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피플
파브리스 카로 지음, 강현주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대입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 목표하는 대학의 이름은 허구이다. 분명 그곳은 어떤 지역에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 학생증을 손에 넣기 전까지는 상상에 불과하다. 내 집 마련의 꿈을 갖고 사는 직장인은 어떤가. 그 손에 쥐어진 청약통장이 몇 년 후 혹은 몇 십 년 후 살게 될 집과 같을 순 없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삶은 상상이 실체화되는 과정이라 볼 수도 있다. 무엇인가 즉물적인 존재를 획득하기 위해 배우고 일을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 실제가 되기 전 수도 없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 역시 ‘상상에서 실제’로의 공식을 철저히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스틱 피플>(브리즈. 2007)은 그와 반대의 경우다. 목차만을 봐도 알 수 있다. ‘réalité(현실)’에서 시작해 ‘figurec’으로 끝난다. 더욱이 ‘피귀렉(figurec)’이란 단어는 ‘단역배우’라는 뜻의 프랑스어인 ‘피귀랑(figurant)’과 ‘피귀라시옹(figuration)'에서 착안했다니 그 자체가 거짓이다. 결국 이 소설에 담긴 한 남자의 인생은 ‘실제’에서 ‘허구’로 가는 과정이다.

주인공은 생면부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게 유일한 취미로 그곳에서 처음 피귀렉의 실체를 접한다. 알고 보니 피귀렉은 일종의 인간파견회사로 이미 200년 전에 시작돼 수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다. 이들이 엑스트라를 파견하는 곳은 참으로 다양하다. 장례식에도 결혼식장에도 이들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좀 더 일상적인 풍경으로 대형마트에 물건을 담고 옆을 스쳐가는 사람도 피귀렉의 일원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진실일까. 일상적인 풍경과도 같은 사람들이 실제론 고용된 배우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참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다. 한 번 생긴 균열은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하는 탓이다. 여기에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있다. 주인공이 겪는 혼란을 고스란히 읽어내야 하는 의심스런 재미 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현실도 이와 별 다를 바 없다. 체면치레를 위해 하객을 고용하는 결혼식의 진풍경은 종종 기사화되기도 해 익숙하다. 말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진실한 관계에 목말라하면서고 자신의 거짓의 주체가 된다. 아니 가짜로 가득한 자신을 포함한 주변이 진짜라 믿고 눈을 감아버린다.

<플라스틱 피플>이 뜻하는 것도 이와 같다. 만들어진 세상의 만들어진 사람들은 공장에서 용도에 맞게 생산된 플라스틱 제품과도 같다. 비단 피귀렉이 곳곳에 배치한 대역배우들 뿐이 아니다. 이들을 가족이나 친구로, 연인으로 믿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플라스틱 피플이다.

피귀렉의 존재를 알게 된 주인공. 그는 진실을 의심하기 보다는 안주하는 쪽을 택한다. 나아가 직접 피귀렉을 고용해 원하는 삶을 꾸린다. 비록 그 뒤에 남는 게 상처와 고액의 빚일지라도 거짓을 택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피귀렉이 되어간다.

우리는 흔히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라고 말한다. 자신을 존중할수록 삶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는 곧 자기계발의 채찍질이 되어 나를 다그친다. 내가 주인공이 되기 위한 삶을 누리기 위해 노력하라고 한다. 헌데 이는 무엇을 위함인가.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는 것인가. 혹시 인생은 오디션이고 삶은 주인공 자리를 꿰차기 위한 연기연습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플라스틱 피플>의 주인공이 희곡을 쓰듯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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