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피플
파브리스 카로 지음, 강현주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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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입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 목표하는 대학의 이름은 허구이다. 분명 그곳은 어떤 지역에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 학생증을 손에 넣기 전까지는 상상에 불과하다. 내 집 마련의 꿈을 갖고 사는 직장인은 어떤가. 그 손에 쥐어진 청약통장이 몇 년 후 혹은 몇 십 년 후 살게 될 집과 같을 순 없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삶은 상상이 실체화되는 과정이라 볼 수도 있다. 무엇인가 즉물적인 존재를 획득하기 위해 배우고 일을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 실제가 되기 전 수도 없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 역시 ‘상상에서 실제’로의 공식을 철저히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스틱 피플>(브리즈. 2007)은 그와 반대의 경우다. 목차만을 봐도 알 수 있다. ‘réalité(현실)’에서 시작해 ‘figurec’으로 끝난다. 더욱이 ‘피귀렉(figurec)’이란 단어는 ‘단역배우’라는 뜻의 프랑스어인 ‘피귀랑(figurant)’과 ‘피귀라시옹(figuration)'에서 착안했다니 그 자체가 거짓이다. 결국 이 소설에 담긴 한 남자의 인생은 ‘실제’에서 ‘허구’로 가는 과정이다.

주인공은 생면부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게 유일한 취미로 그곳에서 처음 피귀렉의 실체를 접한다. 알고 보니 피귀렉은 일종의 인간파견회사로 이미 200년 전에 시작돼 수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다. 이들이 엑스트라를 파견하는 곳은 참으로 다양하다. 장례식에도 결혼식장에도 이들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좀 더 일상적인 풍경으로 대형마트에 물건을 담고 옆을 스쳐가는 사람도 피귀렉의 일원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진실일까. 일상적인 풍경과도 같은 사람들이 실제론 고용된 배우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참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다. 한 번 생긴 균열은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하는 탓이다. 여기에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있다. 주인공이 겪는 혼란을 고스란히 읽어내야 하는 의심스런 재미 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현실도 이와 별 다를 바 없다. 체면치레를 위해 하객을 고용하는 결혼식의 진풍경은 종종 기사화되기도 해 익숙하다. 말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진실한 관계에 목말라하면서고 자신의 거짓의 주체가 된다. 아니 가짜로 가득한 자신을 포함한 주변이 진짜라 믿고 눈을 감아버린다.

<플라스틱 피플>이 뜻하는 것도 이와 같다. 만들어진 세상의 만들어진 사람들은 공장에서 용도에 맞게 생산된 플라스틱 제품과도 같다. 비단 피귀렉이 곳곳에 배치한 대역배우들 뿐이 아니다. 이들을 가족이나 친구로, 연인으로 믿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플라스틱 피플이다.

피귀렉의 존재를 알게 된 주인공. 그는 진실을 의심하기 보다는 안주하는 쪽을 택한다. 나아가 직접 피귀렉을 고용해 원하는 삶을 꾸린다. 비록 그 뒤에 남는 게 상처와 고액의 빚일지라도 거짓을 택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피귀렉이 되어간다.

우리는 흔히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라고 말한다. 자신을 존중할수록 삶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는 곧 자기계발의 채찍질이 되어 나를 다그친다. 내가 주인공이 되기 위한 삶을 누리기 위해 노력하라고 한다. 헌데 이는 무엇을 위함인가.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는 것인가. 혹시 인생은 오디션이고 삶은 주인공 자리를 꿰차기 위한 연기연습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플라스틱 피플>의 주인공이 희곡을 쓰듯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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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수다 - 나를 서재 밖으로 꺼내주시오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진원 옮김 / 지니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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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살기에 이런 책을 내 놓는 것일까. 실제 모습도 소설 속 주인공과 흡사할까. 만약 그렇다면 이 사람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 카페에서 차 한 잔 나누면서 그의 수다를 듣고 싶다.”

오쿠다 히데오는 독자에게 이런 상상을 품게 만드는 작가다. 폭소를 넘어 자지러진다는 평가를 받는 <인더풀>과 <공중그네>, 주변에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남쪽으로 튀어> 등. 그의 소설은 비상식적이고 유쾌하다. 일부에서는 이런 특징이 현대인에게 묘한 치유력으로 작용한다고 까지 말한다.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로 팔리기도 많이 팔렸다.

이렇게 이례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오쿠다 히데오. 국내에는 소개된 그의 소설은 모두 6편이다. 특이한 것은 6편의 7권(<남쪽으로 튀어>는 상하 두 권)의 작가 소개에 사진이 없다는 사실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금세 찾을 수 있어 사진은 차지하더라고 유명세에 비해 일려진 바가 적다. 물론 작가의 실제 모습이 작품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다. 하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난 궁금한 건 못 참아.’
속으로 생각했던 독자라면 최근 출간된 <오! 수다>(지니북스. 2007)는 반가운 소식. <공중그네>로 나오키 상을 받은 2004년 동안 배로 여행한 6군데의 항구도시를 담았다. 개인적인 기록이니만큼 오쿠다 히데오의 평소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 한 가지 주의 할 점은 여행에세이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이 책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것. 가히 오쿠다 히데오식 기행에세이라고 부를 수 있어 독특하다.

사실 말이 여행기이지 읽고 보면 되레 ‘맛 집 탐방’에 가깝다. 대부분 먹는 얘기로, 여행 중 맛 본 음식들이 꼼꼼히 기록되어있다. 그것도 미식가의 혀가 아닌 대식가의 혀의 기록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

가자미튀김을 볼이 미어터져라 먹었다. 조개무침도 맛있다.
“주인장, 이것은 무슨 조개인가요?”
“저, 그건 문어입니다만......”
아차, 들켜버렸다. 나는 미각치인 것이다.

웃음의 포인트는 여기 있다. 대도시 도쿄에 사는 명망 있는 작가의 이미지를 의식해 짐짓 근엄하게 건넨 말에 민망해지는 순간, 폭소가 터진다. 누구에게나 비슷한 경험이 있을 법해 읽는 사람도 불콰해지는 웃음이다.

이 작가의 익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끼니마다 많이 먹게 되는 핑계를 여행에 동반한 출판사 직원들에게 돌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이라부’(<공중그네>와 <인더풀>의 주인공)이다. 애초 이 여행은 잡지 <여행>의 원고 청탁에 응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출판사 직원들도 동반한다. 젊은 사진작가와 출판사 직원이 그들. 육식과 과식, 그리고 술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 어쩔 수없이 먹는 다는 자기 합리화가 곳곳에 등장한다. 실은 자기도 먹고 싶었던 것이면서.

오쿠다 히데오는 이렇게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여행에 담고 책을 엮었다. 앞서 미각치, 대식가의 모습과 더불어 스낵바의 호스티스와 격이 없이 친해지는 모습, 보는 사람이 없다고 선상에서 춤을 추는 모습, 1등실이 아닌 2등실을 배정받지 속으로 꿍하는 모습 등, 이 모든 게 인간 오쿠다 히데오이다.

인간 오쿠다 히데오는 작품 속의 주인공과는 다르다. 그보다 훨씬 평범한 생각을 하고 실제로도 평범한 사람이다. 때문에 식탐에세이 <오! 수다>는 작가와 독자의 거리를 가깝게 한다. 마치 그의 긴 수다를 듣고 있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처럼 말이다.

한편, 일본의 지명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일본의 전도를 펼칠 것. 오쿠다 히데오가 찾아가는 6군데의 항구 도시의 위치와 경로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한 4번째 방문지는 우리나라의 부산으로 그가 기록한 한국과 한국인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되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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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 하우스 - 볏짚으로 짓는 생태주택
이웅희.홍순천 지음 / 시골생활(도솔)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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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새집증후군. 집이나 건물을 새로 지을 때 사용하는 건축자재에서 나오는 유해물질로 인해 거주자들이 육체ㆍ정신적으로 느끼는 건강상의 문제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를 유발하는 오염물질은 짧은 시간 노출될 경우에도 두통, 가려움, 현기증, 집중력 저하 등의 증상을 유발한다. 더욱이 장시간 노출될 경우 그 증상이 질병으로 나타날 수 있어 심각하다.

문제는 새집증후군의 발생지가 대부분 거주지라는 것. 자연히 오염에 장기간 노출될 수밖에 없어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이에 해당 기관에서는 질병 유발의 가능성이 있는 건축자재 사용을 규제하는 법안을 마련하며 등의 해결책을 찾는 중에 있다. 하지만 이미 오염유발 재료를 이용해 준공검사까지 마친 건물의 경우 새로운 법안은 효력이 없다.

최근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웰빙에 대한 욕구가 더해져 ‘생태주택’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는 추세다. 이는 곧 전원주택과 귀농을 꿈꾸는 일부에게 자극이 되어 향후 주거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착되리라는 예측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대중의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박차를 가할 전망.

아쉬운 점은 일반인들이 친환경적인 주택에 대한 정보를 얻는 일은 쉽지 않은 현실. 정보 취득이 가장 용이한 도서의 경우만 봐도 대부분 실제 경험보다는 전문적인 이론 위주로 이해의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실망은 금물. 여기 자연 속 주거공간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독자에게 반가운 책이 하나있다.

바로 <스트로베일 하우스>(시골생활. 2007). 부제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이다. 생태주택 ‘스트로베일 건축’ 연구가이자 이를 이용한 주택을 직접 지어 살고 있는 이웅희, 홍순천 씨가 썼다. 이 둘은 시골 생활을 하겠다는 공통의 관심사 하나만으로 의기투합해 2004년 드디어 동강 제장마을 일부 터에 스트로베일 하우스를 지었다. 대형 사고를 친 셈. 이를 시작으로 현재는 ‘스트로베일 연구회’를 구성, 여러 지역에 생태주택을 짓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스트로베일 하우스’란 무엇일까. 스트로베일(Strawbale)이란 단어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스트로(Straw)는 짚, 베일(Bale)은 꾸러미를 뜻한다. 축산농가에 쌓여 있는 정육면체의 볏짚꾸러미를 상상하면 거의 정확하다. 조금 다른 점은 압축된 볏짚꾸러미라는 점. 곧 ‘스트로베일 하우스’는 우리식으로 ‘볏짚으로 지은 집’이 된다.

헌데 과연 볏짚으로 지은 집에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생태주택이라는 장점을 감안하더라도 늑대의 입김에 허무하게 날아간 ‘아기 돼지 삼형제’의 맏이가 지은 지푸라기 집이 떠오르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구조물의 안정성은 일반인에게 자연스러운 의문. 또한 기존 콘크리트 구조물과 비교했을 때의 경제성이나 시공의 용이함 등도 궁금하다.

이는 작가 역시 미리 짐작한 바로 책을 찬찬히 살펴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조금 설명하면 시공 시 벽돌처럼 쌓아 올리는 베일(압축볏짚)의 무게는 대략 20kg, 골조의 사용여부와 관계없이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한다. 또한 외부를 흙으로 미장해 마감하는데 이는 샌드위치 패널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 구운 식빵 하나보다 중간에 잼을 발라 붙인 샌드위치가 수직하중에 더욱 강한 것과 같은 이치다. 즉 흙 미장이 빵의 역할을, 베일이 잼이 역할을 하는 셈이다.

다음으로 경제성인 면은 어떨까. 당연히 시멘트보다는 볏짚으로 만든 베일이 싸다. 우리나라의 경우 볏짚을 구하기 쉽다는 것 역시 유리한 점. 하지만 아파트가 가진 부지면적 당 경제성과 비교하면 당연히 떨어진다.

시공 상의 측면에서는 미국에서 시작돼 발전된 이 공법과 우리 전통가옥 시공방법과 공통점이 많아 용이하다. 다만 보편적인 건축공법이 아니라 숙련된 기술자 확보가 어렵고 품이 많이 든다는 단점은 차차 해결해야할 부분으로 지적된다.

이밖에도 단열성과 통기성이 좋고 화재에 안전한 내열성을 갖춘 등, 여러 장점이 있다. 콘크리트 구조물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을뿐더러 그 단점까지 보완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작가는 주변 경관 전체가 정원이고 장식인 동강에 볏짚으로 집을 지어 살고 있다. 그는 지금 행복하다. 이는 국내 적용 사례가 없었던 ‘스트로베일 건축’이 우리 땅에서 가능하고 어울린다는 점을 확인하며 얻은 성취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본질적인 행복의 조건은  ‘스트로베일 하우스’로 찾은 시골 생활에 있다.

고층건물로 빼곡한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우리는 내 집은 갖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간다. 치솟는 집값과 대출 금리를 보며 간을 졸이며 살고 있다. 때때로 살기 위해 집을 사는지 집을 사기위해 사는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이렇게 마련한 집. 그곳에서 병들고 있는 우리를 발견한다. 다 악착같이 절약해 마련한 집 때문이다.

때문에 비단 생태주택을 짓고 시골에서 살 계획을 가진 독자뿐만 아니라 도시에 사는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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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 지식과 교양을 디스플레이하다
고전연구회 사암 엮음 / 포럼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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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타인에게 밝히기 꺼려지는 취미가 있다. 대부분 그것이 일반적인 상식에 어긋나기 때문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독서이다. 학생기록부나 입사지원서 등 개인의 신상명세서 작성 란에 자신의 취미를 기재한다고 생각해보자. 제일 만만한 게 독서, 음악 감상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련의 경험을 통해 독서를 취미로 밝히는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모두가 말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어떤 무리에서는 책을 읽는다고 밝히는 행위를 잘난 척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잘난 척까지는 아니라도 일상의 대화에서 책을 주제로 하는 경우 현실도피의 몽상가로 낙인찍히는 경우가 있다. 드라마와 오락프로그램 연예인 신변잡기 등이 대화의 주축을 이루며 소위 고급문화라 불리는 것을 이야기하면 뒤에서 재수 없다는 소리까지 듣는다. 그 중에서도 책 이야기는 그 무리에선 금기시되는 이야깃거리이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요즘 세상에 책 읽는 사람 참 없다고 한다. 거리나 카페에서 사람들 손에 쥐어진 책은 장신구 역할에 지나지 않는 고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 이웃엔 여전히 독서라는 ‘신상명세서 취미’를 영위하는 사람이 꽤 많다.

그렇게 독서를 취미로 하는 사람의 많은 사람들이 곧 장서가이다. 이들은 자신의 좋아하는 책을 꼭 사서 본다. 적어도 전작읽기 중인 작가와 특정한 관심분야의 책을 사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모르긴 해도 이들의 최고 소망은 책으로 가득한 서재를 갖는 것일 테다. 아니 대부분 현재 나름대로의 서재를 갖고 있으며 그 서재가 더 많은 책을 담을 수 있게 좀더 넓고 쾌적해지기를 바란다.

반면 장서가를 경계하는 독서가도 많다. 이들은 책을 사서 읽고 그것을 소장하는 것에 회의적 입장을 취한다. 종종 자신의 방을 꽉 채운 책의 무게에 억눌리는 기분이 든다고 말하기도 한다. 책에 대한 소유욕과 속물적 대상에 대한 욕심이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서재에 쌓인 책을 보고 어떤 사람은 보고 즐기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아마도 이것은 ‘서재에 담긴 뜻’이 저마다 다른 까닭이리라.

<서재-지식과 교양을 디스플레이하다>(포럼. 2007)는 우리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기 옛 선비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서재에 얽힌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서재가 책의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지식과 교양의 자랑은 아니다. 책을 쌓아 놓고 거드름 피우며 자신의 식견을 자랑삼아 내비치는 곳이 서재가 아니란 말이다. 특히 앞서 살펴본 책이 쌓인 서재를 보고 느끼는 상이한 감상을 시원스레 정리해 주는 부분도 있어 흥미롭다.

크게 나뉜 세 가지 테마 중 첫 번째인 ‘서재에 담긴 뜻’편에 소개된 열 명의 서재 중 ‘이서구의 서재, 소완정’을 살펴보자. 이서구(이낙서)는 책이 마룻대까지 가득 찬 것도 모자라 시렁까지 꽉 채우고 있는 서재의 자신의 모습을 즐겨했다. 그러던 중 서재에 ‘소완(素玩)’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박지원에게 글을 써달란 요청을 했다. 헌데 이에 돌아온 박지원의 대답은 따끔했다.

말인 즉 책을 읽고 완상하는 것은 단순히 보고 즐기는 것 이상의 깨달음이고 그러자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뜻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도록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다. 헌데 이서구는 책으로 가득 찬 방안에 갇혀 눈으로만 즐거워했고 그것이 완상이라 여겨 자신의 서재에 ‘소완’이라 이름 붙였다. 스승은 이러한 제자에게 따끔한 충고를 했고 이에 이서구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는 종종 사진으로 나마 접한 작가와 학자 등, 유명인사의 책으로 가득한 서재를 무조건 부러워했을 독서가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이 이야기는 이 책이 말하는 지식과 교양의 전시장인 서재의 의미가 단순히 장서가의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책이 쌓여가는 방 만이 서재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 많은 책을 읽으며 깨달음을 얻고 마음을 다스린 우리 자신이 서재가 될 필요가 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책이 쌓이고 서재가 좁아지게 되는 것으로,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이서구에 대한 스승 박지원의 가르침도 이런 뜻을 담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조선을 대표하는 독서가 이덕무의 서재, 구서재도 그렇다. 그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맹자>를 팔고 친구인 유득공을 부추겨 <춘추좌씨전>을 팔아 술에 취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책을 팔아 한때나마 굶주림과 술 허기를 달래는 것이 더욱 솔직하고 꾸밈없는 행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 독서가로 후대에 그 이름을 남긴 이덕무와 유득공, 그들의 서재 풍경이 상상해보자. 분명 욕심내어 책을 쌓아 두진 않았을 것이다.

책을 읽지 않고, 읽는 다고해도 그것이 수집으로 변질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에 실린 30곳의 서재 이야기는 단순한 구경거리나 부러움의 대상을 넘어 책의 본질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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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13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암이 간서치 이서구에게 한 따끔한 충고가 인상적입니다.
좋은 책, 좋은 리뷰네요. 당선 축하합니다.^^

은비뫼 2007-08-14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마이리뷰 당선 축하합니다. :)

sokdagi 2007-08-14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전 좋은 책은 선물했다가도 다시 사곤 한답니다. 소유욕일테지요?
ㅎㅎ 그치만 사두고 언젠가 다시 읽어야지라는 생각을 아직 버리지 못한 탓도 있답니다.

비로그인 2007-08-14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책을 읽고 완상하는 것은 단순히 보고 즐기는 것 이상의 깨달음이고 그러자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뜻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도록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다"란 말에 저도 책을 좀 들어내야겠어요 ^^

어름왕자 2007-08-14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축하드려요... 근데 책도 많아야 보고싶은 의욕도 많이 생기지 않을까해요..ㅎㅎㅎ 추천해드리고 갑니다.. ^^

Jade 2007-08-14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ㅎㅎ 전 책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거의 사는편인데..뜨끔해지는데요? ㅎㅎ

목나무 2007-08-17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축하. ^^

매미유충 2007-08-17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고 갑니다^ㅁ^ 공감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리뷰 많이
부탁드려요^ㅁ^

울싸 2007-08-20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무해한모리군 2007-08-29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보았습니다. 저도 거대한 서재를 꿈꾸고는 하는데 ㅎㅎㅎ
 
경제의 진실 - 갤브레이스에게 듣는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이해준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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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드라마 많이 변했다고들 한다. 반면 한편에서는 일부 지각 있는 작가의 대본이 그럴 뿐이지 아직 대부분의 드라마가 뻔한 공식에 충실하고 있다고 한다. 그 뻔한 공식이 무엇인고하면 ‘불륜’이 1등이고 ‘재벌 2,3세의 일탈’이 2등으로 이 둘은 엎치락뒤치락 순위 다툼 중이다. 그중에서도 주연이 속 재벌이나 명문가 후계자로 분한 드라마를 생각해보자.

국제공항에 주인공이 도착한다. 그는 매우 잘생겼고 매력적이다. 경영학위를 받았거나 중간에 부모 몰래 미대나 음대에 진학했던 학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대부분이 그 학위를 외국 유수의 대학에서 얻었다. 무엇보다 그는 젊고 유능하다. 한마디로 천재적이다. 아닌 경우도 있다. 얼굴만 뻔지르르 술과 여자에 빠져 소리 지를 줄 밖에 모르는 안하무인 방탕아도 있다. 하지만 그도 회를 거듭할수록 이내 특유의 유능함을 갖춘다.

뒤이은 공식은 그가 여자에 빠지는 것. 그것도 몰지각한 상류층이 인정하지 않는 낮은 신분의 여인이다. 경우에 따라 이 여인은 미모와 조건 모두 조연인 악녀에 밀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를 평생 사랑할 것처럼 보인다. 이것, 너무 완벽하다. 슈퍼맨이 돌덩어리에 벌벌 떨고, 배트맨도 어린 시절 충격으로 악몽에 시달리는 등의 약점을 갖고 있는데 우리의 주연은 너무도 완벽하다. 하여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알고 보니 그를 시기하는 유능하고 사악한 친구가 그가 맡게 될 회사를 가로채려는 중이다.

이들은 주주총회에서 일전을 벌인다. 사악한 조연이 경영을 장악하고 본색을 드러내자 뒤늦게 정신 차린 주연이 이에 대항하는 형식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시청자의 판단엔 후계자로 내정된 주연은 회사를 맡을만한 인재이고 사악한 조연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일단 우리는 이 조연에게 사악하다는 표현을 쓴다.―물론 온갖 치사하고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또한 그 조연이 주연의 경영권을 빼앗는다고 한다. 아무리 주연의 얼굴이 더 뛰어나고 스타일이 좋다고 해도 너무 편파적이다.

<갤브레이스에게 듣는 경제의 진실>(지식의날개. 2007)은 이와 같이 주연만이 승리하는 드라마가 바로 대기업이 품고 있는 ‘결백한 사기(innocent fraud)’라고 말한다. 조금 더 풀어 말해보자. 지금의 대기업은 한 사람의 능력으로 경영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이다. 이 때문에 개인의 능력을 뛰어넘는 집단적 노력과 특별한 경쟁력, 즉 관료제가 필요해졌다. 다만 ‘관료주의’의 어감이 좋지 못하기에 ‘기업 경영’이라고 포장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관료주의가 ‘결백한 사기’인 것일까. 답은 관료주의가 경영진이 무조건적인 이득을 취하는 기반이 된다는데 있다.

사실 경영진, 전문 경영진은 대기업의 세습 경영권에 대체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세습은 여전하다. 국민들의 불편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단지 경영을 이어받을 후계자는 교체의 진통을 세금과 벌금, 기부로 이겨내면 된다. 그렇게 경영권만 쥐게 되면 무리 없이 기업을 자신의 손으로 주무르며 막대한 이득을 거머쥘 수 있지 않은가.

앞서 우리가 열광하는 드라마 속 대기업 후계자는 시청자들에게 경영자로써 인정받은 셈이다. 반면 그를 시기했던 조연은 그렇지 못했을 뿐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기업이 친족에게 세습되는 것은 명백한 사회문제이다. ‘명백한 사기’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문제는 경영자에 대한 관용이다. 주주총회에 참석한 사내 이사와 사외 이사, 감사, 그리고 투자자들이 경영자에게 무한하게 베푸는 관용이 문제이다. 이것이 갤브레이스가 말하는 ‘결백한 사기’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결백한 사기’는 비단 기업문화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선거를 통해 당선된(정당에 속한) 정부와 정치적 입장과 거리를 둔 용병으로 오직 전문적인 지식만으로 경제문제를 해결한다는 각 기관의 전문가들도 사기를 친다. 어디 그뿐인가 미래 경제 흐름을 예측하고 투자자를 선동하는 금융전문가도 사기를 친다.

이 사기의 메커니즘은 이렇다. 먼저 거부감이 드는 겉포장을 해체하고 대중이 만족할만한 포장지로 대체한다. 대중이 ‘자본주의’하면 일말의 거부감을 느끼자 ‘시장체제’로 바꾸는 식이다. 문제는 그 속성은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부의 양극화와 자연스레 연결되는 ‘자본주의’의 속성은 변치 않았다. 과거 ‘시장체제’는 대중에게 일말의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소비자로써 그들은 기업의 독점에 개개의 입김을 모아 바꾸거나 최소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셈이다. 허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시장’은 미리 선점한 몇 자본가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정부는 어떤가. ‘공공부문’, ‘민간부문’을 나눠 대중을 현혹시켰지만 점점 더 대기업에 영향을 인정할 뿐이다. 그들이 원하는 정책을 내어놓기에 급급하다. 더불어 정치적 입장을 버리고 전문 지식으로 무장, 침체된 경기를 되살리겠다고 호언장담한 정책전문가들은 효과 없는 조정론에 빠져있다. 경기가 침체되면 금리를 낮춰 시중 자금을 늘리고 인플레이션이 예측되면 반대의 조정을 가한다. 이론적으로 설득력 있는 상식이지만 효과는 없다. 금리를 낮췄으나 소비심리를 여전히 위축되고 이미 자본을 선점한 이들만 이득을 챙긴다. 예상치 못한 결과이다. 때문에 그들은 결백하다. 하지만 사기를 쳤다. ‘결백한 사기’를.

이 책은 상당히 얇다. 총 100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저자가 미국의 경제학자이고 현상분석도 그에 준하고 있어 국내 실정과 차이는 있지만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이다. 더구나 한미FTA가 완전히 체결된다면 미국과 우리의 연동성은 더욱 견고해질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갤브레이스는 기업과 정부, 금융 전문가들이 저지르는 ‘사기(fraud)’ 앞에 ‘결백한(innocent)'라는 수식을 붙였다. 이들의 사기 중 일부는 고의적인 것이 아니고 약간의 순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해도 사기는 사기일 뿐이다. 그가 예측하는 미국의 미래는 다소 어둡다. 젊은이들이 명약관화하지 않은 명분으로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잃는 시대이다.

이와 같은 책임이 ‘결백한 사기’를 저지르는 쪽에 조금이라도 해당된다면 변해야 한다. 그것도 신속하게 변화를 시도해야한다. 우리는 그 벼랑 끝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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