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의 낡은 나무 창틀은 겨울이 오면 심하게 운다. 냉기를 막아 보려고 커다란 김장용 비닐을 통채로 창문에 덮어 본다.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에 커다란 비닐이 오르락내리락 숨을 쉬고, 야심한 겨울의 밤, 나는 창가 앞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영화를 본다. 발이 시려 의자 위로 발을 모아 올리고 생강차를 마시며 나루세 미키오의 오래 전 영화를 보고 있으면 낯선 나라의 옛정취가 그리 먼곳에 있지 않다. 흑백의 사각 프레임 안에 그 시절의 골목이 보이고 영화는 사라질 샤미센과 미싱소리를 기억하고자 한다.

기억이나 자취를 중요하게 여기는 영화를 보다가 이제 이런 영화가 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니,

'영화의 중요한 시간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은 아닐까'

또 한번 아쉬움이 스친다. (133쪽) /옛날 영화.

 

 

해 질 녘, 정확히 조니 하트만의 'I see your face before me' 가 흘러 나오고 프란체스카와 로버트가 춤을 출 때부터가 좋다. 적당히 영화를 모니터에 띄워 놓고 적당히 볼륨을 올려놓으면 방안에 음악이 넘친다. 창문으로는 앞 건물 유리에서 반사된 누런 빛들이 들어온다. 빛은 흩어져서 방 전체에 일렁인다. 노래를 해치지 않을 만큼 두 배우의 숨소리와 낮은 대화소리가 들린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영화는 계속해서 낮게 읇조리거나 좋은 음악을 들려준다. 옆에 같이 누울 누군가가 있다면 금상첨화라 하겠다. 혼자 있다면 영화가 끝나기전 낮잠에 돌입하는 것이 좋겠지.(136쪽)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라디오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나도 영화를 '들으며' 즐길 때가 있었다. 중학교 때는 영화를 본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서, 라디오로 영화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매일 밤 9시면 라디오에선 이선영의 <영화음악실>이 흘러 나왔고, 난 할머니 집에서 몰래 가져온 복음성가 테이프에다 영화음악을 녹음했다. 녹음방지 탭 부근을 휴지로 틀어막은 채, 영화 <백야>의 주제곡이나 <실버라도>의 배경 음악 등을 녹음 한 후 듣고 또 들었다. <영화음악실>은 금요일에는 영화 한 편을 통째로 소개해 줬는데 내가 가장 사랑한 시간이었다. 이불 안에 누워 존 맥티어난의 <다이하드>를 들으면, 나긋한 목소리가 긴장 넘치게  영화의 서스펜스를 전달했다. 난 머릿속으로 얼굴도 모르는 브루스 윌리스를 그리며 테러리스트와의 흥미진진한 대결을 숨죽이며 경청했다. 나중에 친구 집에서 비디오로 <다이하드>를 보게 됐는데, 상상과 실제의 괴리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를 눈으로 본다는 것에 감동에 눈물이 돌 정도였다.

시각화의 예술인 영화를 귀로 듣는다는 건 매력이 있었다. 나도 가끔 본 영화나 만들 영화를 주위에 들려주곤 하는데, 들은 것이 더 낫다는 평가를 들을 때면 난감해지곤 한다. (149쪽) / 듣는 것이 낫다.

 

 

영화가 편지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누구에겐가 편지를 보내고, 읽혀지기를, 마음에 가닿기를 바라는 것. 그러한 목적이 살아 있을때 영화도 살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고단한 여정에 아랑곳 없이 수취인 불명의 편지가 되어 무관심 속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기도 한다.

긴 죽음의 시간. 만약 시네마테크가 그러한 영화들의 마지막 숨결을 불러 일으키고, 다음 세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건 그 영화가 아직 살아 있다는 이야기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도 어떤 이에게 도착한 편지처럼, 우리 앞에 당도한 영화인 것이다. 죽은 영화들은 그렇게 살아 있고 시네마테크에는 수취인불명의 은밀한 편지들이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151쪽) /아네스 바르다의 <방랑자>와 시네마테크.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다. 사라지는 것을 잡을 수 있는 것은 기억밖에 없다.

   영화는 잊혀질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일 것이다.

   리셋.

   다 떼어버렸으니 새로 시작해야지.

   말끔하게 떼어버렸으니 나는 새로 산 다이어리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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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5 23: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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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5 2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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