
- 케이트 쇼팽

어느 날 소머스 부인은 예상치 못했던 15달러를 손에 넣었다.
그녀에게는 무척 큰돈처럼 느껴졌고, 낡고 오래된 지갑이 지폐로 불룩해지자 그녀는 중요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는데, 그녀로서는 오랫동안 느끼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 돈을 어디에 쓸지 무척 고민했다. 하루 이틀 그녀는 꿈을 꾸듯 움직였지만, 사실 머릿속으로는 돈을 어떻게 투자할지 골몰히 계산하고 있었다. 그녀는 성급하게 행동해서 나중에 후회하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중하고 적절하게 돈을 쓸 방법이 선명히 떠오른 것은 사위가 조용한 한밤중에 그녀가 뜬눈으로 누워 이런저런계획을 머릿속에서 굴리고 있을 때였다.
재니에게 평소보다 1~2달러 정도 더 비싼 신발을 사주면 좀 더오래 신을 수 있을 터였다. 재니와 맥과 아들들의 셔츠를 만들 무명원단을 몇 미터 살 것이다. 원래는 지금 입고 있는 옷을 감쪽같이 수선해서 계속 입힐 요량이었다. 맥은 드레스가 한 벌 더 필요했다. 그녀는 제대로 할인하는 예쁜 무늬 옷감을 상점 진열창 너머로 본 적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한 상자에 두 켤레가 든 새 스타킹을 살 돈이 남을 것이다. - P93

그러면 바느질할 시간을 얼마나 아낄 수 있을까! 아들들에게는 야구 모자를, 딸들에게는 세일러 모자를 사줄 것이다.
난생처음으로 새 옷을 입고 단정하고 예뻐 보일 아이들을 떠올리자 그녀는 신이 나고 초조해졌으며 설레어서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이따금 이웃들은 그 옛날 ‘좋았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머스 부인이 자기가 소머스 부인이 되리라는 걸 알기도 전이었다.
그녀는 그런 우울한 회상에 빠지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과거에 할애할 시간은 1초도 없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일을 하기도 바빴다. 이따금 미래가 어떤 흐릿하고 수척한 괴물처럼 두렵게 느껴졌지만, 다행히도 내일은 절대 오지 않는다.
소머스 부인은 할인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헐값에 파는 물건에 조금씩 가까워지기 위해 몇 시간이고 서 있을 수 있었다. 필요하면 팔꿈치로 사람들을 밀칠 수도 있었고, 언젠가 그녀가 계산할 차례가 올 때까지 물건을 꽉 붙잡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날 그녀는 피곤하고 조금 어지러웠다. 그녀는 빈약한 점심을 허겁지겁 먹었고 아니! 생각해 보니, 그녀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집을 청소하고 장을 보러 나갈 준비를 하다가 점심 먹는것 자체를 잊어버렸다!
비교적 한산한 카운터 앞의 스툴에 앉은 그녀는 셔츠 안감과 무늬 있는 한랭사 더미를 포위하고 있는 드센 무리를 뚫고 들어갈 용기와 힘을 짜내려고 애썼다. 팔다리에 힘이 쭉 빠졌고, 그녀는 카운터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았다. - P94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이었다.
점차 그녀는 손끝 아래 부드럽고 기분 좋은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손 아래 실크 스타킹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근처에 놓인 가격표가 스타킹 가격이 2달러 50센트에서 1달러 98세트로 할인 중이라고 알렸다. 카운터 뒤쪽에 있던 소녀가 실크 스타킹을 보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녀는 누가 그녀에게 다이아몬드 왕관을 구매할 생각으로 한번 살펴보겠느냐고 묻기라도 한 것처럼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들보들하고 은은히 빛나며 고급스러운 스타킹을 계속 어루만졌고, 이제는 두 손으로 집어서 스타킹의 광택을 살피고 뱀처럼 손가락 사이를 쓸고 내려가는 감촉을 느꼈다.
그녀의 창백한 두 뺨에 불현듯 홍조가 떠올랐다. 그녀는 소녀를 쳐다봤다.
"8 1/2 사이즈가 있을까요?"
8 1/2 사이즈는 아주 많았다. 사실, 그 사이즈가 가장 많았다.
여기 하늘색이 한 켤레, 저기에는 라벤더색, 검은색도 있었고 짙고 연함이 다양한 갈색과 회색이 있었다. 소머스 부인은 검은 스타킹을 들고 아주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녀가 질감을 확인하는 척하자 점원이 품질이 우수하다고 보증했다.
"1달러 98센트라고요." 그녀는 소리 내어 생각했다."음, 그럼 한 켤레 주세요." 그녀는 점원에게 5달러짜리 지폐를 주고 잔돈과 봉지를 기다렸다. 얼마나 자그마한 봉지인지! 그녀의 낡고 헤진 장바구니에 넣자 사라진 것만 같았다 . - P95

그러고 나서 소머스 부인은 할인 코너 쪽으로 가지 않았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여성용 탈의실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조용하고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간 그녀는 입고 있던 면 스타킹을벗고 실크 스타킹으로 갈아신었다. 그녀는 어떤 뚜렷한 생각을 하거나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지 않았고, 자기 행동의 동기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 순간 그녀는 피곤하고 고달픈 기능을 잠시 멈추고, 그녀의 행동을 지휘하고 책임감에서 놓아주는 어떤 자동적인 충동에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야들야들한 실크가 살에 닿는 느낌이 어찌나 좋은지! 그녀는 쿠션이 깔린 의자에 누워 여유로운 기분을 잠시 즐기고 싶었다. 그녀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면 스타킹을 돌돌 말아서 가방에 넣고 다시 신발을 신었다. 그녀는 곧바로 신발 가게에 가서 신발을 신어 보는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깐깐했다. 점원은 그녀가 뭘 원하는지 도통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그녀의 스타킹에 어울리는 신발을 찾지 못했고, 그녀는 쉽게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치마를 걷어붙이고 발을 한쪽으로, 머리는 반대쪽으로 돌리며 반들반들하고 코가 뾰족한 구두를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발과 발목이 매우 예뻐 보였다. 그것들이 자신의 것이며 자기 몸의 일부라고 믿기 힘들었다.  - P96

그녀는 점원에게 자기는 세련되고 발에 꼭 맞는 구두를 원하며, 신발이 마음에 들면1~2달러 정도 더 쓰는 것은 상관없다고 말했다.
소머스 부인이 마지막으로 장갑을 맞춘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가끔 그녀는 할인하는 장갑을 사곤 했는데, 가격이 너무 저렴했기때문에 손에 맞으리라고 기대하는 자체가 헛되고 비합리적이었다.
이제 그녀는 장갑 판매대의 쿠션 위에 팔꿈치를 올렸다. 예쁘장하고 상냥한 소녀가 손목이 긴 키드 장갑을 소머스 부인의 손에 능숙하게 재빨리 끼웠다. 그리고 소녀는 손목 부분을 쓸어내리고 깔끔하게 단추를 채웠고, 소녀와 소머스 부인은 가지런히 장갑을 낀 손을 함께 보며 넋을 잃고 감탄했다. 하지만 돈을 쓸 곳은 또 있었다.
거리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창가에 책과 잡지를 쌓아 놓고 파는 판매대가 있었다. 소머스 부인은 그녀가 다른 즐거운 것들에도 익숙했던  시절에 자주 읽던 비싼 잡지를 두 권 골랐다. 그녀는 책을 포장하지 않고 그냥 들었다. 그녀는 길을 건너며 최대한 치마를 들었다. 그녀의 스타킹과 구두와 꼭 맞는 장갑이 그녀의 자태에 놀라운 변화를 주었으며, 그녀는 잘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소속감과 자신감을 느꼈다.
그녀는 무척 배고팠다. 여느 때였으면 그녀는 집에 갈 때까지 허기를 참았다가 집에서 차를 한잔 끓이고 아무거나 눈에 보이는 간식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충동은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 들이지도 않았다.
- P97

길모통이에 식당이 하나 있었다. 그녀가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식당 밖에서만 이따금 그녀는 얼룩 하나 없이 말끔한 다마스크와 빛나는 크리스털, 세련된 사람들을 조용히 시중드는 웨이터를 봤다.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그녀가 들어갔을 때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작은 테이블에 혼자 앉았고, 친절한 웨이터가 곧바로 와서 주문을 받았다. 그녀는 많이 먹고 싶지 않았다. 맛있고  고급스러운 것으로 몇 입, 여섯 개의 블루 포인트 굴, 크레스를 곁들인 통통한 포크찹, 달콤한 디저트 크림 프라페처럼, 라인 포도주, 그리고 결국 작은 블랙커피 한 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느긋하게 장갑을 벗어 옆에 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나이프의 뭉툭한 부분으로 종이를 분리하며 잡지를 읽었다. 모든 것이 매우 유쾌했다. 다마스크는 창밖에서 봤을때보다 심지어 더 깨끗했으며 크리스털은 더 반짝였다. 조용한 남녀 손님은 그녀를 흘끔거리지 않았고, 그녀의 자리처럼 작은 테이블에서 한가로이 점심을 즐기고 있었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악이 흘렀고 미풍이 창문을 통해 살랑살랑 들어왔다. 그녀는 한 입 먹고, 한두 줄을 읽고, 호박빛 포도주를 홀짝이고, 실크 스타킹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가격은 상관없었다. 그녀가 돈을 세어서 웨이터에게 건네주고 팁으로 동전 하나를 쟁반에 더 놓았더니,
그는 마치 그녀가 왕족의 피가 흐르는 공주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 숙여 인사했다. - P98

그녀의 지갑에는 아직도 돈이 조금 남았고, 그녀의 다음 유혹은 마티네 포스터라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녀가 극장에 들어갔을 때는 조금 늦어서 연극이 이미 시작했고 관람석이 꽉 차 있는 듯했다. 하지만 군데군데 빈자리가 있었고그녀는 그중 한 곳으로 안내를 받아서, 사탕을 먹고 요란한 옷차림을 자랑하며 시간을 때우러 극장에 온 화려한 여자들 사이에 앉았다. 오로지 연기를 감상하고 극을 즐기려고 온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극장에 있는 그 누구도 소머스 부인만큼 그곳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와 배우들과 관객들 모두를 하나의 큰 인상(印象)으로 끌어모아 흡수하고 즐겼다. 그녀는 우스운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비극적인 장면에서는 옆자리에 앉은 화려한 부인과 함께 울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에 관해 잠깐 대화를 나눴다. 현란한 차림의 부인은 향수를 뿌린 하늘하늘한 레이스 손수건에 코를 풀고 눈가를 두드렸고, 소머스 부인에게 사탕을 권했다.
연극이 끝났고 음악이 멈췄으며 관객은 빠져나갔다. 꿈에서 깬것 같았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소머스 부인은 길모퉁이로 가서 케이블카를 기다렸다.
그녀 맞은편에 앉은 예리한 눈을 가진 남자는 그녀의 작고 창백한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 P99

그는 그 얼굴에서 자기가 무엇을 읽었는지 혼란스러웠다. 사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가 절절한 소망을 읽을 수 있는 마법사라면 모를까.
케이블카가 멈추지 않고 계속, 계속, 영원히 달리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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