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곰이 자작나무에 한참을 기어오른다.
아래를 한번 쓱 내려다보더니 이내 몸을 던진다.
쿵, 로키 설파산이 흔들린다.
재빠르게 일어나 결린 허리께를 만져보고는 다시 꿀통을
찾는다.
쿵, 쿵 자꾸자꾸 떨어진다.
기나긴 겨울을 먹지 않고 견디려면 살이 더 쪄야 한다. 아
픔을 느끼지 못할 때까지.
회색곰이 드디어 엉덩이를 문지르며 씨익 웃는다. 됐다!
오직 몸으로 확인해야 하는 건 회색곰을 닮았네. / 겨울 채비 (P.30 )
호숫가로 초대를 받아 낮술을 마셨네. 물무늬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네. 등 젖은 사막이 늙은 어매처럼 누워 있었지.
바람이 응어리를 풀어놓으라고 속삭였네. 난 낙타
등에 타서 흔들흔들, 설익은 말을 마구마구 게웠지. 그때 천
년을 혼자 산 호수가 한마디 하네.
쉿 , / 낮술 (P.56 )
글라라 수도원을 가기 전, 나는 그만 이시돌 목장 벌판으
로 들어섰다. 양 떼들은 아직 옷을 빼앗기지 않은 풍성한 몸
으로 흥미 잃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저희끼리 한
몸인 듯 비비대지만 찬서리가 내리면 서로 밀어낼 것을 나는
안다.
벌판 저 아래서부터 밀고 나오는 여린 것들의 몸부림에 가
슴이 떨린다. 채이고 짓밟히고 다시 일어나, 누추한 생이
시작하는 순간을 어찌 아무 떨림 없이 바라보겠는가.
중산간도로 위 어둠은 망설임 없이 내리고, 글라라 수도원
에 닿는 길은 아직 멀다. / 중산간도로 한가운데서 (P. 33 )
검은 머리 여자가 보들레르의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다.
들썩이는 어깨를 보니 내 마음도 젖는다. 넓은 이마에 퀭한
눈, 수척한 그의 사진 옆에는 하얀 튤립 화분이 놓여 있다.
묘석 위엔 먼 곳에서 날아온 사람들의 승차권과 편지가 쌓
여 있다. 그들은 홀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또 듣고 싶은 말
을 듣는다.
나는 죽은 시인과 아무런 소통도 못하고 무덤가의 시든 꽃
잎만 거두어주었다.
실어증과 반신불수로 세상을 떠난 보들레르, 허한 말을 놓
아놓고 육신의 자유를 잃어버린 후에야 만난 죽음. 태어날 때
도 죽을 때도 불운했던 천상의 시인.
그 앞에 내 민망한 허기를 내려놓는다. / 시인의 집 (P.37 )
지갑에 참을 인忍 자 석 자를 넣고 다닌다는 보일러공 시인
이면우. 돈을 참고 술을 참고 여자를 참고, 참 잘도 살아냈다.
쉰을 넘긴 맑은 얼굴. 그가 참으며 빚어낸 저 장한 자식들 눈
물겹게 살아서 내 안으로 잠겨든다.
아직 한창인 식욕을 참고 사주에 타고난 역마살을 참고
대물림으로 받은 한량기를 참으며 예까지 겨우 왔다. 지나온
길 돌아보니 내가 마련한 것들 허름하여 미안하다. 이 몸도 쉽
게 산 시간 없지만, 몸으로 산 그에게 오늘만은 깊이 엎드림.
/ 경의를 표함 (P.92 )
파쇄기에 잘린 새 책, 마르지 않은 먹과 부풀지 못한 종이
가 국수처럼 빠져나온다. 윤기 흐르던 얼굴, 잘린 자국마다
검은 피 흐른다. 감지 못한 눈 푸르게 빛나는 데, 아직 더 할
말이 남아 있는데 오늘, 가차 없이 잘린다.
쾌적한 서고書庫 잘 보이는 곳에 당당하게 서 있다가 눈 밝
은 이의 손때로 매끈해지고 싶었는데, 책장을 넘기며 잠깐씩
고개를 끄덕이고 또 가끔은 눈물도 질금거려서 군데군데 얼
룩도 있어야 했는데, 자주 넘긴 흔적으로 살짝 부푼 몸피로
오래오래 살아남아야 했는데. / 冊, 울다 (P.97 )
-노정숙, <바람, 바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