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처럼, 살았던 한 해였다.
달팽이는 다만 순간에 바라본 자의 시선에 그렇게 '생각되어지는 것'이지 느리지 않다.
달팽이는 매 순간을 끊임 없이 움직이며 자신의 의지나 마음의 방향대로 이동중인 것이다.
이 해의 마지막 끄트머리에 내게 고요히, 빠르게 '퀵 서비스'로 선물이 도착했다. 김동유의 <그림꽃, 눈물밥>을 받고, 차분하고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책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림으로 아프고 그림으로 피어난 화가 김동유의 지독한 그리기'라는 상투적인 부제가 써있는. 그럼에도 왠지 이 책이 좋았다. 빨리 읽고 이 사람의 그림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욕망처럼 꿈틀거리고.
해야할 일들이 잔뜩 기다리는데, 굼벵이처럼 느리게 혹은 나비처럼 날아가듯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엔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담담하게 치열한 내면의 소리를 써 내려간 그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출렁이기 시작하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그의 글들과 그림들을 읽으며 충만한 행복함으로 젖어들며 아, 내게 이 책을 선물로 보내준 나의 그 사람에게 다시금 감사의 마음을 느낀다.
그의 그림들은 화려하고 예쁜 그림이 아니다.
프롤로그의 제목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세상의 모든 유령들에게'라는, 사랑에 빠진 유령이 세상 밖으로 나오듯, 당신들이 당신들의 하고자 하는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일에 완벽하게 자신을 던졌을 때, 존재는 드러남을, 이야기하고있다.
'이제는 좀 안다. 내가 그토록 숨을 불어넣고 싶었던 그 천박한 이미지들이 사실은 내게 세상의 무언가를 만들고자 했던 열망이었음을, 미친놈처럼 그리고 또 그렸던 보잘것없는 것들이 나를 살아가게 하였고, 다시 일어서게 만들었고, 끝내 나를 환쟁이로 살게 하였음을 말이다.' (30쪽)
그는 새롭고 세련된 이미지에 의해 밀려난, 그러나 여전히 어디선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미지들에 주목하고 이를 채집해 여기에 기생한다. 그러고는 그것을 '낯설게' 보여준다. 그 목록들은 이발소 그림이나 성냥갑, LP음반 재킷 디자인, 광고탑, 위장무늬, 부적이자 죽은 이의 초상사진들이다. 인쇄된 서양미술사의 명화들 역시 차용해 낯선 방식으로 재배열한다. 이르테면 <모나리자>나 다비드의 <튈리 서재의 나폴레옹>처럼.
'오래된 것들, 촌스럽고 사장된 것들의 생명력은 갈수록 짧아진다. 그러나 기억의 갈피 어디쯤에 있는 잊혀진 물건들에 생명을 다시 불어넣을 수 있다면 그 작업도 쓸모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만, 기존의 프레임을 비틀고, 변화를 주는 것도 단순한 변형이 아닌 또 다른 새로움이 아닐까.(144쪽)
그는 이발소 그림에 때깔을 입히며 '유토피아 페인팅'이 될 수 있지 않을까를 꿈꾸며 시도하며 , 1990년대에 점과 도형을 반복하여 어느 형상을 캔버스에 그려내는 작업으로 변화를 한다. <꽃과 여인>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레디메이드'와 ''클리셰'의 이중그림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 이중그림으로 이화익 갤러리의 주선으로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 나갔고, 픽셀 모자이크 회화기법으로 팝아트 미학을 자신의 예술철학으로 흡수하는 것은 물론, 대중예술로서의 팝아트에 깊이와 상상력을 더한 스타 화가이자 '도전자'에서 '거장'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김동유 화가의 그림은 아름답게 치장된 그림이 아니다. 삶의 흐름 속에 발생하고 포착된 '생의 순간'들이다. 그래서 보는 내내 하얀 휴지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이 번지듯 마음 속에 스며들어 내게 고요한 기쁨과 생명을 느끼게 해주었다.
책을 읽는 내내 너무 좋고 행복했다. 나의 '살아있음'의 순간을 누군가의 '살아있음'의 빛으로 반복하여 재조명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그림이 다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이상하게도 2002년의 자화상 'Self-Portrait'(52쪽)와 2000년의 'Flower and Woman'(82쪽), 계란 껍질을 이미지로 형상화한 'The Method of Colletion/1994'(282쪽), 그리고 체 게바라를 그린 'Che Guevara & fidel Castro/2009'(292쪽)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올해의 마지막 날에 뜻하지 않은 선물로 '그림꽃, 눈물밥'을 읽게 된 일은, 내게 큰 기쁨이었고,'굿 럭!'이다. 끝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붙어 있음으로.
혼란스럽기도 하였고, 때론 정지되기도 했으며 그러면서도 다시 걸어 나갔던 내게 보상이기도 하고 '역동의 순간'이기도 해서 너무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김동유 화가의 글을 빌어 올해를 마무리한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그럼에도 갈 것인가, 아니면 그만둘 것인가. 그러한 절박한 순간이 다가오면 그것이 내길인지 아닌지를 알게 된다. 그 순간 정녕 포기할 수 없다면 그때부터는 그 과정을 즐기기 위해 미쳐야 한다. 미쳐서 그것이 과정인지 성공인지 조차 가늠할 수 없을 때 그 열정의 순간만이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자 성공 아닐까.(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