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저녁
이 세상에 처음 해 보는 것이 많겠지만
막 걸음마를 뗀 아이의 발걸음이
처음 해 보는 것이 꽃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눈을 감은 채
물방울에 손을 집어 넣고
꽃 속에 저무는 발걸음과 만나는 것이 처음 해 보는 것이
었습니다
꽃에 스치는 물방울도 길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온 마음들이 비치는 물방울이
바다처럼 맺혀서 보는 이도
이 세상에 나서 처음 보는 것 같은 저녁인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눈을 감는 일이었습니다
가만히 가만히
꽃 앞에 무릎을 끓고 있는, 처음인 저녁인 것이었습니다 (P.17 )
악기를 연주하고 싶은 그런 날
오랜 서가에 꽂아 둔 낡은 책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썼던 편지를 발견할 때,
마치 내가 나에게 편지를 쓴 것처럼 아릴 때
그런 날에는, 정말
먼지를 뒤집어쓴 악기를 꺼내어 연주해야 한다
가슴에 묻어 둔 사랑의 밀어를 바라보면
기억조차 희미해져 제 별자리로 돌아간 듯 하다
어느 누군가도
나에게 그런 편지를 썼으리라
흐릿한 시간의 별자리에서 천천히 돌고 있는,
어린 무 잎처럼 아린 글씨가
빼곡히 들어찬 부치지 못한 편지들
먼지와 세월에 얼룩진,
뒤틀린 책 속 공명통에서 울리는
나의 밀어와 영혼을 간직한 악기여 (P.34 )
찐빵집에서 올라오는 하얀 김
겨울에 도시로 전학 와 새 학교 갔다
처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녁이 오도록 집을 못 찾고
비슷비슷한 골목길을 헤매 다녔다
시골집에서는 저녁때가 되면
무쇠솥을 들썩이는 밥물의 김처럼
부엌문을 열고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만으로
동네 어디에서 놀고 있어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나 혼자의 힘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며,
찐빵집 앞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을 바라보았다
겨울 저녁 찐빵집 앞을 지나가다 그때처럼
추억의 온도로 부연 찐빵의 김에 내 자신을 맡기고 싶어
진다
앙꼬 가득한 찐빵을 뜨겁게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으며
하얀 김 속에서 그렇게,
집에 가다 말고 잠시 서 있고 싶어진다 (P.87 )
신발장
버려진
냉장고 속에
나란히 놓여 있는
아기의 꽃신과
노인의 털신 하나
노인과 아기가
눈 내리는 날,
냉장고에서
신발을 꺼내어
나란히
시골길을 걷는다
그들의 뒤로
찍히는 발자국은
사랑의 다른 이름일까
언젠가, 나도
저런 냉장고 한 대
갖고 싶다 (P.88 )
-박형준 詩集, <불탄 집>-에서
[시인의 산문]
어머니는 ‘불탄 집’이다. 어머니는 평생 심화(心火)를 가슴에 안고 사셨다. 이제 그 집은 불타 사라졌지만 그 심화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마음속의 불, 어머니의 가슴에 타는 그 불을 누가 꺼뜨릴 수 있었겠나. 내가 시를 쓰는 것은 그런 어머니의 가슴에 팔찌를 하나 놓아 드리는 일이었다. 자식과 가족을 짝사랑하여 언제나 가슴에 불을 품고 사는 여인, 그 여인의 가슴에 시라는 팔찌를 내려놓은 일은 그 불을 다스리고자 하는 일만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여자 지귀(地鬼)였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시를 쓴다 하여 무슨 왕족이 될 수 있는 것도, 더구나 여자 임금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상력이 한계가 없다 한들 현실의 뿌리까지 바꿔 낼 수 있겠나. 다만 그 뿌리에서 피어난 꽃을 조금은 아름답게 허공에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쉬페르비엘의 시를 일컬어 조르쥬 뿔레는 “보존된 수천의 기억보다 재발견된 추억 하나에 더 많은 기쁨이 있다”라고 평을 내렸다는데, 내가 어머니의 가슴에 놓아 드리려 했던 시라는 팔찌도 그 말과 먼 것 같지는 않다. 내 시의 팔찌는 어머니의 수천의 심화가 하나의 추억으로 재발견되기를, 그리하여 가족과 나를 짝사랑한 그녀의 인생이 조금은 찬란해지기를 바라는 답례품이다. 이제 시라는 팔찌가 된 어머니의 추억은 세상의 만물을 비추어 준다고 시를 쓰는 한은 믿고 또 믿어야만 할밖에 나로서는 도리가 없다.
어쩌다 보니 지난 시집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이번 시집은 또 하필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씌어진 시집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두 시집은 그걸 기념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한 팔찌 한 쌍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 시집은 지난 시집에 이어 조금은 일찍 내는 시집이 되고 말았지만, 나는 이제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돌이킬 수 없이 가깝고 가장 멀기도 한 여정으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빛도 태양도 더 이상 없을 때에 어머니의 가슴에, 그리고 그녀의 무덤 위에 놓인 그 팔찌가 비추어 주는 게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그 팔찌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존재 이유를 조금은 확인할 수 있지 않겠나. 아들이 이승에서 고생만 하다가 저승으로 간 어머니에게 주는 답례품이 시라는 팔찌라면―이승에서 수천의 고생의 기억만 가진 그녀의 재발견된 추억 하나―어머니의 인생은 참으로 허무하고 참담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그러나 어쩌겠나. 시를 쓰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심화를 아로새길 팔찌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고, 나 또한 내 심화로 불타 버렸을 것이기에, 어머니를 위한 팔찌는 결국은 나를 위한 팔찌이기도 한 셈이다.
이제는 어머니와 나의 심화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심화가 승화된 불로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시를 쓰고 싶다.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은 망각의 변방에서 승승장구 돌아올 밝은 시를 쓰는 것은 언제나 나의 꿈이었다. 열렬하게 지귀의 시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