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 진실 - 갤브레이스에게 듣는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이해준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요즘 한국드라마 많이 변했다고들 한다. 반면 한편에서는 일부 지각 있는 작가의 대본이 그럴 뿐이지 아직 대부분의 드라마가 뻔한 공식에 충실하고 있다고 한다. 그 뻔한 공식이 무엇인고하면 ‘불륜’이 1등이고 ‘재벌 2,3세의 일탈’이 2등으로 이 둘은 엎치락뒤치락 순위 다툼 중이다. 그중에서도 주연이 속 재벌이나 명문가 후계자로 분한 드라마를 생각해보자.

국제공항에 주인공이 도착한다. 그는 매우 잘생겼고 매력적이다. 경영학위를 받았거나 중간에 부모 몰래 미대나 음대에 진학했던 학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대부분이 그 학위를 외국 유수의 대학에서 얻었다. 무엇보다 그는 젊고 유능하다. 한마디로 천재적이다. 아닌 경우도 있다. 얼굴만 뻔지르르 술과 여자에 빠져 소리 지를 줄 밖에 모르는 안하무인 방탕아도 있다. 하지만 그도 회를 거듭할수록 이내 특유의 유능함을 갖춘다.

뒤이은 공식은 그가 여자에 빠지는 것. 그것도 몰지각한 상류층이 인정하지 않는 낮은 신분의 여인이다. 경우에 따라 이 여인은 미모와 조건 모두 조연인 악녀에 밀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를 평생 사랑할 것처럼 보인다. 이것, 너무 완벽하다. 슈퍼맨이 돌덩어리에 벌벌 떨고, 배트맨도 어린 시절 충격으로 악몽에 시달리는 등의 약점을 갖고 있는데 우리의 주연은 너무도 완벽하다. 하여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알고 보니 그를 시기하는 유능하고 사악한 친구가 그가 맡게 될 회사를 가로채려는 중이다.

이들은 주주총회에서 일전을 벌인다. 사악한 조연이 경영을 장악하고 본색을 드러내자 뒤늦게 정신 차린 주연이 이에 대항하는 형식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시청자의 판단엔 후계자로 내정된 주연은 회사를 맡을만한 인재이고 사악한 조연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일단 우리는 이 조연에게 사악하다는 표현을 쓴다.―물론 온갖 치사하고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또한 그 조연이 주연의 경영권을 빼앗는다고 한다. 아무리 주연의 얼굴이 더 뛰어나고 스타일이 좋다고 해도 너무 편파적이다.

<갤브레이스에게 듣는 경제의 진실>(지식의날개. 2007)은 이와 같이 주연만이 승리하는 드라마가 바로 대기업이 품고 있는 ‘결백한 사기(innocent fraud)’라고 말한다. 조금 더 풀어 말해보자. 지금의 대기업은 한 사람의 능력으로 경영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이다. 이 때문에 개인의 능력을 뛰어넘는 집단적 노력과 특별한 경쟁력, 즉 관료제가 필요해졌다. 다만 ‘관료주의’의 어감이 좋지 못하기에 ‘기업 경영’이라고 포장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관료주의가 ‘결백한 사기’인 것일까. 답은 관료주의가 경영진이 무조건적인 이득을 취하는 기반이 된다는데 있다.

사실 경영진, 전문 경영진은 대기업의 세습 경영권에 대체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세습은 여전하다. 국민들의 불편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단지 경영을 이어받을 후계자는 교체의 진통을 세금과 벌금, 기부로 이겨내면 된다. 그렇게 경영권만 쥐게 되면 무리 없이 기업을 자신의 손으로 주무르며 막대한 이득을 거머쥘 수 있지 않은가.

앞서 우리가 열광하는 드라마 속 대기업 후계자는 시청자들에게 경영자로써 인정받은 셈이다. 반면 그를 시기했던 조연은 그렇지 못했을 뿐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기업이 친족에게 세습되는 것은 명백한 사회문제이다. ‘명백한 사기’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문제는 경영자에 대한 관용이다. 주주총회에 참석한 사내 이사와 사외 이사, 감사, 그리고 투자자들이 경영자에게 무한하게 베푸는 관용이 문제이다. 이것이 갤브레이스가 말하는 ‘결백한 사기’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결백한 사기’는 비단 기업문화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선거를 통해 당선된(정당에 속한) 정부와 정치적 입장과 거리를 둔 용병으로 오직 전문적인 지식만으로 경제문제를 해결한다는 각 기관의 전문가들도 사기를 친다. 어디 그뿐인가 미래 경제 흐름을 예측하고 투자자를 선동하는 금융전문가도 사기를 친다.

이 사기의 메커니즘은 이렇다. 먼저 거부감이 드는 겉포장을 해체하고 대중이 만족할만한 포장지로 대체한다. 대중이 ‘자본주의’하면 일말의 거부감을 느끼자 ‘시장체제’로 바꾸는 식이다. 문제는 그 속성은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부의 양극화와 자연스레 연결되는 ‘자본주의’의 속성은 변치 않았다. 과거 ‘시장체제’는 대중에게 일말의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소비자로써 그들은 기업의 독점에 개개의 입김을 모아 바꾸거나 최소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셈이다. 허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시장’은 미리 선점한 몇 자본가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정부는 어떤가. ‘공공부문’, ‘민간부문’을 나눠 대중을 현혹시켰지만 점점 더 대기업에 영향을 인정할 뿐이다. 그들이 원하는 정책을 내어놓기에 급급하다. 더불어 정치적 입장을 버리고 전문 지식으로 무장, 침체된 경기를 되살리겠다고 호언장담한 정책전문가들은 효과 없는 조정론에 빠져있다. 경기가 침체되면 금리를 낮춰 시중 자금을 늘리고 인플레이션이 예측되면 반대의 조정을 가한다. 이론적으로 설득력 있는 상식이지만 효과는 없다. 금리를 낮췄으나 소비심리를 여전히 위축되고 이미 자본을 선점한 이들만 이득을 챙긴다. 예상치 못한 결과이다. 때문에 그들은 결백하다. 하지만 사기를 쳤다. ‘결백한 사기’를.

이 책은 상당히 얇다. 총 100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저자가 미국의 경제학자이고 현상분석도 그에 준하고 있어 국내 실정과 차이는 있지만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이다. 더구나 한미FTA가 완전히 체결된다면 미국과 우리의 연동성은 더욱 견고해질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갤브레이스는 기업과 정부, 금융 전문가들이 저지르는 ‘사기(fraud)’ 앞에 ‘결백한(innocent)'라는 수식을 붙였다. 이들의 사기 중 일부는 고의적인 것이 아니고 약간의 순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해도 사기는 사기일 뿐이다. 그가 예측하는 미국의 미래는 다소 어둡다. 젊은이들이 명약관화하지 않은 명분으로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잃는 시대이다.

이와 같은 책임이 ‘결백한 사기’를 저지르는 쪽에 조금이라도 해당된다면 변해야 한다. 그것도 신속하게 변화를 시도해야한다. 우리는 그 벼랑 끝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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